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역사 1
카렌 암스트롱 지음 | 배국원, 유지황 옮김 / 동연출판사 / 1999년 2월
평점 :
절판


군대 동기 중에 신학생이 있었다. 군대에 있을 때 서로 많은 말을 했었는데 그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중세에 고명한 수도승이 있었다. 어느 날 지나다 그 수도승이 기도하는 것을 들으니 이런 내용이더라는 것이다. “신이시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같은 말만 계속 반복되는 기도였다고 한다. 지금도 그 친구가 신앙의 길을 걷고 잇는지는 모르겠다. 그 친구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며 하고 싶었던 말은 그 질문은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며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17살에 수녀가 된 저자를 떠나지 않았던 의문이기도 했다.

“나는 결코 선지자와 신비주의자들이 묘사하였던 그 신을 만나지 못하였다. ‘신’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언급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도 내게는 고대 말기와 밀접하게 연된 전적으로 역사적인 인물로만 생각되엇다. 나침내 나는 아쉬워하며 수녀원 생활을 떠나야 했고 좌절과 부적응이라는 짐을 벗어버리자 신에 대한 신념이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수녀원을 떠난 이후 저자는 인간은 종교적 인간이라는 것을, 종교는 인류에게 자연적이라는 것을, 신이란 인간 스스로 언제나 다시 창조되어온 잠정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을 삼십여년 전 내가 수녀원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배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지게 되었다. 만약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세 종교의 탁월한 신앙가들로부터 하늘 위에서 세상으로 강림하는 신을 기다리는 대신 내 자신을 위하여 신에 대한 감각을 의식적으로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더라면 나는 많은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토록 감동을 선사하는 시나 음악처럼 신이 창조적 상상력의 산물임을 일깨워 주었을 것이다. 종교는 극히 실용적이다. 우리는 앞으로 어느 특정한 신 개념이 논리적, 과학적으로 건전한 것인지보다 얼마나 유용한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더 이상 효능이 없어지자마자 신 개념은 변화하며 어떤 때는 아주 급진적으로 달라지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시대 이전의 대부분 유일신론자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진의 신 관념들이 신성불가침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잠정적이라는 것을 알고 잇었기 때문이다. 신 관념은 전적으로 인간이 만든 것이고 그 관념들이 상징하는 표현불가능한 실재와는 전혀 분리된 것이다.”

이책은 그 관념의 역사이다. 아브라함과 모세 그 후의 선지자들의 신 그리고 예수의 신은 모두 다른 신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신은 인간으로선 표현불가능한 것이기에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인간이 초월을 경험한다는 것은 삶의 진리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주요 종교는 이 초월성을 일반적인 언어 개념으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유일신론자들은 이 초월성을 ‘신’이라고 부르면서도 중요한 단서조항을 덧붙였다. 예를 들어 유대교는 신의 신성한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금했고 이슬람은 신을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을 금했다. 이러한 규율은 곧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실재가 인간의 모든 표현을 초월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징표였다.”

저자는 묻는다. “미국인의 99%가 ‘신을 믿는다’고 답했다. 문제는 과연 그들이 믿는다는 신이 어떤 ‘신’인가 하는 점이다. 신들을 창조하는 작업은 인간이 항상 해 왔던 일인 듯하다. 어떤 종교적 관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면 곧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 왔다.” 그 예가 지고신 또는 천신이라 저자는 말한다 (이 예는 저자의 이후 저서에도 반복되어 언급된다) 그러나 만물의 창조자로 여겨진 그 신은 인간에겐 너무 먼 존재였다 (중국의 天, 한국의 하느님도 그 예라 생각된다)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이런 신은 너무나 소원하고 너무 고귀한 탓에 결과적으로 열등한 영들과 더 접근가능한 신들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신화를 만들고 신들을 경배했던 것은 자연현상에 대한 어떤 실제적인 설명을 찾고자 함이 아니다. 상징적 이야기나 동굴 속의 벽화나 조각들은 그들이 경험한 경탄을 표현하고 이 압도적인 신비를 자신들의 삶과 연결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종교는 거룩함(聖)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신화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너무 복잡하고 파악하기 어려워 다른 방법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실재를 묘사하기 위한 비유적 노력이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고대인들은 이러한 신적인 삶에 참가함으로써만 자신이 진정으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같다.”

