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 일리노이 주립대 학장의 아마존 탐험 30년, 양장본
다니엘 에버렛 지음, 윤영삼 옮김 / 꾸리에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내가 피다한 마을에 들어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제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내 삶의 여정에서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하나니므이 복음은 피다한 문화와 전혀 맞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선교사로 아마존의 피다한 사람들을 만났던 저자가 30여년을 그들과 보낸 후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스물여섯 살에 피다한 마을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은 경로혜택을 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젊음을 바친 셈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게 된 이유는 이렇다. “’사람들을 구원하려면 그들의 삶에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인식을 심어줘라.’ 자신의 삶에 무엇인가 심각하게 모자란다는 인식을 하지 않는 한, 신이나 구원과 같은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일 확률은 낮다.” 예를 들어 저자는 선교사들이 하는 방법대로 자신이 왜 예수를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피다한 사람들에게 간증을 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마치고 나자 피다한 사람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황당한 반응이었다. 아니 신경질 나는 반응이었다. 이전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는 하나같이 깊은 감명을 받고는 ! 주여! 하나님 감사합니다!’ 같은 말을 연발했기 때문이다.

왜 웃어?’

네 엄마가 자살햇다고? 우하하! 참 바보같다. 피다한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아.’

그들은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을 했다는 사실이 피다한 사람들에게는 신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전혀 되지 못했다. 아니 이것은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만 낳았다.”

 

피다한 사람들에게는 우울, 스트레스, 만성피로, 심한 불안, 공황발작 등 오늘날 산업화된 사회에서 우리가 겪는 심리적 질환의 기미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우리와 같은 사회적, 경제적 압박이 없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피다한 사람들은 카드결제일에 쫓기거나 자식의 대학입학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말라리아, 바이러스, 세균감염, 리슈마니아 병과 같은 자칫 생명을 잃을 수 있은 질병의 위험이 늘 도사린다. 나에게는 일생에 있어 특별한 경우에만 겪는 그러한 고난을 피다한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겪는다. 아니 그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고난은 내가 아주 특별할 때 겪는 경우보다 훨ㅆ니 나빳다. 이들은 어른 아이 할 것없이 가족이 죽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다. 피다한 사람들이 기대하는 수명은 서양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들은 이러한 차이를 알지 못한다. 피다한 사람들의 인식에 비춰보면 특히 미국인들의 삶의 의지는 욕심에 가깝다. 또한 이들은 가족을 위해 매일 먹을거리를 구해와야 한다. 이들의 장례식에는 이웃은 물론 가족도 모이지 않는다. 엄마가 죽어도 아이가 죽어도 남편이 죽어도 사냥을 하고 낚시를 하고 먹을 거리를 찾아다녀야 한다. 누구도 이 일을 대신해 줄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해서 삶은 관대함을 베풀지 않는다. 그리고 이따금씩 이방인들이 침입하여 이들을 폭력적으로 위협하기도 한다.

 

