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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개발, 길을 잃다 - 대형 개발에 가려진 진실과 실패한 도시 성형의 책임을 묻다
김경민 지음 / 시공사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외젠 앗제는 공공기관이 고객인 상업사진가였다. 그의 일은 어디까지나 고객이 지정한 건축물과 풍경을 찍는 것이었고 그 결과물은 유리원판으로 십여장씩 개인 고객들에게 백여장씩 공공기관에 팔려나갔다. 그가 하는 일은 그와 같은 일을 하던 다른 동료들처럼 파리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앗제의 사진은 특별햇다.
앗제는 “20세기 사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진가들 자신이 사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영혼이 없는 상업사진이라 치부하기엔 “그의 작품의 아름다움은 당혹스럽다.” 앗제는 기록을 남긴다는 의뢰의 목적대로 파리를 찍었다. 그러나 다른 동료들과 달리 그가 찍은 파리는 ‘앗제의 파리’라 불린다. 앗제의 파리는 “동적이며 만져질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앗제의 이미지를 관객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그 안으로 빨려드는지 관찰해보라. 우리는 사진의 공간을 소유하고 이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이 들게 하는 사진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앗제의 사진은 “위안과 놀라움과 감동을 선사하기는 하지만 좀처럼 매혹시키는 법은 없다.” 앗제는 무대의 주연이 아니라 조연만 찍었기 때문이다. 앗제에게 도시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무언가를 소비하며 정신적인 휴식을 찾는 공간”이엇다. 그러나 앗제가 찍은 사진은 그 도시의 드라마 자체가 아닌 드라마의 배경인 미장센이었다. 건물에 사는 사람과 그들의 삶보다는 그 배경인 건물을 찍엇고 사람들이 사고 소비하는 자체보다는 그 대상인 상품들과 그 상품이 놓인 진열장을 찍었다. 무엇이 그를 그런 배경에 몰두하게 했을까?
더군다나 앗제의 사진작업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옛날을 다루는 영화에 보면 커다란 삼각대 위에 올려진 카메라에 고개를 쳐박고 천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찍는 사진사를 볼 수 있다. 앗제가 들고 다닌 사진기는 그런 사진기엿다. 건물을 찍기 위해선 그런 커다란 사진기가 필요했다. “큼직한 뷰 카메라와 그에 딸린 올망졸망한 가방들을 끌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일이 얼마나 힘든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예순여덞이란 나이까지 앗제가 헤라클레스 같은 괴력을 내야 했던 이유는 아마도 소유욕이었을 것이다.
“’저는 옛 파리(Vieux Paris)의 모습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소유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옛 파리의 모습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고? 사실과 다르다. 앗제의 파리는 보행자. 노동자 계급, 좁고 지저분한 안뜰을 감추고 있는 전기 산업화 단계의 별볼 일 없고 미천한 파리엿다 ‘다른 사람들’의 파리가 아니더라도 그저 보통 사람들의 파리일 뿐이다.” (이상 Gerry Badger ‘외젠 앗제’에서 인용, 요약)
그가 찍은 보통 사람들의 파리는 “오스망과 황제가 의도했던 것이 무엇이든 간에 ‘위험한 계급’과 불건전한 가옥과 산업을 도심에서 추방하는 일”(데이비드 하비)때문에 밀려나 사라져 버릴 운명에 놓인 것들이었다. 오스망이 만든 “널찍한 거리를 거니는 부르주아의 파리나 부르봉 왕조의 파리는 앗제의 진정한 관심 밖이었고 그의 거대한 계획과는 무관햇다.”
“오스망의 업적은 근대 도시계획의 위대한 전설이 되었다. 황제의 지원을 업고 자본과 노동의 잉여를 광대한 공공사업계획으로 흡수하는 수단으로 무장한 그는 수도의 사회적 경제적 삶의 공간적 틀을 재조직할 일관성 있는 계획을 고안했다. 오스망은 ‘다양한 지역적 상황을 충분히 적절하게 조화시킬 수 잇도록 상세하면서도 전반적인 계획’을 추구햇다. 도시공간은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되고 다루어지며 그 안에서 도시의 상이한 구역과 상이한 기능들은 상관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전체를 형성한다. 도시공간의 전체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때문에 오스망은 대도시 지역 내 공간질서의 합리적 진화를 위협하는 불균등한 개발이 진행되던 근교를 병합하기 위해 격렬한 투쟁을 벌여야 했다. 1860년대에 그는 끝내 승리했다.” (데이비드 하비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오스망의 승리 덕분에 우리는 모두가 아름답다 말하는 오늘날의 파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공짜 점심은 없다.
