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그 삶과 사상 붓다, 그 삶과 사상 1
나카무라 하지메 외 지음, 이미령 옮김 / 무우수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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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받사여 나는 29세에 오로지 을 찾아 출가햇다. 수밧다여, 나는 출가하고서 50여년을 지내왔으며 바른 이치와 법의 영역만을 걸어왔다. 나 이외에는 진리의 길을 걷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하파리닙바나경)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토해낸 붓다의 말이다. 여기에서 붓다는 자신이 불교를 창시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오직 진리를 체득한 한 사람의 수행자로서 생각하고 있다. ‘진리의 길을 걷는 사람바로 이 말 속에 붓다의 일생이 집약되어 있다. 붓다의 말을 토해 우리는 붓다가 평생 무엇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살아왔는지 알 수있다 법의 길을 걸었다는 것. 진실의 길을 걸었다는 것. 바로 그 걷는다고 하는 실천을 설했다. 붓다는 언제나 실천을 중시했다. 동시대 다른 사상가들은 논쟁으로 세월을 보냈으나 붓다는 그런 희론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앗다.”

 

크샤트리야 출신인 붓다는 자신을 바라문으로 이해했다. 그가 생각하는 바라문은 출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길로 결정되는 것이며 그 길을 걷는자는 누구나 바라문이라 불릴 수 있었다.

 

붓다는 결코 바라문교의 전부를 부정하거나 무시하고서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 하지 않았다. ‘우파니샤드가 설하는 업, 윤회, 해탈과 같은 사상의 틀을 봇다는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 ‘참다운 바라문이란 무엇인가를 설한 내용만을 놓고 보면 붓다야말로 참다운 바라문교의 포교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붓다는 29세에 깨달았다. 그러나 진리의 길은 깨달음이란 한번의 사건으로 끝이나는 그런 길이 아니었다. 깨달음 후에도 번뇌는 사라지지 않는다. 경전에 나오는 악마는 붓다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번뇌를 상징한다. “본래 붓다는 어린 시절부터 혼자서 고요히 안으로 안으로 사색하기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붓다는 결코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오히려 유연하고 기품있고 연약했다고 전한다. 붓다는 일생동안 내면적인 성찰을 한 사람이엇는데 그런 성품은 어릴때부터 지녀왔던 것 같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고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나서서 즐기는 그ㄹㄴ 유형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번뇌는 자연스럽고 깨달음 이전이라면 그런 악마가 나타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악마는 깨달음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깨달음을 이룬 뒤에까지도 악마가 자주 나타났다면 깨달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붓다는 그런 악마를 정화해 가면서 일생을 걸어간 자이다. 진리의 길을 걷는 일은 말하자면 번뇌와 미혹과의 긴장관계에 놓이는 일이라 할 수있다. 일단 개달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말이 아니다. 붓다란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라는 의미이다. 그런 사람을 계속하여 깨달아 가게 하는 것, 계속 붓다이게 하는 것은 바로 청정행의 실천이었다. 훗날 이런 경지를 수행과 증득(깨달음)은 한 몸이라는 의미에서 수증불이라고 불렀다.”

 