우리가 산업화된 사회에서 살기 땝문에 심리적 압박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일 뿐이다. 피다한 마을에서 나는 그들보다 훨씬 더 편하게 생활하면서도 여전히 늘 짜증응ㄹ 내고 신경질을 부렸다. 똑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나는 짜증을 냈지만 그들은 언제나 즐겁고 유쾌했다. 이들이 불안이나 걱정을 느낀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니 피다한 말에는 걱정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MIT 뇌인지과학부 연구원들이 피다한 마을을 방문하여 그들을 검사하고 나서 자신들이 지금까지 조사한 사람들 중에서 피다한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로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러한 판단의 바탕이 된 지표는 여러 가지이다. 그 중 하나는 피다한 사람들의 평균적인 웃는 시간을 측정하여 이 수치를 이전에 측정한 다른 집단의 수치와 비교하는 것이다. 연구원들은 앞으로도 피다한 사람들을 이길만한 집단은 나타나지 않을 것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30여년동안 나는 20여개 아마존 원주민을을 찾아다니며 연구해왔는데 피다한 사람들만큼 유쾌하고 명랑한 사람들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애석하게도 다른 원주민들은 대부분 부루퉁하고 수줍어했다. 피다한 사람들과 달리 전통적인 문화의 자율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와 외부세계의 발달한 문명을 누리고 싶어하는 욕구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피다한 사람들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만족을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행복하고 만족을 아는 이유는 그들이 전형적인 수렵채취인들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피다한 사람들은 (스티브 테일러가 말하는) 자아폭발을 겪지 않은 조상이나 수렵채집인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수렵채집인들은 어느 정도의 노동분화를 이루고 정주생활을 했지만 물질적인 재화를 축정하거나 지위와 권력을 얻으려 집착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 내면에 이러한 것들을 얻는 대가로 치러야 할 필요가 있는 근본적인 불행은 없었다는 점을 시사한다(그 대가인 정신적 불화에 대해선 자아폭발리뷰 참조) 바꿔 말하면 그들은 우리만큼 정신적 불화로 고통 받지 않았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그 이후에 등장하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문화의 큰 특징인 죄와 억갑, 그리고 고통의 분위기가 전혀 없는 것같다. 그들에게는 그 대신 명랑하고 즐거운 분위기와 인생에 대한 신성함 그리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분위기가 있어서 그들이 정신적 불화로 고통받았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이러한 태도는 수렵채집인들과 단순원예인들의 종교생활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들과 그 뒤에 나타나는 사람들 간의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그들에게는 종교와 생활이 분리되는 일이 없었으며 신이 실생활과 분리된 동떨진 존재라는 생각은 분명히 없었다. 그들에게는 신이나 영은 어디에나 무엇에나 존재했다. 이는 분명히 이 사감들이 자연을 그토록 깊이 숭배하도록 만든 부분적인 이유였다. 높은 곳에서 세상을 굽어보며 만사를 관할한다는 신들에 대한 관념이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를 가졌을지는 의심스럽다.” (스티브 테일러) 이런 태도는 피다한 사람들의 종교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들은 영을 실제로 본다고 말한다.

 

! 저기 히가가이 신령이야!’

그래 보여 우릴 위협하고 있어.’

모두 와서 봐봐 빨리! 히가가이가 강변에 나타났어!’

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실제로 들리는 소리인지 꿈에서 들은 소리인지 분명치 않았다. 건기가 한창인 8월의 어느 토요일 아침 6 30. 해가 눈부시게 빛났지만 아직 뜨겁지는 않았다. 피다한 사람들의 고함소리, 웅성대는 소리에 잠을 깬 나는 곧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앉았다. 밖을 내다보니 우리 집에서 6미터 정도 떨어진 강둑에 사람들이 모여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우리 집을 등지고 강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저기 안 보여? 구름 위에 사는 히가가이가 저쪽 강가에 서서 우릴 보고 소리치고 있잖아. 정글에 들어가면 우릴 죽이겠다고.’

어디? 난 안 보이는데?’

저기 있잖아!’

꼬호이는 짧게 내뱉고는 건너편 강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 강 뒤에 있는 정글 말이야?’

아니, 강변 모래밭에 잇잖아! 안보여?’

그는 화를 내듯이 버럭 소릴 질렀다. 정글에 들어가면 피다한 사람들 눈에는 보이는 것들이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야생생활이 익숙하지 않은 나는 그들이 보는 것만큼 많은 것을 보지는 못햇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100미터도 되지 않는 강 건너편에 하얗게 펼쳐진 모래밭 위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아무 것도 없다고 확신하는 만큼 피다한 사람들은 거기 무엇인가 있다고 확신했다.”

 