“발터 벤야민에서 미셸 푸코에 이르는 비판적 지식인들은 오스만의 도시 계획이 프랑스혁명 이후 폭동과 소요의 중심이 된 파리를 권력의 입장에서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한다. 거미줄같이 복잡한 골목길로 흩어지는 군중들을 통제하는 방법은 미로를 없애고 대로를 건설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겉으로 내세운 대로 건설의 목표는 비좁고 비위생적이고 불편한 파리를 개방적이고 위생적이고 편리한 도시로 만드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 파리 시민들에 대한 일상적 감시의 효율을 높이고 신속하고 용이하게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오스만 이전의 ‘오래된 파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오스만의 도시계획은 기억으로 가득 차 있으며 다양한 모습의 매력적 파리를 파괴했고 그 결과 파리는 영혼이 없는 도시가 되었다고 한탄한다.” (정수복)
앗제에게 사진은 권력에 밀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파리의 영혼에 대한, 상상적 소유였다. “그것은 프루스트적인 의미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자’하는 개인적인 추구이고 두번째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소유, 즉 자기가 속한 계급에게 프랑스의 문화를 되찾아 주고자 공공 문서 보관소에 조심스럽게 자기만의 소리를 불어넣는 행위를 가리켰다. 그러므로 앗제의 광범위한 테마는 여러 평자들이 결론지었듯이 단지 프랑스 문화유산의 목록을 작성하고 그것이 지닌 정신을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뛰어난 감수성과 감각있는 눈으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앗제의 작품이 지니는 정령숭배적 경향이나 우울증, 사랑스러움 등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해줄 인물, 그의 삶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이점이 앗제가 지닌 진정한 가치이며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시적인 답변을 제시하는 사진작업을 해온 모든 작가들에게 그가 남긴 유산이다.” (Gerry Badger)
그러나 앗제의 유산이, 앗제의 파리가, 무엇이었건 역사의 승자는 오스망의 유산이고 오스망의 파리였으며 그의 파리는 이후 전설이 되어 모든 도시계획의 모범이 되었다. 그리고 도시의 영혼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오스망과 앗제의 투쟁은 지금도 계속된다.
오스망에게 파리는 제국의 수도다워야 했다. 그런 파리에서 “저소득층이 모여사는 슬럼은 없어져야 할 대상이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에 유행했던 도시미화운동은 오스망의 모범생이었다.
19세기 미국에서 시작된 도시미화운동은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중산층 이상의 계층은 저소득층 때문에 도시가 불결해지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고 유럽도시가 주는 낭만이 미국에도 필요하다는 유럽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유행했던 사회다윈주의는 “도덕의식과 시민의식이 부족한 열등한 저소득층 때문에 도시가 열악해졌다”고 암시햇다. “도시는 윤리적 질서가 있어야 하고” 시민은 마땅히 지역사회의 윤리적 가치를 공유하고 “시민의식과 시민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도시의 주거환경을 아름답게 바꾼다면 저소득층 주민들을 계도할 수 있다고 보았고 아름다운 도시건설에 매진했다. 도시는 아름다운 환경과 함께 그 기능이 원활해야 긍정적인 이미지를 창출한다고 믿었다.”
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도심에 사는 저소득층 주거지”는 사라져야 햇다. 그렇게 사라진 공간에 “그들은 넓은 오픈 스페이스와 고대로마식 기념물인 거대한 건물, 아름다운 거리 조형물, 공원”을 새웠다. 오늘날 센트럴 파크를 중심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뉴욕은 그때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름다운 뉴욕은 ‘그들만의 도시’가 되었다.