그러나 하늘님이나 天 또는 고대 팔레스타인의 만신전에 기록된 최고신 엘은 너무 먼 존재였다. 팔레스타인에 널리 받아들여진 신은 그보다 실제적인 힘을 가진 더 낮은 위계의 얌-나하르(바다와 강의 신)나 바알(비를 내리는 폭풍의 신) 등이었다.

“가나안에서 엘은 결국 최고신 대부분과 같은 운명을 맞아 기원전 14세기에 엘 숭배는 시들해지기 시작햇다. 대신 사람들은 역동적인 폭풍의 신이자 신성한 전사인 바알을 섬기기 시작했다. 기원전 6세기까지 이스라엘의 종교가 사실상 이 지역의 다른 민족들이 섬기는 종교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축의시대) “이스라엘의 종교는 실용적이어서 우리가 걱정하는 것 같은 사변적인 구체적 사항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오늘날 우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그들의 신을 믿었으리라 가정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초기 족장이었던 아브라함, 그의 아들 이삭, 그의 손자 야곱이 단 하나의 신을 섬긴 유일신론자였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같다. 실제로 이들 초기 히브리인은 차라리 가나안의 이웃들과 여러 종교적 신념을 같이 나눈 ‘이방인’이라고 하는 편이 더욱 정확할 것같다. 그들은 분명히 마루둑, 바알, 아나트 등과 같은 신의 존재를 믿었다. 혹은 그들이 모두 동일한 신을 섬기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의 신, 이삭의 ‘무서운 자’나 친족’, 야곱의 ‘전능한 자’는 모두 다른 세명의 신이었을 수도 있다.”

저자는 아마도 아브라함의 신은 가나안의 최고신인 엘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엘은 최고신일 뿐이므로 하위신인 바알 등의 다른 신을 배척할 필요가 없다. “이 신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엘 샤다이(산악의 신)라고 소개하는데 이는 엘의 전통적 칭호 중 하나다. 엘은 그들에게 족장이나 두목처럼 자상한 충고를 하고 방랑생활을 인도했으며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를 말해주며 꿈속에 나타나 계시했다. 가끔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을 보았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이스라엘인에게 저주받을 관념이 되고 만다.” 후대 8세기 무렵의 성서기자들이은 “그 누구도 신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이 충격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족장들이 신과 가까웠다는 옛날 이야기들이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현현에 담긴 의미는 신과의 은밀한 접촉을 신성모독으로 생각했던 후대 유대교의 유일신론보다는 오히려 일리아드의 정신과 더 가깝다고 할 수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에 더 가까웠던 아브라함의 신은 출애굽의 신과 다르다. “출애굽의 신은 잔인하고 편파적이며 살인적인 신이며 ‘야웨 사바오트(군대의 신)’라고 알려지게 될 전쟁의 신이기도 하다. 이 신은 심히 편협한 성격이어서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동정하지 않는 단적으로 부족적인 신이다. 오늘날의 일부 학자들은 출애굽 이야기가 이집트의 (팔레스타인) 종주권과 가나안의 그 동맹자들에게 대항하여 일으킨 농민들의 성공적인 반란을 신화적으로 각색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출애굽에 대한 이런 해석은 저자의 이후 저작에 반복된다.

저자는 ‘축의 시대’에서 엘에서 전쟁의 신 야웨로 신도 신의 성격도 바뀐 이유를 암흑시대 때문이라 본다 (암흑시대에 대해선 ‘축의 시대’ 리뷰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암흑시대에는 축의 시대 민족 가운데 둘이 나타났다. 미케네의 폐허에서는 새로운 그리스 문명이 탄생했으며 가나안의 고지대에서는 이스라엘이라 부르는 부족 동맹체가 나타났다. 가나안의 붕괴는 매우 점진적이었다. 기원전 15세기 이후 이집트 제국의 일부였던 해안 지대 평원의 넓은 도시 국가들은 이집트가 물러나면서 하나씩 붕괴했다. 이 도시들의 몰락으로 기원전 1200년 직전 고지대에 새로운 정착지 네트웤이 형성된다. 이 네트웤은 북쪽으로 갈릴리 남부, 남쪽으로 베르셰바까지 뻗어있었다.” (축의 시대)