피다한 사람들이 집단착란을 일으켰을리는 없다. 그들은 분명 무엇을 보았지만 저자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뇌의 활용도에 있지 않을가 싶다. ‘긍정의 뇌의 저자가 보여주는 우뇌만의 인식은 우리의 일상적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자아폭발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우뇌의 활용도가 더 높고 긍정의 뇌에서 묘사되는 인식을 하는 것을 보인다. “나무들과 바위들 그리고 산들이 살아 잇게 만드는 것은 영적인 힘이 그것들 내부를 통하여 흐르기 때문이다. 모든 원주민들은 이 영적인 힘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아메리카 호피족은 마사우로 라코타족은 와칸탄카로 포니족은 티라와, 아마존의 우파니아족은 푸파카로 각각 부럴ㅆ다. 폴리네시아에서는 그것을 마나라고 불렀으며 뉴기니 일부 지역엣6j는 이무누라고 불렸다. 이 힘은 세상을 굽어보고 인간이 도움을 구하며 숭배하는 인간적인 존재의 신성함이 아니다. 그것은 인격도 없고 성별도 없다. 그것은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어떤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내재하는 힘이며 지성이다.” 그힘은 실재로 볼 수 있는 것이었고 피다한 사람들이 토요일 아침에 본 것은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신성은 믿음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어이, 다니엘, 예수는 어떻게 생겼어? 우리처럼 피부색이 까매? 아니면 너처럼 하얘?’

음 난 실제로 그를 보지 못햇어. 그는 아주 오래 전에 살았어. 하지만 그가 한 말은 알아.’

그럼 다니엘, 네가 그 사람을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데 그가 한 말은 어떻게 알아?’

네가 예수를 실제로 보지 못했다면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어떠한 이야기를 해도 피다한 사람드르이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모든 게 끝이다. 피다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접 본 것만 믿는다는 사실을 그때는 아직 잘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믿기도 했지만 그것도 말하는 사람이 직접 본 경우에만 그러했다.”

 

저자는 이것이 피다한 문화의 대원칙이라 보며 경험의 직접성원칙이라 부른다.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면 어떠한 것도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직접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남아잇지 않은, 아주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에 기초하여 선교해야 하는 기독교의 교리가 이들에게 쉽게 스며들지 않는 까닭이다. 이것이 바로 그토록 오랜 세월 선교사들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저항할 수 있었던 힘이다. 증거를 요구하는 이들의 문화에서는 그 흔한 창조신화조차 설 자리가 없지 않았던가.”

 

경험의 직접성 원칙은 자아폭발을 겪지 않은 사람들의 문화에 특징적인 시간의식의 한 형태라 보여진다. 예를 들어 애버리진의 수백가지 언어들 가운데 시간에 해당하는 단어는 없으며 애버리진에게는 시간이라는 개념도 없다. 그리고 애번스프리처드는 누에르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누에르인들의 시간에 대한 관점은 매우 짧은 기간으로 한정된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은 대부분의 원시사회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유럽적인 의미에서의 시간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그들에게는 낭비되거나 절약되거나 추상적인 것으로써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다.’ 우리가 미래와 과거에 집착하여 현재로부터 멀어지는 반면, 그들에게는 현재가 유일한 사실이다. 홀이 설명한 대로 나바호족에게는 미래는 비사실적인 동시에 불확실하였으며 그들은 미래의보상에는 관심이 없었고 동기부여를 받지도 않았다. 아프리카의 하즈다족과 음부티족은 절대로 과거에 대하여 말하지 않으며 역사라는 개념조차 없다.” (스티브 테일러)

 

스티브 테일러와 켄 윌버는 선형 시간 개념의 발달을 타락한자아의식의 등장과 연계시켰다. 그는 그것을 자아의식이 가져온 죽음에 대한 더 크나큰 인식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당신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은 잠재적인 부재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기로 죽음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되는 것은 죽음의 공포도 더 켜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윌버에 따르면 최초의 타락한 정신은 그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며 정신이 육체를 벗어던진 다음에는 영원한 선형의 시간이 정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스스로 설득함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처리하엿다. 그러므로 선형 시간 인식의 발달은 타락한 내세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고 믿었으며 이를 위해 시간을 선형으로 상상해야만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죽음에 대한 인지가 더욱 심화되면서 자아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 자신을 선형으로 꾸준히 진행되는 시간의 세상에 풀어놓음으로써 자아의 본질적으로 채워지지 않고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은 영원히 앞으로 나아갈 여지가 생겼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중요한 내용은 과거와 미래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현재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에 있는 동안에만 미래와 과거에 대한 생각을 갖는다. 오ㅜ리는 현재 이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기억하며 현재 이후에는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를 기대한다. 선형 시간은 관면에 의하여 생각함에 의해 창조된다.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은 선형 시간 감각이 없다. 단순히 그들의 마음이 우리 마음처럼 관념저그올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들이 마음이 과거를 기억해내고 미래를 기획하느라 끊임없이 재잘거리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와 과거는 그들에게는 별로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선형 시간 인식은 고도의 추상화 또는 쉬지 않느 생각의 수다가 우리 정신의 한 특징이 되었을 때 발달하였다.” (스티브 테일러)