“런던과 파리에 공원이 건설되자 뉴욕에서도 거대한 공원이 바람직하게 여겨지기 시작했고 아직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넓은 지역을 공원용으로 남겨두었다. 센트럴 파크가 건설되어 모양새를 갖추고 매력적인 모습을 띠게 되자 이 공원은 자석처럼 주택가를 북쪽으로 끌어들이는데 일조했다. 뉴욕의 부자들이 센트럴 파크 근처에 정착할 무렵 그들은 정말 굉장한 부를 자랑햇다. 센트럴 파크는 위치상의 이유로 인해 초기에는 주로 부자들만 찾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부자들의 핍스 애버뉴로의 이주가 절정에 달했을 때 그들은 핍스 애비뉴의 공원 쪽에 저택을 짓기 시작햇다. 많은 수의 대부호들이 이곳에 와 살면서 다른 지역에서 축적한 재산을 향유했다. 뉴욕의 오페라하우스에 박스석을 보유하는 것, 센트럴 파크에서 타고 다닐 마차를 소유하는 것, 핍스 애비뉴에 저택을 가지는 것 그리고 뉴포트에 루이 16세 시대 건축양식의 휴일용 별장을 두는 것이 네바다에서 온 은광왕들과 여왕들, 피츠버그에서 온 철강황, 시카고에서 온 곡물왕,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철도왕, 클리블랜드에서 온 석유왕들이 지닌 야망의 절정이었다.” (마크 기로워드)
아름다움은 공짜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대가를 낼 수 있는 사람의 것이다. 오스망의 파리는 아름답지만 프랑스인들은 그 아름다움의 대가를 지금도 치뤄야 한다.
“파리의 거리를 따라 나란히 서 잇는 그 많은 5층짜리 건물들이 선사하는 기적적인 통일감을 즐기는가? 그것 역시 오스망의 작품이다. 오페라 거리는 어떠한가? 마찬가지이다. 프랑스의 그 모든 화려함 아래에는 깨끗한 물을 쓰레기로부터 분리해주는 하수시스템이 놓여있다. 이 역시도 오스망 덕분에 생긴 것이다. 1853년부터 1870년까지 오스망은 파리에 있는 건물 절반 이상을 없앴다. 오스망은 사실상 도시를 구하기 위해 도시를 파괴햇다.
‘사람들이 없는 도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셰익스피어의 말이다. 사람들에게는 건물이 필요하다. 도시는 건품을 새로 짓거나 증축함으로써 성장하고 도시가 건물을 짖지 않을 때 사람들은 도시의 인접성이란 마술을 경험하는 것을 방해받는다. 도시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도시의 일부를 파괴해야 한다. 파리를 보존하기 위한 오스망의 현대적 욕구는 과거 적정한 돈만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었던 파리를 오늘날 부자들만 즐길 수 있는 부티크 도시로 바꾸어 놓았다.
파리의 역사는 그곳에서 무일푼으로 성장기를 보냈던 위대한 예술가들의 이야기로 가득하지만 오늘날 어떤 가난한 예술가들이 파리 중심부에서의 생활을 감당할 수있는가? 장소가 건설활동을 과도하게 제한할 경우 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물가는 꾸준히 오르는 스테그네이션에 빠질 위험이 커진다. 도시의 역사가 도시를 구속한다면 도시는 그 가장 위대한 자산인 ‘개발능력’을 잃게된다.” (에드워드 글레이저)
몰론 오스망의 제자들은 역사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제자들은 오스망에게서 아름다움이란 가치만 빌렸고 오스망의 수제자였던 미국의 도시미화운동은 “태평양을 건너 인도와 아프리카의 영국식민지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20세기 중반에는 파시즘 정권의 도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무솔리니 치하의 로마 그리고 나치 정권의 베를린 개조계획은 기본적으로 도시미화운동을 사상적 토대로 삼았다.” 파시즘과 오스망(그리고 그 제자인 도시미화운동)은 같은 시선으로 공간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시선이라는.