출애굽은 이집트 땅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이집트가 가나안에서 물러나는 과정을 그렇게 신화화했을 뿐이라는 것이며 이스라엘인은 해안지대의 혼란을 피해 고원지대로 이주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집트 대탈출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대체로 합의를 보았다. 성경의 가장 오래된 부분들은 야훼가 원래 남쪽 산들의 신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다른 부족들이 남쪽에서 고지대로 이주하면서 야훼를 데려왔을 가능성이 있다. 해안의 도시 국가들에서 이집트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던 이스라엘인은 자신들이 실제로 이집트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인이 원래 가나안 원주민이면서 외지인이라 주장한 것은 그들이 가나안 사회에서 주변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라 저자는 추측한다. “고고학자들은 고지대에서 상당한 사회경제적 분열, 심한 인구변화, 경쟁하는 종족집단들이 200년에 걸쳐 펼친 사활을 건 투쟁의 증거를 발견했다.” 이스라엘인을 만든 집단과 부족들은 “모두 숙고 끝에 가나안의 오래된 도시 문화에 등을 돌리겠다는 용감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진실로 외부인들이었으며 주변부에서 산 경험은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외부 기원설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반가나안 논쟁에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가족에서 신참자였으며 (암흑시대의) 트라우마와 격변의 산물이었고 늘 주변으로 밀려날 위협에 시달렸다. 이스라엘인은 이에 반발하는 정체성과 서사를 발전시켜 나갔다.” (축의 시대)

그들이 이주한 고원의 삶은 그들이 떠나온 해안지대만큼이나 폭력적이엇다. “초기의 정착자들은 자신들이 식민지로 만들려는 땅을 차지하려고 싸워야 했을 것이다. 성경에는 요르단 강변에서 거둔 위대한 승리의 기억이 보존되어 있다. 남쪽으로부터 이주하여 모압의 영토를 통과하려던 부족들은 그들이 강을 건너는 것을 저지하려던 현지의 집단과 싸워야 했을 것이다. 정착민들은 일단 한 마을에 자리를 잡으면 이웃들과 공존하려고 노력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갓 태어난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람들에 대항하여 단결해야 했다. 포위를 당한 상태에서 늘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전쟁을 준비하며 살게 된 사람들은 전투적 믿음을 발전시켯다.” (축의 시대)

이런 환경에서 그들이 섬긴 야훼는 당시 가나안에서 유행했던 바알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 당시 인도로 침입한 아리아인들이 그랬고 그리스인들이 그랫듯이 폭력이 난무하는 영웅시대(또는 암시대)의 신은 힘과 전쟁의 신이엇다. 폭풍의 신인 바알은 “전차를 타고 하늘의 구름 위를 돌아다녔으며 다른 신들과 싸움을 했고 생명을 주는 비를 내렸다. 초기에 야훼 숭배는 바알 숭배와 아주 흡사햇다. 성경의 아주 오래된 텍스트에서는 야훼도 바알처럼 신성한 전사로 등장한다. 이 시절 부족들은 폭력적이고 위험한 삶을 살았으며 그들의 신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축의 시대) 그렇기에 야훼는 그 당시의 다른 신들처럼 잔인하고 편협한 신이었다.

“유월절 축제는 예리코 공격에서 시작된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성전을 준비하는 행사였다. 예리코의 성벽은 기적적으로 허물어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소건 양이건 나귀건 모조리 칼로 쳐 없애버렸다.’ 야훼는 전쟁의 신이었다.” (축의 시대) “야훼가 진정 아브라함의 신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 신은 분명히 아브라함과 친구처럼 마주 앉아 함께 음식을 나눴던 신과는 다른 모습이다. 야훼는 공포를 자아내게 하고 인간과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함을 주장한다. 고대의 천신들이 인간의 관심사를 돌보기에는 너무 멀리 잇는 듯 여겨졌기에 새로운 신들인 바알, 마르둑, 대지의 여신은 인간과 친근하도록 개념화되었는데 이제 야훼는 다시 한 번 인간과 신의 간극을 벌려 놓은 것이다.” 이스라엘인이 아직 일신교도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야훼는 특별한 신이었지만 그들은 다른 신들의 존재도 인정하고 그들을 섬겼다. 야훼가 유일한 신이 되는 것은 기원전 6세기 말이다. 최기에 야훼는 신들의 모임에 속한 ‘신성한 자들’ 또는 ‘엘의 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축의 시대) “그들은 전쟁 때 야훼의 능숙한 군사적 보호가 필요할 때는 그 언약을 기억했으나 평온한 시절에는 옛 관습을 쫓아 바알, 아나트, 아쉐라를 섬겼다.”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신성함을 하나의 신적인 존재에만 한정짓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을 것이다. 다수는 다른 형태의 신성함도 원했다. 이는 결국 야훼만을 섬기고 싶어하는 소수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이스라엘과 인도에서도 새로운 적대적 땅에서 하나의 사회를 유지해 나가는 일의 불안정성과 어려움 때문에 믿음에 폭력과 호전적 이미지가 들어왔다. 그러나 사람이란 높은 수준의 긴장을 무한히 유지하며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축의 시대)

