-
-
위기, 왜 발발했으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양장)
미셸 아글리에타 지음, 서익진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9년 8월
평점 :
이책을 이제야 읽으니 할 말이 없다. 어렵지도 그렇다고 두껍지도 않은 책을 해가 바뀌도록 쌓아만 놓았으니 말이다.
저자 아글리에타는 조절학파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조절학파는 모르더라도 경제 관심이 있다면 포디즘, 포스트포디즘이란 말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용어들이 조절학파에서 만든 개념들이다.
조절학파는 맑시즘 계열이지만 강단에 유배된 네오맑시스트들과 달리 비판을 위한 비판만 할 뿐인 공리공론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 경제운영에도 참여하는 사람답게 아글리에타의 글을 보면 현실과 거리를 두지 않는다. 이책 이전에 나온 ‘세계 자본주의의 무질서’를 읽어보면 저자의 현실성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를 다루는 이책 역시 저자의 현실성을 잘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이책의 내용은 왜 이번 위기가 일어났으며 그 경과는 어떠하고 앞으로 대책은 무엇이며 세계경제의 장기적 트렌드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이다.
이런 내용을 다룬 책이 위기 이후 몇 년간 쏟아졌고 아글리에타 만큼의 중량급 학자들의 책들도 많이 나와 잇다. 그러면 그 많은 책들 중에서 이책을 읽을 이유가 있는가? 더군다나 이책은 2008년에 쓰여졌다. 한참 위기가 정점을 지나는 시점에서 쓰여졌다는 말이다. 위기가 상당히 경과한 작년 시점에서 나온 중량급 저자들, 예를 들어 스티글리츠, 루비니 등의 책도 있는데 말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책을 사다 놓고 손이 안 갔었다. 사실 이책을 보면 그 후에 나온 중량급 저자들의 책들과 내용에서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책은 위기의 원인, 경과에 초점이 잇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정책대안에 더 관심이 있고 그 정책대안은 다른 중량급 저자들과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나름의 충분한 의미가 있다. 우선 조절학파의 매력인 논리적 정합성 위에 구축된 거시적 논리가 이책에도 충분히 살아있다. 둘째 이책은 이번 위기의 원인인 글로벌 불균형을 다룬 ‘세계 자본주의의 무질서’의 부록으로서 의미가 잇다. ‘세계 자본주의의 무질서’는 이번 위기 직전에 출판된 책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왜 이번 위기가 일어났는지를 다른 어떤 책들보다 더 매력적으로 설명한다. 조절학파 특유의 웅장한 논리구조 때문이다.
이 책의 논리는 전작에서 글로벌 불균형을 설명한 논리 위에서 왜 이번 위기가 일어났는가를 확인하는 부록의 성격이 강하다.
전작에서 저자가 글로벌 불균형을 설명하는 변수는 신흥경제의 디플레이션 압력과 주주가치 논리이다. 저자는 이책에서도 두 변수를 이용해 이번 위기를 설명한다. 우선 저자는 미시적 원인을 설명한다.
저자는 자본주의에서 금융위기는 내생적일 수 밖에 없고 그렇기에 위기를 예방한다는 것은 것은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별종일 수 밖에 없다고 저자는 본다. 그 규모가 너무 거대하기 때문이다. “현 위기의 강도가 예외적일 정도로 높은 까닭은 제공된 신용량이 과거 어느 때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신용팽창을 보통 탐욕이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 인센티브와 같은 논리로 접근한다. 그러나 저자는 다른 학자들과 달리 제도적으로 접근한다. 미시적으로 신용이 팽창한 이유는 지금까지 지적된 것처럼 우선 CDS와 시가평가, VaR 때문이엇다는 데서 저자는 시작한다.
시가평가에 대해선 많은 언급이 잇어왔으니 CDS로 넘어가자. 투자은행들은 CDS로 리스크를 제3자에게 떠 넘길 수 있었기 때문에 리스크에 대한 준비금을 쌓을 필요가 없었고 “리스크를 매도한 은행은 족쇄가 풀린 자본을 갖게 되고 그만큼 신용 레버리지를 증가시킬 수 잇다. 은행들 전체가 리스크를 다른 금융기관들로 이전시킨다면 이젠 은행 시스템 전체에서 신용 레버리지가 증대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대출 리스크 평가법이 신용팽창을 한 단계 더 부풀렷다고 말한다. “이제 은행은 신용 리스크 모델을 비롯한 통계적 방법을 사용하여 대출 여부를 결정한다. 이 모델은 다음과 같은 VaR(Value-at-Risk)의 원리에 입각해 잇다.” “그리고 은행은 시가 기준(mark to market)에 입각해 보유 자산의 가치를 항상 (재)평가하며 자신의 대차대조표에 등재된 자산들의 가치는 금융 사이클이 상승 국면에 있는 한 계속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손실 발생의 리스크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런 조건들이 있었다고 해서 반드시 신용팽창이 일어나야만 했던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신용팽창의 근원은 주주가치였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투자은행이 자산 구입을 목적으로 하는 투자자들에 대한 대출을 늘리면 늘릴수록 투자은행의 대차대조표 대변에 나타나는 자본 비율은 더 낮아진다.” 다시 말해 레버리지가 높아진다. 레버리지가 높아지면 기업으로서 은행의 재무구조는 취약해진다. 그러나 “자본의 경제적 수익성을 훨씬 상회하는 자기자본 수익률을 제공하라는 주주들의 지상명령은 차입 레버리지의 활용없이는 제대로 수행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투자은행의 주주들이 자본 수익률의 무한상승을 바라기 때문에 투자은행은 그만큼 더 차입을 늘리게 된다. 그런데 은행이 자본을 굴리면 굴릴수록 공여된 신용의 보장에 필요한 자본은 줄어드는 반면 자기자본 이익률은 더 상승한다.” 그러면 주가도 상승한다. “이처럼 자산 가격이 팽창하는 시기에 은행으로서는 대출을 늘려야 할, 따라서 차입을 늘려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잇는 셈이다.”
