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칼 - 100년의 잔혹시대를 끝낸 도쿠가와 이에야스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박선영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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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 저자가 내리는 판결은 간단하다: 재미없는 바른 생활 사나이.

 

사후 장례식이 치러지는 과정을 보면 육친이나 측근 외에 과연 그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긴 사람이 있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그는 정말 대중적인 인기가 없는 인물이엇다. 히데요시처럼 죽은 뒤에도 다이묘는 물론 서민들에게도 인기가 지속되는 현상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이에야스라는 인간을 고찰할 때 정말 흥미로운 문제다. 사람들은 분명히 그를 신뢰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나 히데요시처럼 이치에 어긋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 신뢰받는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 신뢰는 컴퓨터에 대한 신뢰와 마찬가지였다. 요즘 말로 하자면 그는 로봇 같이 완벽한사람으로 보였던 것같다. 예를 들어 히데요시의 헤픈 눈물을 보아 온 사람들은 인간같지 않은 이에야스의 눈물을 볼 수가 없었다.

 

죽음의 병상에 누웠을 때 아들 다테마루의 어머니가 그 죄를 용서해달고 애원하자이에야스는 눈물을 비췄을뿐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아들을 만나겠다고 하지 않았다. “정말 눈물을 닦을 정도로 울었던 적은 있었을까? 아마도 노신인 도리이 모토타다와 헤어질 때뿐이었으리라. 이에야스는 정말 냉혈인간으로 느껴지는 면이 있다. 따라서 사사로이 정에 빠지는일이 없었다. 그의 냉철함이 무엇보다 확실히 드러나는 부분은 여성과의 관계다. 이에야스가 사랑했다고 할만한 여인은 없었다. 여자 때문에 정치를 그르치는 일은 없었지만 남성으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그렇다고 이에야스가 아스퍼거 증후군이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사람의 정을 느끼고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자식에게 실망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도 사람이니 때때로 감정이 격해지기도 했분노를 폭발시키는 일도 있어서 사실은 다혈질이 아니었을까생각되지만 강한 의지력으로 자신을 통제했다.권력을 쥔 이후에도 누부나가나 히데요시처럼 감정적이거나 잔혹한 행동은 하지 않앗다. 권력을 쥐면 3년만에 멍청이가 된다고 하고 또 많은 권력자들은 실제로 그런 모습을 보이지만 이에야스는 결코 냉정을 잃는 일이 없었다.”

 

그는 더불어 즐길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엇에도 빠지는 법이 없었다. 폭음, 폭식은 물론 여자에게도 빠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금욕주의자도 아니니 한마디로 절제가라 할 수 있다. ‘술 때문에란 변명은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식사도 마찬가지로 지나치지 않게 먹는 것을 최상으로 여겼고 과식은 의지가 약하기 때문으로 보앗다. 만사는 적당한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절연은 금연보다 어렵다고 하듯이 만사를 적당하게 절제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에야스는 평범하지만 어려운 이 적당히를 평생 지속했다.

 

아무리 봐도 사람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신뢰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에야스가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세운 것은 그의 모토가 주의와 경계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에야스를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말로 표현하며 이에야스는 어린 시절 인질 생활로 고난을 겪었고 그 경험이 훗날 그의 성격이나 삶에 큰 영향을 끼졌기 때문이라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저자는 묻는다.

 

실제 이에야스의 일생은 당시 다이묘의 삶으로서는 순탄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선 인질이라는 것도 당시의 인질은 현대의 인질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생명의 안전을 보장하고 우대해야 하는 동맹관계의 보증인인 경우도 있다. 그래서 당시에는 인질을 증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따라서 그 시대의 일반적인 정황에서는 인질이 되어 편안한 생활을 했다고 표현할 수는 있어도 적어도 고생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에야스를 인질로 받은 요시모토는 인질보다는 피후견인으로 돌봐주었고 이에야스는 유년 시절동안 미카와를 보존하고 동시에 자신을 보호해주고 양육해준 요시모토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고 인질로 있던 시절의 이에야스는 후대가 상상하는 만큼 불행하지 않았다.”