 

피다한 사람들에게도 선형 시간 의식이 없다. 그들에겐 오로지 현재만이 있다. “밭을 일구고 마니옥을 심는 것은 사실 피다한 사람들의 전통이 아니다. 내가 오기 몇 년전 스티브 쉘던이 힘겹게 이들에게 가르쳐주고 간 것이다. 밭을 갈기 위해서는 괭이 같은 도구를 외부에서 들여와야만 한다. 그런 도구를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렇게 중요한 도구들을 피다한 사람들은 전혀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새로 거래하여 얻은 도구를 아무데나 버려두기도 하고 때로는 강물에 던져버리기도 한다. 심지어는 브라질 상인들이 가지고 온 먹을거리와 밭가는 도구를 바꿔버리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피다한 사람들의 문화적 패턴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음식을 보존하지 않는다. 도구를 소홀히 여긴다. 한번 쓰고 버릴 바구니만 만든다. 이것은 바로 이들의 문화에 미래에 대한 관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 게으름과는 다르다. 피다한 사람들은 아주 부지런히 일하기 때문이다.”

 

추상화란, 구체적인 것에서 구체성이 없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을 만드는 추상화는 무한을 전제한다. 지금 여기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적용될 수 있다는 전제가 없으면 개념이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란 특수함을 넘어 언제 어디서나란 보편성의 극한인 무한은 선형적 시간을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시간축이 과거와 미래로 제한없이 뻗어나가고 공간축 역시 그러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전에는 무한이란 성립하지 않는다. 무한에 의해 가능한 사고방식의 대표적인 예는 수학이다.

 

피다한 말에는 수를 세는 말이 전혀 없다. 처음에는 나는 피다한 말에 하나, 둘 많다 정도는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세가지 숫자만 있는 문명은 지구상에 많다. 그러나 피다한 말은 실제로 숫자가 없다. 모두, 각각, 온통과 같은 수량형용사도 없다그것은 단순히 그런 단어가 없다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겐 숫자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손가락은 물론 어떠한 신체부위도 물건의 수를 세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숫자란 개념이 없으니 이들도 불편을 겪었다. “이들은 브라질 상인들이 가지고 다니는 돈을 이해할 줄 몰라 불리한 거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일을 방지하고 또 항의하기 위해서 숫자와 셈을 배우고 싶어했다. 뽀르뚜갈 말로 10까지 세는 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자신들이 먼저 원해서 열정적으로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스스로 숫자를 배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수업은 끝이 났다. 8개월동안 어느 한 사람도 10까지 세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3+1은 물론 1+1을 배운 사람도 전무하다. 1+1의 답을 2라고 어쩌다 한번 대답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관되게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자는 그 이유를 경험의 직접성 원칙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들에겐 색깔을 나타내는 어휘도 없기 때문이다. “숫자란 구체적인 대상에서 직접적으로 느씰 수 잇는 속성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이며 산술적인 속성을 공유하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색깔도 마찬가지이다. 색깔 또한 가시광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위적으로 경계를 나누고 이를 보편화하는 작업을 통해 성립한다.”

 