그러나 권력의 시선으로 재편된 공간의 아름다움은 “피상적인 시각효과”일뿐이엇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는 영혼이 빠져있었고 외모만 아름다운 성형미인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없는 공간의 성형으로 영혼도 치유한다는 전제가 잘못된 것이다. 도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도시가 아름다워졌다해도 지역주민들의 의견이 무시되고 도시개발의 피해가 저소득층에 집중되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매력있는 세계 도시 서울
한강을 서울의 도시 브랜드로
한강을 도시발전 전략의 거점으로 서울의 도시혁신촉진
고품격 시민 문화 창조
상징적 건축물 조성을 통한 서울의 이미지 제고
밤이 더 아름다운 한강 야경 연출
모뉴먼트”
서울시의 ‘한강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의 키워드들이다. 어딘가 많이 들어본 것이다. 60년대 이후 미국에선 포기한 도시미화운동의 키워드를 반복하고 잇다. “도시미화운동 방식이 태동한 역사적 배경과 그 진행 방식이 21세기 서울에서 재현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한강공원을 단장하고 접근성을 높여 시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것은 그 가치를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8개 정비 구역이 기본적으로 부동산 개발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으나 주민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서울시가 일방적으로 진행한다는 점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과거의 재개발과 달리 서울시가 배제하려는 사람은 저소득층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8개의 정비구역은 압구정동과 동부이촌동, 반포의 고소득층 주거지역에서 일반 서민들이 사는 지역까지 모두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이다. 그런데도 서울시는 일방적인 계획안을 발표했고 주민들의 반발은 거세다. 2009년 9월 강남구청이 압구정 주민 6천명을 대상으로 주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98%가 반대했다. 가끔 일간지에 압구정 주민들이 ‘공공성’ 회복에 반대한다는 뉘앙스의 기사들이 실린다. 여기서 무엇이 ‘공공성’이냐는 것이다. 기존 아파트를 철거하고 오픈 스페이스와 공원을 더 많이 만드는 것이 ‘공공성’이 될 수는 없다. 오픈 스페이스의 직접적인 수혜자는 거주민일 것이다. 그들은 본인이 거주하는 초고층 주상복합건물에서 내려다보는 한강의 절경과 공원의 쾌적함을 매순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픈 스페이스를 즐기기 위해 많은 돈을 주고 아파트를 구입해서 거기에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제값을 지불하고 즐기기 때문에 진정한 공익은 간접적인 수혜자들이” 가끔 지나며 느끼는 심리적 안정감과 쾌적함이 전부이다. “오픈 스페이스를 늘려 공공성이 획적으로 증대될 거라는 서울시의 주장만큼 공공성의 양이 엄청나게 증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공성이라는 이름 뒤에 제값을 지불하고 사는 중산층 이상의 고소득층이 공공성의 혜택을 받는다면 이것이 과연 얼마나 공익일 수 있는가”
강북 뉴타운 계획에서 서울시가 말하는 공공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울시는 ‘강북에 고품격 주거환경과 교육여건을 조성하여 지역간 격차를 해소하고 삶의 질을 개선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뉴타운을 만들면 주민의 소득이 올라가는가? 계획의 비밀은 추방이다.
“시범지구와 제2차 뉴타운지구의 주민구성을 보면 세입자가 전체의 72.53%에 이른다. 특히 영등포 지역 뉴타운은 전체 세대의 86.8%가 세입지다. 뉴타운지구 주민의 월평균 가구 소득은 187만원으로 서울시 전체 평균 303만원의 2/3 수준이며 세입자 가구 중 순자산 4000만원 이하는 66.6%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저소득층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소득이 단기간에 획기적으로 오르지 않는 이상 아파트 입주자격을 얻는다 한들 입주비용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임대아파트를 많이 지어야 함에도 비중은 17%를 넘지 않는다. 오히려 임대아파트가 없는 지역조차 있다.
기존 거주민의 낮은 소득수준과 신규공급된 아파트가 중대형 위주인 점을 볼 때 기존 거주민이 재정착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2007년 자료에 의하면 뉴타운 재정착률은 17.1%에 머문다. 따라서 지역격차해소라는 목표는 기존주민들의 소득향상을 통해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 주민들을 중산층으로 바꿔치기함으로써 격차해소를 줄이는 것이다.
뉴타운 정책의 목적이 기존 거주민의 삶을 개선하는 데 있음을 밝혔는데도 현실에서는 기존 저소득층의 지역 커뮤니티가 붕괴되면서 새로운 중산층타운으로 변모하고 잇다. 구청 입장에서는 중산층이 들어옴으로써 주택가격이 상승하고 주변상권이 활성화되어 자신의 수입인 세금이 증가할 수 있기 때문에 내심 이를 조장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시의 22개구가 뉴타운을 경쟁적으로 추진하는 이유다.”