 

주의와 경계의 진짜 이유는 하극상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야스의 조부와 아버지는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당시에 그런 일은 흔했다. 그런 세상에서 믿을 것은 실력뿐이었고 그것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력 즉 무력이었다.

 

이에야스가 유년기를 보낸 이마가와 가문은 센코쿠 시대에는 별천지였다. “전통적인 형식과 질서가 남아 있었다. 그곳에는 백성들이 귀인으로 받드는 명문가의 슈고가 있었고 교토 조정의 귀족인 구게(公家)와 혼인관계를 맺어 활발하게 교토 문화를 수입해으며 많은 구게들도 직접 이 지역으로 이주한 결과 이마가와 가문 자체가 상당히 귀족화되었다. 노부나가가 무시한 오가사와라류의 제례집이 이곳에서는 모든 질서의 기본이었고 귀족들이 즐겨 읊던 고전 시가인 와카나 상류층의 공놀이인 게마리(蹴鞠)도 유행했다. 귀족적인 문화에 휩쓸려 기개를 잃은 모습도 보였지만 동시에 하극상과 같은 살벌한 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에야스에게선 그 귀족문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이마가와 가문을 반면교사로 생각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미카와의 영주라는 자각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방의 소영주가 통치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능력은 무력이었다. 개인적인 무술과 무공이 없다면 백성들을 다스릴 수도 지배권을 확립할 수도 없었다. 센고쿠 시대에는 당연히 개인적인 무공보다 전투 지휘 능려과 뛰어난 용병술이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전장에서 부하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려면 지휘관 자신의 개인적인 무력도 필요했다.” 지방의 소영주에 불과했던 이에야스의 출발점은 소부대의 최전선 지휘관이었다.”

 

개인적으로 뛰어난 무인이기도 했고 지휘관이기도 했던 이에야스는 스스로 훈련을 통해 무공을 닦았으며 무술훈련은 일종의 취미와 같았다.” 그러나 이마가와 가문에서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한시나 와카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렌가나 다도에도 취미가 없었으며 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 마디로 이런 교양 계통에는 모두 서툴렀다.” 물론 이에야스가 학문을 즐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게 학문이란 당시 통용되던 한시에 능하고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학문은 정치학이고 군사학이었다.

 

영주로서 가장 필요한 능력은 휘하 토호들의 영지를 보장해주는 것(소령 안도)이었고 센코쿠 시대에 그 능력은 무력이었다. “따라서 센고쿠 시대의 장수에게 무력은 절대적이었다. 물론 무력과 동시에 모략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생애를 살펴보면 모토나리처럼 하나의 모략에 이어 또 다른 모략을 세우거나 하지는 않았다. 늘 정정당당하게 대진해서 결전을 벌였다. 그는 그런 전투를 통해 승리를 얻지 못한다면 심복도 얻을 수 없다고 믿었고 그 신념은 틀리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아케치 미쓰히데가 잘못 생각한 점이다.그는 혼노 사에서 노부나가를 쓰러뜨렸지만 아무도 그 휘하로 달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를 쓰러뜨리면 주도권을 쥘 수 있으므로 오히려 모두가 노리는 먹잇감이 되었다. 미쓰히데가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것은 대규모 암살사건이었지 정정당당한 전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의 승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에야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이에야스는 너구리 영감이라 통용된다. 이런 이미지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나 오사카 성 함락 후에 생긴 듯하다. 그전까지 이에야스는 의리의 사나이로 통했으며 센코구 무장치고는 분명히 의리파였다. 마음만 먹으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는 히데요시나 히데요리 모두 암살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는 명분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부나가가 쇼군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정치적으로만 대결한 것과 같은 이유엿다.

 

노부나가의 천하포무는 히데요시에게도 이에야스에게도 적용된다. 말하자면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무력의 위압으로 정권 질서를 수립하는 일은 당시로서는 상식 이전에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단지 무력으로 제압하려면 암살과 같은 잔꾀는 소용이 없었고 어디까지나 정정당당히 전투에서 승리하는 과시적 이벤트 효과가 필요했다. 이에야스가 천하라는 것은 스스로가 지닌 운명이 있어 인력이 미치는 곳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단순한 운명론자라는 뜻은 아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전자으이 승패 또한 운명에 따른 ㄴ것, 따라서 천하를 손에 넣으냐 마느냐 또한 운명이라는 의미엿으리라.”

