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집 맏아들 - 대한민국 경제정의를 말하다
유진수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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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나라다. 일본으로 유학을 간 중국인에게 왜 일본인 학생들과 어울리지 않느냐 물으니 사회주의에 물들까봐라 말했다. 명색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보다 명색이 자본주의인 일본이 더 사회주의적이란 말이다. 강한 평등지향성은 한국이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강한 평등지향성은 그 사회에서 부자를 어떻게 보는가로 측정이 가능하다. 나보다 돈이 많은 것이 부러움의 기준인가 존경의 기준인가이다.

 

평등보다는 자유 즉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의 경우 부는 존경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자유보다는 평등성향이 강한 사회에선 부는 존경보다는 단지 부러움이 기준일 뿐이다. 나보다 잘 난 놈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인데 이 속담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다.

 

한국인은 부자를 부러워는 하더라도 존경하지는 않는다. 강한 평등성향이 이유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부는 권력과 마찬가지로 지위의 기준이다. 지위에는 존경과 부러움이 모두 따르게 마련이다. 어느 사회든 평등성향과 자유성향(즉 경쟁지향성)은 모두 있게 마련이고 단지 그 비율이 다를 뿐이다. 어느 성향이 더 강한가에 따라 존경과 부러움의 비중이 달라질 뿐 어느 것이 일방적으로 관철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얼마전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 한국인들은 존경을 표시했다. 한국에서 존경이 없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문제는 그 지위의 정당성이다.

 

전통이 사라진 한국과 달리 전통의 무게가 장구한 일본이나 유럽에선 여전히 과거의 귀족이었다는 것이 큰 의미를 갖는다. 과거에 조상이 어떠했다는 자체가 권위의 정당성을 제공한다. 전통이 없는 미국의 경우 그 정당화는 실력이다. 어쨌든 부와 권력을 가졌다는 것은 실력이 있다는 증명이며 지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한국에선 전통도 실력도 지위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요약한다. “혼자 힘으로 부자가 된 사람은 없다.”

 

학교 다닐 때 철학개론 시간이었다. 젊은 철학과 강사가 맡았던 수업인데 나이든 교수의 의무적인 수업보다 더 생산적인 강의였다. 교과서를 무시하고 현대철학자 한 사람씩을 골라 강사가 그들의 철학에 대해 소개한 다음 그 철학의 기준에 따라 현재의 눈앞의 문제들을 학생들이 발표하게 하는 형식이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주제 중의 하나는 동성애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학생들이 찬성, 반대로 발표했던 것이다.

 

그 강의에서 한번은 노직을 다루었다. 철저한 개인주의자인 노직이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신자유주의의 흐름을 탔기 때문인데 강의 중에 그의 이론이 현실을 어떻게 보는가를 설명할 때였다.

 

내가 내 노력으로 돈을 벌었다. 그런데 왜 정부가 그돈을 뺐어가야 하는가? 그런 주장에 대해 내가 했던 질문은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이상 내가 벌었다고 주장하는 그 돈에는 남의 몫도 잇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시장근본주의자라도 세금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시장이 존재하려면 경찰과 군대라는 최소한은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시장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번다는 주장을 하려면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에는 여러가지가 잇다. 계약이 지켜질 것이라는 것을 보장하는 사법시스템, 물류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한 교통 인프라 등은 모두 세금에 대한 국가의 서비스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노력으로 벌었다고 주장하는 돈에는 국가의 몫이 포함된다. 그러나 노직이 반대한 것은 세금 자체는 아니다. 그의 속내는 복지국가였을 것이다. 내가 번 돈에서 국가의 몫이 얼마인지 그리 분명하지 않지만 몫 자체가 잇다는 것은 인정할 수있다. 그러나 왜 국가가 그 이상을 거둬가느냐는 것이다. 내가 돈 버는데 기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세금은 강도짓이란 말이다.

 

레이건이 좋아하던 캐딜락을 타고 다니는 복지여왕의 예가 아니더라도 일리가 없는 불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할 몫은 정말 없는 것일까?

 

여러가지 근거가 있을 수 잇지만 저자는 한가지만 언급한다. 도덕적 의무이다. 사회를 가족이라 생각해보자. 맏아들이 성공햇다면 맏아들은 가난한 부모와 동생들을 도와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갖는다. 그것이 연대의무다. 돈을 많이 번 맏아들이 부모와 동생들을 나 몰라라 하는 경우 우리는 그에게 도덕적 비난의 화살을 던진다.” 연대의무는 단순히 그러해야 한다는 의무가 아니라 사람이면 당연히 갖는 인지상정이기도 하다.