저자는 세계경제의 거시적 조건이 그러한 차입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조건이 만들어진 것은 아시아 위기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시아 위기를 “겪었던 나라들의 성장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경제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대외채무를 가능한 한 빨리 상환하기 위해 이 나라들은 중대한 구조적 조치들을 채택했고 그 결과 세계경제의 판도가 바뀌었다. 이 나라들은 내수 주도 성장모델에서 수출 주도 성장모델로 이행했고 그럼으로써 달러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변신했다. 왜냐하면 대외측자를 누리게 된 이 나라들은 국내 저축이 국내 투자를 훨씬 상회함으로써 당연히 자본 수출국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가 초래한 영향을 막대했다. 게다가 그와 동시에 중국과 인도의 대외무역이 급속하게 개방되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세계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디플레이션 압력이 강해졌고 인플레이션 우려가 사라지면서 금리가 떨어졌다.
이때 아시아 위기의 충격으로 미국의 닷컴버블이 터진다. “미국경제는 디플레이션이란 위험천만한 경사지로 미끄러져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린스펀은 애당초 구상했던 단기적 경기부양 정책을 계속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금리가 낮아지면서 우리가 알듯이 가계의 막대한 차입이 가능했다. “이것은 막대한 채무가 기업부문에서 가계부문으로 이전되었음을 의미한다.”
“아시아 나라들이 채택했던 성장체제는 환율 통제 능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달러 시스템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금을 미국에서 운용하는 것이 안전한 것으로 간주되엇다. 왜냐하면 미국의 금융은 대대적인 확장 국면에 있었고 또 미국의 투자은행들이 가장 수익성 높은 신용 모델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풍부한 유동성이 미국의 채권시장으로 계속 밀려들었고 이로 인해 리스크 프리미엄이 비합리적인 수준까지 폭락했다. 금융부문은 이를 활용하여 자산의 가치증식에 더욱 몰두햇다. 바로 이 새로운 현상이 미시경제적 차원에서 금융공학의 발전과 결합됨으로써 신용 증가가 과거 어느 금융 사이클에서보다 훨신 더 강력하게 또 훨씬 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자가 이번 위기의 발생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논리는 위와 같이 요약된다. 저자는 그렇게 일어난 위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실제 정책적 차원에서 위기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며 단기적 대책, 장기적 대책 등을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최근의 스티글리츠의 책 두권을 보는 것을 더 추천한다.
저자가 앞으로 세계경제의 장기적 전망을 어떻게 보는가를 소개하면서 끝내려 한다. 저자는 이번 위기 해소의 열쇠는 아시아가 쥐고 있다고 본다. “자산 가격이 바닥을 칠 때 드래서 장차 자산가치가 상승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게 될 때 (아시아의) 국부펀드나 연기금 같은 장기 투자자들은 즉각 서구 경제의 자산에 막대한 투자를 재개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위기의 탈출이 시작된다고 저자는 본다. “위기의 출구는 결국 신흥국들이 국부펀드를 매개로 서구 세계에 직접투자 및 증권투자의 형태로 막대한 자금을 유입시키는 것에 의해 주어질 것이고 그 결과 지구상의 경제적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해갈 것으로 전망하는데는 합당한 근거가 있다. 아떤 경우든 현행의 세계 위기가 불러일으킬 반향은 양차대전 중간기으 위기와는 전혀 다를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구체적 그 다른 점을 세계화의 지속이라 말한다. “1929년의 위기는 세계경제의 완벽한 파열, 국제관계의 붕괴 및 각국의 민족주의로의 복귀로 귀착되었다. 이와는 달리 2008년의 위기로 두 번째ㅑ 세계화 과정이 종식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이 세계화 과정은 다른 형태로 지속될 것이다. 금융 흐름들이 역전되고 서구 나라들은 불황을 겪게 되겠지만 아시아 나라들과 몇몇 신흥국들에서는 경제 활동의 다소간의 둔화에도 불구하고 성장이 계속될 것이다./ 이에 따라 경제와 금융의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한느 경향이 나타날 것이다. 1929년 대공황의 사태 전개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세계화는 지속되리라는 것, 더구나 이러한 세계화의 지속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지도자들의 공동 의지를 반영하고 잇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가 그리 밝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 미래는 여전히 세계화로 하나가 되어가는 지구이겠지만 그 미래는 지금과는 다른 세계일 것이라 저자는 본다. 저자는 전작에서 세계경제가 디플레이션의 시대로 들어섰다고 진단한대로 “이제 아주 강력한 경제적 둔화 내지 후퇴의 시기로 진입했고 뒤이어 일련의 미약한 성장이 지속되는 시기가 올 것으로 단언 할 수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