 

그런 이에야스였기에 상대방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면 깨끗하게 복종햇고 일단 따르기로 햇다면 그에 맞게 상대방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그는 이마가와에 복종했으며 오다와의 동맹에서도 그의 지위는 좀더 특별대우를 받는 오다 가문의 무장에 지나지 않았다. 고마키-나가쿠테의 경우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종합적인 전력에서는 자신이 히데요시에게 뒤처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엇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대등하게 강화를 맺었지만 이에야스의 위치는 또다시 도요토미 정권 속에서 조금 특볋란 대우를 받는 일개 부장, 히데요시의 명에 복종하는 일개 제후였다. 그런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그로선 자기보다 약하면서도 자신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 자는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일종의 증오심마저 느꼈던 듯하다. 요도기미와 히데요리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에야스는 상대가 자신보다 강력하다고 판단하는 한 동요하지 않았다. 이에야스가 문제삼는 것은 오로지 무력뿐이엇다.”

 

그러나 그가 그런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생애 대부분을 그다지 권모술수가 필요하지 않은 위치에 있었기때문이며 그의 적성이기도 했다고 저자는 본다. “그의 전투는 늘 평범하고 재미없는 정공법이었다. 그 때문인지 사람들의 인상에 남는 것은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 그리고 또 하나가 미카타가하라의 패전 정도다. 게다가 이런 전투에서 세운 무공의 대부분은 오다 노부나가의 그늘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았다.”

 

센고쿠 영주로서 이에야스는 특별하게 순탄했다. 그것은 그의 운이기도 했지만 주의와 경계란 그의 태도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센고쿠 시대라 하면 흔히 무법천지를 떠올린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 사건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신겐은 아버지 노부토라를 추방했고 아들 요시노부를 죽였다.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지만 당시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다. 노부나가도 모토나리도 자신의 동생을 죽였고 히데요시도 조카를 죽였다. 이에야스도 자신의 자식인 노부야스와 아내, 손녀 사위인 히데요리까지 죽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권력층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사건이었고 일반인들까지 같은 상황이었던 것은 아니다. 백성들이 이런 짓을 했을 때는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당연한 일이다. 민중들까지 무법천지에 빠진다면 가장 곤란한 것은 센고쿠다이묘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영내의 투쟁과 혼란은 호시탐탐 국경을 넘보는 이웃 지역에게 틈만 보일 뿐이다. 지배자들은 무력으로 대내외적으로 투쟁하면서도 영내에서는 가능한한 평온한 법치체제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이에야스가 인질 생활을 한 이마가와 가문이 좋은 예이다. “이마가와 가문도 당대에는 혁신적인 통치자였다.” 이에야스가 천하를 통일한 후 보여준 법치주의의 신념은 이마가와 가문에서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이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로 있던 시절의 이에야스에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인지도 모른다.”

 

법치주의는 단지 이마가와 가문만의 것은 아니었다. 법치주의는 영지경영의 한 방법일 뿐이었다. 영지가 안정되어야 경제력이 생기고 무력을 유지하는 것은 경제력이다. 따라서 생산력 증강은 당시 센고쿠 무장들의 지상과제였으며 유능한 다이묘들은 모두 영내 개발에 힘을 쏟았다. 이런 점에서 센고쿠 시대는 경제성장과 기술개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제는 영내의 치안 유지엿고 이것이 방위의 기본이었다.”

 

만일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이에야스 세명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면 이에야스는 미적 감각이 가장 떨어지고 번득이는 재능도 재치도 느낄 수 없는 인물일 것이다. 노부나가도 히데요시도 이에야스를 건실하고 의리 바르며 충실한 2인자로 취급했다. 만일 이에야스가 히데요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면 역사가들은 히데요시가 만년에 가장 실력있는 신하를 잃어 큰타격을 입었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당시 사람들에게 다양한 측면에서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그렇다면 이런 재능을 싹틔우고 자라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가?

