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 그 창조적인 역사
피터 투이 지음, 이은경 옮김 / 미다스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신세계의 낯선 환경을 견디는 것 못지 않게 “칼뱅주의 그 자체를 견뎌내기 위해서도 분투해야 했다. 자기혐오에 이를 정도의 자기반성과 끝없는 노력을 요구하는 칼뱅주의의 무게는 신도 개개인이 감당하기엔 벅찬 것이었다. 엄혹한 종교는 아이들을 겁에 질리게 했다. 17세기의 판사 새뮤얼 시월의 글에는 열일곱 살 난 딸 이야기가 나온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조금 뒤에 딸이 대성통곡을 했다. 아내가 이유를 물었지만 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딸이 입을 열고 한 말은 자기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갈까 봐 너무 무섭다는 것이었다.’ 그런 불안은 사람들을 병들게 했다. 칼뱅주의는 고통받는 영혼에게 오직 하나의 위안거리를 주었는데 그것은 물질적 세상 속에서” (바버라 에런라이크) 자신이 쓸모있는, 구원받을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힘들게 일하는 것이었다. 베버는 그런 위안을 자본주의 정신이란 말로 포장했지만 그런 위안을 찾아야 하는 사람에겐 결코 위안일 수 없다.

더군다나 그런 식으로조차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가정주부 같은 경우, “남은 것은 병적인 자기성찰이었다. 사람들은 소화불량, 불면증, 요통 등 신경쇠약 증세를 불러들이기에 딱 좋은 상태에 놓였다. 유행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몰라도 여성의 병약함은 강제된 나태함과 불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에서 기인한 것이었고 실제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주었다. 수십 년 동안 병약함으로 고통을 겪었던 (핸리 제임스의 누이인) 앨리스 제임스는 유방암 판정을 받자 곧 죽을 수 잇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일상의 노동이 비정형적이며 많은 부분 여성의 노동과 겹치는 성직자들 또한 마찬가지엿다. 칼뱅주의를 믿는 영혼, 혹은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영혼은 진짜 일, 그러니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기혐오로 자신을 소진시킬 수 밖에 없었다.”

칼뱅주의의 음울함에 대한 반동으로 1860년대 신사상 운동이 막을 올린다. 신사상은 헨리제임스의 표현을 빌리면 “지옥불 신학과 관계된 병”에 대한 치료제였다. “신사상의 관점에서 보는 신은 냉담하고 무관심한 존재가 아니라 편재하는 전능한 정신 또는 영혼이다.” 신사상의 핵심은 “물질적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있는 것은 오직 생각과 마음, 정신, 미덕, 사랑일 뿐이다. 따라서 질병이나 가난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실체는 해체되어 정신, 에너지, 진동으로 변하며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의식적 통제에 잠재적으로 복종한다. 이것이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과학’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 일체유심조니 고통은 마음에 달렸다는 말이다.

신사상운동은 ‘시크릿’으로 대표되는 미국식 성공학으로 변질된다: 세상은 마음 먹기에 달렸으니 돈도 성공도 멋진 애인도 내 마음에 달렸다는. 나중에 어떻게 변질되었든 신사상운동은 칼뱅주의가 정신에 가하는 고문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칼뱅주의는 그들의 머리를 ‘정신적 공허함, 고립감, 냉담함이라는 강렬한 감정’으로 채웠다.

그들이 겪은,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압박감을 사르트르는 ‘우연(Contingency)’이란 말로 요약한다. 나와 세상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필연적 관계가 없으니 세상은 나에게 선의를 갖지 않으며 나에게 무관심하다.

사르트르의 ‘우연’이란 개념은 하이데거의 실존적 권태란 개념에서 빌린 것이다. “하이데거는 권태를 단순한 권태와 실존적 권태로 나눈다. 그는 개인이 어떤 환경에 의해 완전한 무관심의 상태로 빠졌을 때 실존적 권태를 겪는다고 말한다. 이런 개인은 공허함을 느끼고 주변 세상으로부터 어떤 의미 있는 것도 기대하지 못하고 또 받지 못한다.”