누구를 위한 고품격이며 누구의 삶의 질인가? 한세대 전에 끝난 냉전을 우리는 아직도 살고 있듯이 우리는 100년전의 도시계획 패러다임에 따라 아직도 살고 있다.
20세기 초반까지 “미국의 도심재개발과 도심을 관통하는 고속도로 건설은 대규모 강제이주를 동반햇다. 피해자의 상당수는 흑인을 비롯한 저소득층이었다. 집에서 쫓겨난 그들을 받아줄 정부의 임대 아파트 수는 매우 한정되어서 입주가 아주 힘들었다. 그야말로 흑인 저소특층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이엇다. 언론사의 보도는 재개발의 부정적인 측면에 비판적이라기보다 재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정치인들에게 동조적이었다. 이는 저소득층 주민들의 대규모 이전을 전제로 한다는 점과 임대료 상승의 폐단으로 저소득층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는 점에서 서울에서 진행되는 뉴타운 개발의 폐해와 비슷하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미국과 유럽의 도시계획은 달라졋다. “미국의 주택 재개발의 과거 모습은 현재의 우리와 많이 닮았지만 현재 모습은 매우 달흐다. 단적인 예는 공공조직이 주민의 이익을 대변하여 공공 디벨로퍼로서 도시재개발 사업을 주도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의 공공기관은 주민을 대변하지 않는다. 공공기관에게 주민은 계획을 통보해주어야 하고 단지 설명해주어야 하고 동의만 해주면 되는 수동적인, 권리가 없는 ‘대상’일 뿐이다.
“도시개발구역이 지정되기 2년 전에 일방적으로 서부이촌동 아파트를 편입한 계획안을 발표한 것은 지역 커뮤니티의 이익을 수호하는게 아니라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도시계획 절차상의 문제 되에도 용산국제업무지구의 개발사업자를 선정하는 절차를 들여다보면 여기에도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절차가 없다는 걸 알게된다.
우리나라와 비교해 미국은 개발과정에서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놓았다. 뉴욕시의 경우 개발행위는 세단계를 거치는데 첫째 단계인 지역주민협의체에서 개발에 대한 승인을 얻어야 시 의회와 시장의 승인을 얻는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뉴욕의 디벨로퍼들은 지역주민협의체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 지역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정확히 인지하고 이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면 한국에선 어떤가? “공무원들을 사석에서 만나 개발사업활성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대부분이 환지방식(개발 후 토지를 주는 방식) 대신 수용방식(돈을 주고 주민을 내보내는 방식)을 선호한다. ‘개발방식이 깔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역주민이 개발과정에 개입하면 번거롭기 때문에 주민의 참여를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일까? 목소리를 내는 지역 커뮤니티가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지역 커뮤니티는 말 그대로 지역주민들의 모임이다. 다만 미국의 지역 커뮤니티가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지역 커뮤니티에 많은 지역 주민이 참여하며 교육, 범죄, 경제활동, 그 밖의 사회 이슈 등 지역의 문제점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다. 따라서 매우 자연스럽게 지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리더가 된다. 또한 이들은 부동산 개발이라는 특수한 목적으로 모인 게 아니어서 우리나라의 주택조합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나라의 조합은 주택개발이라는 경제적 목적을 위해 뭉친 것이지 자녀들의 교육이나 지역의 경제 활동 활성화, 범죄 같은 이슈에 대해 묻고 토론하는 집단이 아니다. 어찌보면 미국에서 지역 커뮤니티가 활성화된 이유는 미국의 장점인 민주주의의 역사에 뿌리를 둔 것인지도 모른다. 특정 이슈에 대해 주민들이 의견을 교류함녀서 타협점을 찾고 합리적 선택을 하기 위해 자생적으로 지역 커뮤니티가 활성화된 것이다.”
한국 공무원의 눈에 주민은 ‘대상’일 뿐인 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시민이 시민인 이유는 그들이 집단을 이룰 때이다. 그런 시민이 없을 때 국가의 눈에는 사람이란 없다. 마음대로 움직일 숫자만 있다. ‘사람들이 없는 도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도시의 영혼은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이 모인 커뮤니티이다. 그러나 서울에는 영혼이 있는가? 아니 있었던 적이 잇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