 

우선 이에야스는 가이도 제일의 활잡이로 전투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뛰어난 지휘자였다. 이에야스가 자신의 무용을 자랑하지는 않았지만 남들이 스스로 이에야스의 무공과 지휘 능력에 고개를 숙였다. 다음은 통치력과 부하들을 이끄는 통솔력이다. 이는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간토 영지 이동과 또 새로운 봉지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된 지배권 확립과정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세번째가 그의 재정능력이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이에야스 세사람 중에서 이에야스는 화려한 것을 싫어했으며 가장 검소했다. 구두쇠나 다름없었지만 세사람 중에서 재정능력이 가장 뛰어난 자는 이에야스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능력을 키운 바탕이 바로 그의 학문이었다.”

 

그리고 이에야스의 능력에는 정략도 포함된다. 무장으로서 이에야스는 정공법을 선호했다. 그것은 모략으로 이기는 것은 이긴 것이 아니라는 그의 판단이기도 했고 그의 위치가 그리 모략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당대 센고쿠다이묘들처럼 모략을 쓸 줄 몰랐던 것이 아니다. 단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뿐이다. 그러나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다. 그가 전쟁을 수단으로 선택할 수 있는 정치가가 되었을 때 그에겐 다른 능력이 있어야 했다. 무장의 전쟁과 정치가의 전쟁은 다르며 이에야스가 무장으로서 싸웠던 전투와 그가 정치가로서 싸웠던 전투는 다르다. 이에야스 정권의 미래가 걸려있었던 세키가하라가 “‘작전의 전투가 아니라 정략의 전투’”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눈앞에서 승부가 결정되는 전투와 정치는 다르다. 정치는 정책이란 결과를 낳는 일이지만 정책이란 결과를 얻기 위해선 권력을 얻고 유지해야 한다.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일은 소모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런 소모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정책을 실현할 수 없다. 그 소모적인 일을 정략이라 한다.

 

모스카가 말하듯 권력을 지향하지 않으면 권력을 얻거나 행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권력욕이 없는 자는 통치력이 없다는. 권력욕이 없는 자를 통치자로 삼고 싶다. 민중의 꿈은 말 그대로 꿈이다.” 그리고 (다른 리뷰에서 다루었듯이) 그것이 유교의 성왕론이 허구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모스카는 능력있는 정치가란 정책적 능력과 정략적 능력을 함께 갖춘 사람이라 했다. 또한 유감스럽게도 그런 인간은 극히 드물며 만일 그런 정치가를 가진 국민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라 햇다. 그의 기준으로 보면 이에야스는 정책능력과 정략능력을 함께 갖춘 희귀한 정치가였다. 이에야스가 정략가로서 유능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점만 지나치게 부각해서 그를 너구리 영감으로 평가한다면 정책가로서 그가 보여준 탁월한 재능을 간과할 수 있다. 그저 모략만 뛰어난 너구리 영감이 267년이나 이어지는 도쿠가와 막부의 평화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겠는가. 이에야스는 아시카가 말기부터 오다와 도요토미 시대를 거치면서 천하의 백성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잘 알고 있었다. 또 그 바람으로 정책적으로 실현하는 수단과 능력을 지녔다. 사람들의 바람은 한 마디로 전쟁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평화로운 법치체제 아래서 생존할 권리를 보장해달라였다. 그리고 이에야스가 실현한 사회는 결국 모든 사람들이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고 법치제도 아래에서 사적인 권력 생사를 제한하며 보수적인 질서가 형성된 사회였다.”

 

물론 천하의 바람을 실현하는 것은 그 자신과 가문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야스토키나 이에야스나 모두 근본을 따지자면 모두 현지에서 세력을 키운 관리이거나 혹은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 하극상을 통해 천하를 손에 넣은 자들이다. 이 하극상의 권력자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은 후계자가 나타나 자신이 그랫듯이 하극상을 일으켜 자신을 쓰러트리는 일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기 대에서 하극상ㅇ르 끝내고 이후로는 자신의 통치 아래 질서있고 영속적인 법치사회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노부나가의 노선을 따를 수 없었다.