그러나 저자는 청교도들이 겪었던 만성적 권태를 실존적 권태라 할 수 있는가 의문이다. 청교도들이 겪은 고통은 분명 자신과 세계의 관계가 부서지는 경험이었고 그 경험은 사르트르가 말한 ‘우연’이란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실존적 권태의 희생자들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청교도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자살은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다. 나와 세계의 관계가 깨진 마당에 자살이 대수인가? 그러나 헨리 제임스의 누이는 죽을 수 있다고 기뻐했지 자살을 하진 않았다. “권태와 자살의 상관관계는 실생활보다 문학적인 텍스트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듯하다.” 저자는 실존적 권태란 개념은 그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한 예로 영국의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은 젊어서 룰렛 게임을 자주 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무사히 오래 살다 세상을 떠났다. 자살은 창조적인 사람들에게서 더 흔히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실존적 권태 때문이 아니라 병에 걸리거나 노쇠해졌기 때문에 죽는다. 그렇다면 엠마 보바리는 어떨까?”

보바리 부인의 탈선은 권태 때문이다. ‘보바리 부인’은 “19세기 프랑스 북부 지방의 순응적이고 관습에 얽매인 부르주아 계층의 만성적 권태에 대한 반발 속에서 주인공 엠마를 그려낸다. 이 소설에서는 관습 타파를 향한 개인적인 열망을 엿볼 수 있다. 관습 깨기의 목적은 평탄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에 다시금 기복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녀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된 딸마저 유모에게 맡겼기 때문에 엄마로서도 역할이 없었다”. 엠마에게 관습 타파의 목적은 그런 무위도식으로부터의 도피였고 그녀가 깬 관습은 성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따분한 삶 때문에 불륜관계를 시작했을지는 모르나 그녀가 자살한 이유는 치욕 때문이다. 실존적 권태의 희생자들은 자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살과 관계된 어떤 행위를 한다 하더라도 그건 대부분 글을 통해서다. 삶의 무의미함을 지적으로 깨닫는데는 죽음을 양산하는 고통이 따르지 않는다. 그런 깨달음이 고통스러운 우울증의 결과가 아닌 한, 그렇다.”

저자는 엠마가 겪었고 청교도들이 겪었던 고통을 만성적 권태라 말한다. 그 권태는 논리로 짜여진 실존적 권태가 아닌 생리현상이 원인이라 저자는 본다.

“동물을 키워봤다면 따분해하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을 것이다. 동물들은 따분함을 느끼면 더 많이 잔다. 또 깨고 나면 놀이를 하거나 산책을 하자고 주인을 조르고 괴롭힌다. 만약 주인이 놀아주거나 산택을 시켜주지 않으면 풀 죽은 채로 집안이나 정원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하낟. 그 모습은 시무룩하니 축 늘어져 맥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동물이 느끼는 권태는 당연히 실존적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성격의 불안감이다.” 할 일이 없는 애완동물은 감금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감금 상태에서 그들이 느끼는 1차적 감정은 지금 상태에 대한 혐오이며 지금처럼은 좋지 않다는 불안감이다.

“감금 상태가 지속되면 동물은 우선 권태를 실질적으로 인식한다. 이는 관찰이 가능하다. 이후 좌절, 동요, 화 폭력 그리고 끝내는 우울증이 찾아온다. 감금된 동물은 권태에서 광적 반응 (동요하고 화를 냄)으로 그리고 우울 반응으로 옮겨간다.” 이 과정은 인간의 경우와 일치한다.

“권태는 분노에 찬 행동이나 광적인 행동은 물론 우울증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보다 권태는 감금, 고독감, 감각 상실이 지속되면서 시작되는 일련의 정서적 과정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라 할 수있다. 권태는 다른 여러 정서들과 함께 찾아온다. 권태는 이들 정서를 일으키는 원인이 아니다. 권태는 분노와 우울함이 차례로 나타느는 과정에서 첫번째로 나타나는 정서라 할 수 있다. 권태는 앞으로 나타날 보다 해로운 상태를 조기에 알리는 경고 신호이다. 권태는 태풍 전의 고요함 같은 건지도 모른다.”