숫자가 없고 색깔을 없는 이유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피다한 사람들은 오래된 과거나 아주 먼 미래, 또는 허구적 내용과 같이 경험하지 못한 사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숫자를 세고 계산을 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경험을 넘어서 보편적으로 개념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경험을 넘어서는 추상화 작업은 경험의 직접성 원칙을 위반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또한 경험의 직접성이라는 원칙으로 설명할 수 잇는 또 다른 사실을 찾아냈다. 피다한 사람들은 음식을 저장하지 않으며 오늘 하루 이상의 시간에 대해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또한 먼 미래나 먼 과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지금’, 그러니까 직접적인 경험에 초점을 만춘 결과로 여겨졌다. 피다한 사람들에게 역사, 창조신화, 민담 같은 것들이 없는 것도 경험의 직접성 원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고도의 추상화, 시간의 발명은 우리에게 엄청난 힘을 주었다. 과거에서 배우고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을 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간다는 생각이 우리를 압박한다는 것, 그리고 현재가 쏜살같이 흘러가며 쇠퇴와 죽음은 필연적이라는 우울한 인식. 살아있다는 것은 순간이라는 인식은 타락 이후 시대를 특징짓는 염세적이고 비관주의적 분위기의 한 측면이다. 붓다는 이것이 인간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찰 수 밖에 없는 이유라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우리가 삶의 현재 시제의 사실로부터 소외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너무 많은 시간을 미래와 과거에 대한 6생각에 몰두하며 보낸다는 사실은 우리가 충분히 현재를 살지 않는다는 rejt을 의미한다. 우리가 특정한 순간에 우리가 처한 상황이나 그 상황에서 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기보다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 하던 일들 또는 처했던 상황 또는 미래에 하려고 계획하는 일들에 대하여 생각한다. 이것은 약간 기이하다. 현재는 우리가 가진 유일한 사실이다. 우리는 오직 현재에만 살 수 있다. 우리가 현재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것은 상당부분 우리가 실제로는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티브 테일러)

 

저자의 피다한 사람들에 대한 첫인상은 그들이 행복해 보였다는 것이다. “얼굴마다 웃음이 가득했다. 낯선 이방인을 마주할 때 보통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과는 달리 어느 한사람도 지르퉁하거나 움츠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머리 위로 날아가는 새들, 사냥길, 마을의 오두막, 강아지 등 내가 흥미를 가질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가리키면서 신이 나게 설명했다.” 경험의 직접성이란 원칙은 그들이 현재로부터 소외될 수 없게 만들었고 실제로 살아 있다고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경험의 직접성이란 원칙은 그들 언어에도 영향을 주었다. “피다한 말의 문법은 인간 언어의 본질, 기원, 활용에 관한 현대 언어학의 여러 견해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특정한 문법원칙을 알고 있다는 촘스키의 가설과 문법 구성요소들이 어떻게 함께 작동하고 조율되는지를 설명하는 그의 이론으로는 결코 피다한 말의 문법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촘스키의 이론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유전자 수준에서 결정된 언어본능이 사람에게는 있고 그 본능은 문법수준에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경험의 직접성이란 문화적 원칙이 문법까지 결정하는 피다한 말의 사례는 언어본능이란 가설을 무너트린다고 말한다.

 

저자가 드는 가장 대표적인 예는 순환(recursion)이다. “언어학자들은 단문보다는 하나의 구나 절 속에 다른 구나 절이 들어가는 복문에서 문법적 특성이 자세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복문은 어떤 언어에서나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피다한 말에는 복문이 없다.

 

어이 빠이타, 못 몇 개만 가져와. 다니엘이 못을 샀어, 그건 같아이말의 의미는 다니엘이 사온 못을 가져와이다. 못을 수식하는 다니엘이 사온이란 수식구를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기능적으로 같은 의미를 갖도록 3개의 문장을 늘어놓은 것이다. 피다한 말에 복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유는 경험의 직접성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키가 큰 남자가 집에 잇다이 문장은 두개의 작은 문장으로 이루어졋다. 주문장은 남자가 집에 있다이고 종속문장, 안긴문장은 () ()’이다. ‘() ()’는 듣는 사람이 동의할 것이라고 간주하는 정보 즉 구정보가 담겨있다. 반면에 주절 남자가 집에 있다는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장 즉 신정보가 담겨있다. 언어학자들은 이러한 신정보를 표명(assertion)이라 한다. 이런 이유로 안긴 문장이 표명의 의미로 상요되는 경우는 거의 찾기 힘들다. 표명은 경험의 직접성 원칙과 깊은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표형은 듣는 사람이 직접 확인할 수있지만 표명이 아닌 정보는 직접 확인할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데 집에 남자가 있는지 없는지는 눈으로 확인할 수있지만 그가 키가 크다는 것은 확인할 수 없다. 말하는 사람은 키가 크다고 생각하지만 듣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예문을 보면 차이가 더 명확해질 것이다. ‘어제 본 남자가 여기 있다.’ 여기서 신정보 남자가 여기 있다는 청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안긴문장에 들어있는 구정보 ‘(내가) 어제 (봤다)’라는 사실은 직접 확인할 수 없다. 결국 안긴문장은 표명이 아니기 때문에 경험의 직접성 원칙을 위반한다. 따라서 피다한 말에는 안긴문장이 없다. 안긴절이 잇다면 표명이 아닌 말을 한다는 뜻이고 이는 경험의 직접성 원칙을 어기는 결과를 낳는다.”