붓다가 출가한 이유는 생노병사를 넘어선 불사의 길을 얻기 위해서 엿다고 한다. 그러면 붓다는 그 길을 얻었는가? “깨달음의 순간 붓다의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은 생존욕의 중심이 완전히 부수어진 것이다. 자기의 중심을 쳐부순다면 그때까지 고뇌하던 자기는 소멸한다. 자기가 소멸하면 세계는 허구로 이루어졌던 것이므로 괴멸해버린다. 그러면 오직 있는 그대로의 세계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있다든가 없다라고 분별한 세계가 없기 때문에 자신과 세계는 시원하게 통하게 된다. ‘는 무한한 존재가 된다. ‘내가 있다거만한 마음을 부순다면 거짓으로 세워진 세계도 무너져 다르마의 세계(法界) 한 가운데 홀로 우뚝 존재하게 된다.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이러한 나는 다르마의 나이다. 다르마의 세계 즉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서는 자기는 한정되지 않은 존재 그 차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태어남도 없다. 태어남이 없기 때문에 늙고 죽음도 없다. 유체나 마음을 나의 것이라 생각하여 집착하면 늙음이 실체화되고 죽음이 존재하게 된다. 나가 없어지고 나의 것이라는 생각도 없어지면 내가 없기 때문에 늙거나 죽는 일은 없다. 이것이 붓다가 깨달은 불사의 법칙이다. 훗날에는 이것을 不生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불사의 길이라 햇다. 언뜻 말로는 그럴듯한데 와닿지는 않는 괘변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붓다가 깨달은 직후 사람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말하기 주저한 이유이다. 붓다가 깨달은 것은 무아이다. 무아는 말로 보여줄 수 없다. 스스로,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다. 그것을 볼 수 있게 개발된 방법이 요가였다.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은 이미 그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요가는 우리의 세계관을 왜곡하고 우리의 영적 진보를 가로막는 아집을 체계적으로 벗겨내는 것이다.” 건강체조와 별다를 것이 없는 우리가 아는 요가와 달리 원래의 요가 수행자들은 더 좋은 기분을 얻거나 더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이 길을 갔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정상적인 상태를 없애고 싶어했으며 세속적 자아를 지워버리려 했다. 고타마와 마찬가지로 갠지스 평원의 많은 수도자들 역시 논리적이고 추론적인 방법으로 담마를 명상해서는 해방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가 훈련은 깨달음의 무의식적 장애물들을 부수고 인간의 인격을 형성하는 조건들을 없애기 위해 고안되었다. 이 에덴의 평화, 이 샬롬, 이 닙바나를 머리로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물론 붓다는 요기이기를 포기했다. 그가 요가로 얻은 경지는, “그가 얻은 의식의 고양상태는 닙바나일 수가없었다. 이 황홀경에서 빠져나오면 여전히 정열과 욕망과 갈망에 시달렸기 때문이다여전히 세속적 자아는 거기 잇엇다. “닙바나는 일시적인 것일 수 없었다.” (카렌 암스트롱)

 

붓다는 고행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고행의 자기중심주의에 대한 대담한 공격 뒤에 얻은 것은 튀어나온 갈비뼈와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약해진 몸이었다. 그럼에도 인간의 한계로부터 나 자신을 끄집어내는 대신, 스스로 더 큰 괴로움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카렌 암스트롱) “붓다는 이렇게 고행을 실천해도 이 길이 열반을 향한 길이 될 수 없을 깨달았다. 몸은 깨달음의 토대이기 때문에 몸을 괴롭히는 고행으로는 평온한 경지인 열반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고타마에게는 이런 방법들이 모두 소용없었다. 그의 세속적 자아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욕망에 시달렸으며 여전히 의식의 싸움들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우선 명상의 전 단계로 깨어 있는 마음(사티)’이라 부르는 훈련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매순간 자신의 행동을 면밀하게 살폈다. 그는 의식의 파동과 더불어 감정과 감각의 들고남에 주목햇다. 고타마는 깨어 있는 마음을 훈련하는 과정에서 괴로움과 그것을 일으키는 욕망이 어디에나 있다는 사실을 이전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의식하게 되엇다. 그의 의식에 몰려드는 그 모든 사고와 갈망은 아주 짧은 시간만 지속되었다. 모든 것이 일시적이었다(아닉카), 갈망이 아무리 강해도 그것은 곧 사라지고 완전히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다. 어떤 것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사람의 이런 덧없음이 괴로움(둑카)의 주된 원인의 하나였다우리는 늘 욕망의 대상을 쫓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결국 그것 때문에 불행질 것임을 알고 잇다.” (카렌 암스트롱) “어떤 사람도 괴로움과 무관할 수는 없다. 즉 괴로움이란 본래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한결같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붓다는 그 힘이 이성이나 지성과 같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치는 거무칙칙한 욕망이라 보았다.마치 오염된 강가에 쌓인 폐수 찌꺼기와도 같이 얼마나 심하게 오염되었고 끈적이며 서로 엉켜있는지 붓다는 이것을 욕망의 더러운 늪이라 표현했다. 붓다는 이것을 無明이라 불렀다. 무명은 내면의 깊은 사유와 선정에 의해서 파악된 인간존재의 근본을 표현한 말이다.” “이런 마음 상태들은 서툴다’. 우리를 이기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카렌 암스트롱)

 