권태와 우울함의 차이는 권태는 밖을 향하지만 우울은 안으로 자기 자신을 향한다는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신호가 권태이고 그럴 수 없어 포기했을 때 우울로 넘어간다는 말이다.

청교도들이 겪었던 고통은 권태가 만성화되고 그것이 우울로 진행된 것이다. 사르트르가 우연이라 불렀고 하이데거가 실존적 권태라 불렀던 것은 정확히는 우울이 맞다고 저자는 본다.

“신의 계획은 무엇일까? 신의 뜻에 어떻게 순응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신은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실존적 권태를 겪는 사람들과 같은 소극적이고 절망적이며 비관적인 태도로 이 착잡한 질문들에 반응한다. 루터교인인 한 동료는 그 느낌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루터교인들은 신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지. 그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하는 성직자들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하지만 그건 동시에 우리가 신을 대신해서 선을 행해야 한다는 말도 되지. 선을 행하는 건 그리 단순하지가 않아. 가끔은 막연히 선이 무엇인지 모를 때도 있어. 그럴 때면 무척 걱정괴도 불안해지지. 그럼에도 우리는 선을 행해야 할 책임이 있어. 아주 간단해. 그러나 쉽지는 않지.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천성적으로 어쩔 수 없이 무척 불안해하고 우울해 하는 거야.’”

이런 불안감은 ‘실존적 권태’란 말로 잘 요약된다. 그러나 저자는 실존적 권태는 “좌절, 식상함, 우울, 혐오, 무관심, 무감각, 갇혀 있다는 느낌 들의 서로 연관된 장애들을 두루 포함한 말’이라 본다. 다시 말해 만성적 권태로 시작되는 일련의 감정 메커니즘의 총합이라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저자는 본다. 그 시작은 단순한 권태다.

권태는 단순한 생리적 반응이며 오래가지 않는 기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만성적으로 권태를 자주 느끼는 사람은 근심과 우울증 내지는 약물, 알코올 중독에 빠지거나 분노와 공격적인 행동을 보일 위험이 크다.” 우리에 갇힌 동물과 그리 다르지 않은 메커니즘이다.

그러면 “권태가 18세기 계몽시대에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왜 나오는 것일까? 그런 주장은 “권태가 소외감이나 사회적 무질서라는 개념과 직관적으로 연되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따라서 권태, 소외감, 사회적 무질서는 모두 근대의 독특한 현상이다.” 물론 그런 주장이 권태가 언제 어디서나 있었다는 것을, 권태가 생리적인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18세기 이전까지 권태는 기껏해야 주변적인 경험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이성의 시대에 들어서야 개인의 지위가 중요해졌다. 이 시기에는 신탁 정치, 독재젗치, 전통적인 특권, 그리고 집산주의 전통의 맹목적인 고수에 도전이 가해졋다. 그러다보니 이 소용돌이치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개인과 개인의 감정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어 권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졋다.” 그리고 “후기 근대사회에 접어들어 여가 생활이 늘어나고 인간의 행복할 권리가 부각되었으며 기독교가 쇠퇴하는 대신 세속화가 뚜렷해졌다. (이를 ‘서양 문명 한가운데서 커져가는 형이상학적 허공’이라 칭하기도 한다) 또 개인의 권리와 더불어 내적 경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권태의 풍부한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여가는 늘었지만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개인의 소외감이 커졌고 그 시간을 제대로 보낼 책임은 개인이 모두 져야 했다. 그리고 증상에 대한 진단이 권태라 설명되고 나면 권태는 “’무의미함의 흔적’이 된다. 그 안에서 문제의 본질이 흐려진다. 분노에 이어 떠올라 근심으로 치닫는 권태 안에서 인간은 당연히도 모든 삶이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실존적 권태는 허깨비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까? 실존적 권태라는 것이 있다면 정말로 잇는 것이다. 물론 나 같은 회의론자들은 실존적 권태를 각종 장애를 두루 나타내는 하나의 용어 내지는 그저 상대적으로 사소한 현상으로 여기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권태는 보편적인 경험이다. 대부분의 시대에서 사람들이 권태를 느껴왔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권태는 대개 이로운 정서다. 하지만 만성적인 단계로 넘어가면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