 

“’당신이 코칭하는 CEO들이 인생에서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게 뭡니까?’ 애니스에 따르면 CEO들의 소망은 주가상승이나 분기 영업이익률 향상 같은 게 아니었다.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사회를 위해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거에요. CEO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해요. 진정한 가치를 지닌 그 무언가에 기여하기를 바란다는 거죠.’” (하워드 블룸)

 

돈이란 것 자체가 왜 필요한지 생각해보자. 일정 수준을 넘어가는 돈은 생존과는 무관하다. “인간이 돈을 많이 벌고 싶어하는 이유는 돈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금이야말로 인간이 마음 속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잘 보여주는 감정의 산물이다.” (하워드 블룸)

 

그러므로 연대의무는 인간이면 누리고 싶어하는 권리이기도 하다. 그런 의무를 무시할 때, 그보다는 그런 권리 자체를 모르는 부자를 사람들은 인정하기 어렵고 존경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권력은 행사되어야 하고 부는 쓰여져야 한다. 한국의 역사와는 별 상관이 없는 (군사귀족에게나 어울리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말이 유행한 이유는 쓰여지지 않는 부에 대한 비난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한국의 부자들이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보다 더 뿌리 깊은 것이라 말한다. 다시 저자는 가족의 비유를 든다.

 

세 명의 자녀를 둔 가난한 부모가 시골에서 근근히 논밭을 부쳐 먹고 살았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 때문에 세 자녀 중 한명, 맏아들만 대학 공부를 시켯다. 등록금을 내기 위해 애지중지 키우던 소까지 내다팔았다. 다행히 맏아들은 공부를 썩 잘했고 의사가 되었다. 돈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대학에 가지 못한 둘째와 셋째는 가난을 이어받아 아직까지 어렵게 산다.”

 

저자가 말하는 맏아들은 물론 재벌이다.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 정부는 몰아주기 전략으로 재벌을 키웠다. 없는 형편에 되게 하려면 공평한 것보다는 될 놈에게 몰아주는 것이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광복 직후 정부는 시장경제를 도입휴ㅏ는 과정에서 모든 기업과 국민에게 골고루 혜택을 주지 못했다. 경제적 자원이 크게 부족했기 때문이다. 정경유착이 심했던 것도 한 요인이었다. 당시 정부는 특정 기업 또는 특정인에 한정해 다양한 혜택을 주었다. 가난한 부모가 맏아들만 대학에 보내듯 말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대부분 그와 같은 혜택을 입으면서 성장햇다.” 선택과 집중이란 전략은 성공했고 지금의 재벌이 있게 되었다.

 

“2006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기업의 목적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한국인 응답자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34.4%)사회와 국가의 발전에 있다고 답했다. 근로자의 복지와 발전에 있다는 응답도 27.8%에 달했다. 반면 기업의 이익과 발전에 있다는 응답은 16.7에 붏과했다. 한편 중국은 응답자의 59.4%가 기업의 목적을 기업의 이익과 발전에 있다고 대답했다. 기업의 목적이 사회와 국가의 발전에 있다는 응답은 12.4%에 불과했다.”

 

사회주의국가인 중국보다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더 사회주의적인 답변이 나온 이유는 재벌이 성공하기까지의 역사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게 가족의 희생으로 성공한 맏아들, 재벌이 가족의 희생을 나몰라라 한다는 것이다. 재벌의 나몰라라 하는 것은 얼굴에 철판 깔고 연대의무를 무시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재벌의 성공에는 분명 국가차원의 희생이 있었고 그 희생은 재벌의 성공에 대한 투자였다.

 

기업들에 대한 특혜로 인해 다른 기업들은 그와 같은 특혜를 누리지 못했다. 그리고 국민들은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 햇다. 정부가 국내의 경쟁을 억제했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했고 노조활동이 억압되었기 때문에 근로자드은 낮은 임금과 열악한 환경에서 일해야만 했다.”

 

그런데 성공하고 나니 계약서에 쓴 일이 없다고 투자에 대한 배당을 무시한다는 말이다. “맏아들이 대학에 감으로써 다른 가족들이 암묵적인 비용을 지불했다면 의사로서 성공한 맏아들이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보상을 가족에게 해야 함은 당연하다. 비용은 다른 가족들이 지불하고 혜택은 맏아들이 모두 가져가는 것은 타당치 않기 때문이다. 맏아들이 가족들에게 지원을 한다면 이는 사랑하는 가족이 자신보다 못살기 때문에 돕는 연대의무 차원의 지원은 아니다. 비용을 지불한 사람에 대한 보상이며 그렇기 때문에 보상해야 마땅한 의무이다.” 한국의 반기업정서는 자본주의나 시장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재벌의 배은망덕에 대한 반감이란 말이다. “이것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성공한 맏아들의 도덕적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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