 

촘스키는 인간이 유한한 두뇌를 가지고 어떻게 문장을 무한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알고 싶어한 최초의 언어학자엿다. 흔히 언어학에서 말하는 유한한 도구의 무한한 활용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촘스키는 인간언어의 이러한 창조성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 바로 순환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피다한 말에 순환이 존재하지 않는다. 피다한 말에 순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나의 주장이 옮다면 촘스키 학파들은 낭떠러지로 몰리고 만다. 순환이 언어의 핵심요소라 주장하는 이론을 가지고 순환이 없는 언어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순환이 없다는 것만으로 피다한 말이 촘스키 이론에 치명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피다한 말에는 문법이라 할 것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피다한 문법에는 문장구조에 대한 규칙(통사론)이 없다. 단순히 낱말들을 늘어놓고 이것을 문장으로 이해한다면 구나 절이 존재할 수 없다. 구나 절이 없다면 순환도 생길 수 없다. 실제로 피다한 문법에는 공사구, 명사구, 안긴문장 같은 것이 없다. 구나 절이 없기 때문에 문법읕 매우 단순하다. 그저 여러 낱말들을 실에 꿰기만 하면 문장이 되는 것이다 동사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단어들을 나열하고 최소한의 한정을 덧붙이면 된다. 문장 하나당 대개 형용사나 부가와 비슷한 성분들도 하나 이상 쓸 숭 없다는 것이 규칙이라면 규칙일 것이다. 피다한 말의 모든 규칙은 통사론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규칙이 지켜지는 이유는 모두 경험의 직접성 원칙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화적 가치가 문법을 직접 제약한다는 뜻이다. 아니 ㅂ문화적 가치가 곧 문법이라는 뜻이다. ‘어이 빠이타, 못 몇 개만 가져와. 다니엘이 못을 샀어, 그건 같아여기에는 다니엘이 못을 샀어그건 같아라는 두개의 표명이 있다. 그러나 영어에서처럼 다니엘이 산 못이라 표현한다면 표명이 없는 말이 된다. 따라서 이것은 경험의 직접성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기에 쓸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열정을 쏟았던 연구방향은 대부분 철저하게 촘스키 노선을 따른 것이엇다. 문법은 인간게놈의 일부이고 세계언어의 문법적 다양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모든 문법을 포괄하는 보편문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화가 문법에 주요한 영향을 미칠수 잇다는 나의 주장이 옳다면 이전에 내가 추구했언 가설은 틀린 것이다. 우리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특별한 유전적 능력 때문이 아니다. 문법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생물학적 기초는 요리를 맛보는 능력, 수학적 추론을 하는 능력, 기술을 개발하는 능력의 기초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언어능력이란 인간의 단순한 추론능력과 전혀 다르지 않아다. 무엇인지(대상), 그 대상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는지(사건), 그 대상이 어떠한지(상태) 이야기할 수 없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남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언어에는 반드시 동사와 명사가 있어야 한다. 이 두가지가 잇다면 이제 문법의 기본골격은 완성되는 것이다. 동사의 의미는 명사를 필요로 하고 이러한 명사와 동사가 논리적으로 규칙에 따라 결합하여 단문이 된다. 이렇게 결정된 근본적인 문법은 문화적 가치, 문맥적으로 중요한 요소, 명사와 동사의 한정등에 따라 순서가 변형되기도 한다. 이러한 진화론적 발달과정을 정리해보면서 나는 비로소 인간게놈이나 언어기관 같은 특별한 능력들이 없어도 우리는 충분히 문법을 만들어내고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