고타마는 일반적인 추론적 방법으로 이런 진리들을 사유한 것이 아니다. 그는 요가의 기술을 통해 그런 진리들에 접근했으며 그 결과 이 진리들은 일반적인 추론을 통해 얻은 어떤 결론보다 더 생생하고 직접적이었다. 훗날 고타마는 자신이 창안한 새로운 요가 방법을 통해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 즉 갈망이나 욕심이나 아집에 지배되지 않는 새로운 인간이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고타마가 보디나무 아래에서 닙바나를 성취했던 순간, ‘나는 해방되었다!’가 아니라 그것이 해방되었다!’고 외쳣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카렌 암스트롱)

 

명상은 깨달음에 불가결했다. 수행자가 자기 자신 속으로 깊이 가라앉아 자신의 마음과 몸을 붓다의 요가적 현미경 밑에 갖다놓지 않으면 담마를 현실로 만들거나 직접이해할 수 없었다. 수행ㅈ는 명상을 통해 담마를 실현할 수 잇었다. 빅쿠들은 요가를 통하여 그 교리가 표현하려 했던 진리들과 일체가 될 수 있었다.”

 

그가 말한 새로운 인간은 무아의 인간이다. 그러나 무아라고 해서 자기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윤리적 행위의 주체로서 나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다.” 유가의 말로 하자면 붓다가 말하는 진리의 길은 爲己之學, 나를 위하는 길이다.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원수처럼 행동한다.’ (상윳타 니카야)

 

크든 작든 간에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한답시고

자기의 참다운 이익을 소홀히 하지 마라.

자기의 참다운 이익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으면

최선의 노력으로 그것을 성취하라.’ (담마파다 166)

 

자기에게나 남에게 이롭지 않은

악한 일은 하기 쉽다

자기도 위하고 남도 위하는 착한 일은 실로 하기 어렵다’ (담마파다 163)

 

자기를 보호하는 사람은 다른 자기까지도 보호한다. 그런 까닭에 자기를 보호하라. 그러면 그는 언제나 손해를 입지 않을 것이요 그가 바로 현자이다.’ (앙굿타라 니카야)

 

자기에 대한 이런 설법만을 듣고 있자면 이런 가르침이 도저히 무아를 설한 사람의 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실은 이것이 무아설의 진정한 뜻이요 내용이다. 즉 아집의 중심을 부수고 계속 과감히 나아간다면 당연히 그 사람의 정신은 크게 변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이것은 나다, 저것은 나다라고 생각해왔던 것이 거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리릉ㄹ 알게 된다. 인간은 분별심이 있기 때문에 어찌되었든 거짓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살며 그 세계가 진짜로 존재하는 세계라 착각한다. 배가 고플 때는 돌맹이도 먹을 것으로 보이는 이치이다. 그러다 차츰 사물이 올바르게 보여지면 다른 사람의 기분을 알게 되고 자비심이 깊어진다. 아집이 무어지면 바깥의 사물이나 타인과 소통하게 되고 자연히 세계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기적인 자기를 꺾으면 자기의 독자성이 없어질까 걱정하는 사람도 잇을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이다. ‘이기라는 이름에는 본래 독자성(identity)의 색깔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습관만이 있을 뿐이다.”

 

무아란 꼭 깨달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우리가 가끔씩 습관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예를 들면 당신이 아주 열심히 서류나 책에 집중해서 일을 하고 잇다 하자. 당신은 지금 완전히 삼매에 들어 있다. 들어 있다. 거기에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조차 없다. 서류도 책도 없다. 오직 일이 있을 뿐이다. 시간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 주변 세상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이런 삼매의 상태, 당신이 일 그자체가 되어버린 상태를 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언제나 무의식 중에라도 내가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내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또 이 심신을 있다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걸핏하면 죽음을 없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있다는 생각이 잇는 한 죽음에 대한 생각은 소멸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죽음을 극복하기란 불가능해진다. 공의 경지에 머무는 일은 내가 있다는 생각의 소멸을 의미한다. 붓다는 결코 어려운 것을 가르치려하지 않았다. 정작 어려운 것은 계속 힘써 노력하는 일이다

 

붓다는 어디까지나 현세에서 당하는 괴로움을 벗어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그러므로 윤회의 주체는 무엇일까, 자기의 본성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등의 실체를 제시하는 형이상학적 사색에는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붓다의 법을 받아들인다면 윤회전생을 믿을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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