 

노부나가는 天下爲公이란 비전을 위해 살았던 이상주의자였다. 자신의 가문을 위해서도 아니엇고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그린 이상에 따라 세상을 디자인하기 위해 살았다. 그가 그렸던 천하에는 온세상을 불태우는 다이묘들의 자리는 없었다. 그렇기에 얼마든지 쇼군이 될 수 있었으면서 쇼군이 되지 않았다. “’’시바 료타료는 노부나가가 봉건제를 배제하고 중앙집권제를 수립했을 것이라 예측했다. 사실 그런 시각에서 노부나가의 행동을 살피면 히데요시와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노부나가는 다이묘 절멸 작전을 시행해 센코구다이묘들의 가문을 잇달아 멸망시켰다. 확실이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는 일단 부하에게 하사하지만 대대로 소유권을 보장하지 않으며 상속권도 인정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명령을 내려 빼앗고 다른 영지를 준다. 그 지위를 유지한다면 다이묘지만 파면된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히데요시는 내심 이런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왜냐하면 다이묘들이 항거한다면 스스로가 곤란한 입장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반대정책을 폈다. ‘본령 안도를 미끼로 상대방의 전의를 꺽고 항복시켰으며 그 대가로 자신의 부하로 이용했다. 히데요시의 방식은 학실히 능률적이며 센고쿠의 통합이라는 점에서보면 가장 희생도 적고 손쉽다.”

 

이에야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에야스는 당시 다이묘, 특히 히데요시의 은혜를 입은 장수들로 불리는 신흥 중소제후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한마디로 히데요시 님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출세를 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었다. 동시에 오랜 전란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제는 오로지 손에 넣은 것을 보존하고 유지하면서 누군가가 일가의 안전을 보장해주기만을 바랐다.” 히데요시 사후 2인자인 이에야스에게 자연스럽게 힘이 모아진 이유이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시스템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고 언제 자신의 위치가 뒤집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사람을 끄는 강한 매력이 있었던 히데요시와 달리 이에야스는 인기가 없었다. “이에야스의 명성은 천하를 제압했지만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그가 두려워 굴복했을 ㅃ누 좋아서 따른 것은 아니었다. 이에야스는 특히 인간미나 유머 감각, 장난기, 그리고 상대에 대한 서비스 정신이 부족햇다. 히데요시라면 현대 서비스 업계에서도 최고경영자로 당당히 성공했을 인물이지만 이에야스라면 불가능햇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평생 놀이도 모르고 장난기도 없었다. 반면 히데요시는 늘 유머러스하고 흥겨웠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항상 빈틈없고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인기가 없는게 당연하지만 그 자신도 인기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는 얄미울 정도로 자율적인 인간이었다. 이에야스는 사람들이 신뢰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경우너시하게 되는 타입이었다. 도요토미 가문은 대체적으로 관대했지만 이에야스가 천하를 손에 넣으면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시대가 올거라고 사람들도 예감했다. 물론 센고쿠의 혼란이야 지긋지긋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 맛보았던 자유는 읽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센고쿠다이묘들이 원한 것은 신중하고 온화하고 관용적인지도자, 즉 전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면서도 자신들을 일일이 간섭도 않고 소령 몰수도 않는 지도자 고도의 자치권과 자주성을 인정해주고 자신들이 영지 내에서 왕처럼 ㅅ행세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는 지도자엿다ㅣ. 배부른 소리다.”

 

센고쿠 시대의 자유는 피가 없이는 불가능한 자유였다. “누구나 원한다면 싸워서 이긴다면 그리고 적을 죽여 없앤다면 최고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시대엿으며 어느 사회나 존재하는 계급의 차이가 완전히 무시된 시대였다. 그점 만을 평가한다면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시대였다.”

 

비천한 농민에서 지존까지 올라선 히데요시는 이 혁명의 시대의 총아였다. 히데요시 정권은 센고쿠 시대란 하극상 사회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그 혁명은 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인 자유를 지워버려야만 가능하다. 히데요시의 기적은 사람들에게 자유와 혁명이 공존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환상을 줄 수 없는 이에야스는 항상 비교당해야만 했다. 특별하게 이에야스를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많은 다이묘들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반대쪽에 섰고 서고 나서도 미지근하게 싸운 것은 그런 이유였다. 그러니 이에야스가 자신의 체제가 오래 갈 것이라 생각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붉은 여왕의 체스판서 달리는 것처럼 제자리에 머물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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