미치광이 율법학자 엘리야가 등장하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야훼 종교가 결국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이방종교에 흡수될 위험이 언제나 존재했다.” “야훼는 전사신이었다. 그는 농업이나 다산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따라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풍년을 보장받으려고 당연하게 바알과 아나트의 고대제의를 거행했다. 바알은 땅을 비옥하게 하는 신이엇기 때문이다.” (축의 시대)

엘리야가 바알과 야훼의 신성력 대결에서 바알의 사제 450명을 학살한 사건은 유명하다. 미치광이 율법학자라 불릴 충분한 이유이다. 엘리야가 대표한 것은 ‘야훼 유일 운동’이었다. 그가 바알을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페니키아의 신이지 이스라엘의 신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면 엘리야가 만난 신은 어떤 신이었는가? 저자는 그것을 ‘감추어진 신성’이라 부른다. “’ 이제 곧 나 주가 지나갈 것이니, 너는 나가서 산 위에 주 앞에 서 있어라, 크고 강한 바람이 주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깨서 계시지 않았다. 그 바람이 지나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서도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엘이야는 그 소리를 듣고서 외투 자락으로 얼룩을 감싸고 나가서 동굴 어귀에 섰다.’ 광충과 노도와 같은 거친 자연 현상 속에 거한다고 여겼던 이교의 신들과 달리 야훼는 초연한 영역에 거하는 신이었다. 즉 야훼는 말로 표현되 ㄴ침묵이라는 역석처럼 거의 감지할 수 없는 미세한 바람 소리를 통해 경험되엇다.” “이것은 초월의 순간이다. 야훼는 자연 세계에 내재한 신성을 드러내는 대신 분리되어 다른 존재가 되었다.”

저자는 엘리야의 신은 당시 달라진 사회조건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번영이 구가되면서 상인계급이 출현했다. 왕과 사제, 신전과 왕궁으로부터 시장으로 권력이 이동했다. 새로 형성된 부는 지성적 문화적 융성으로 이어졌고 개인 양심의 발달로도 이어졌다. 도시에서 변화의 행보가 가속화됨에 따라 불평등과 착취가 더욱 두르러졌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던 흐름이 축의 시대를 형성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야훼 유일 운동은 그중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엘리야의 야훼는 “다른 신들이 사회적 정의라는 근본적 의무를 게을리 했다고 비난햇다. 엘리야도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에 대한 동정과 배려를 강조햇다.” 그러나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발전도 아니었으며 이스라엘과 유다에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약자 보호는 오래 전부터 고대 근동 전역의 공통된 정책이었다. 중동 전역에 걸쳐 정의는 종교의 핵심적인 기둥이었다.” 오히려 엘리야의 야훼는 그 초월성 때문에 구분된다. 이는 저자가 축의 시대의 ‘초월적 돌파’라 말하는 성격을 선취하는 것이다.

“오늘날 거룩이란 말을 도덕적으로 탁월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카도쉬는 도덕성 그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타자성 곧 철저한 분리를 의미한다. 시나이산에 나타난 야훼의 현현은 인간과 신적 세계 사이에 갑작스럽게 벌어진 엄청난 간극을 강조했다. 이제 천사들은 ‘야훼는 다르시다! 다르시다! 다르시다!’라고 외쳤다. 이사야는 인간에게 주기적으로 강림하여 황홀과 두려움으로 인간을 압도하는 바로 그 초자연적 감정을 경험했다. 이러한 전율하는 경험은 ‘두렵고 황홀한 신비’이다. 두려운 것이란 그것이 일상적인 위안으로부터 우리를 갈라 놓는 심각한 충격으로서 찾아오기 때문이고 황홀한 것이란 그것이 역설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이 압도적인 경험은 음악이나 성적인 것에 비교되며 말이나 개념으로 표현될 수 없다. 실재에 관한 우리의 일상적인 도식에 기초하지 않는 ‘전적인 타자’에 대한 이런 감각은 어떻게 보면 있다고 표현될 수조차 없다. 축의 시대에 새롭게 정립된 야훼는 아직도 군대의 신이엇지만 더 이상 단순히 전쟁의 신은 아니었다. 또한 야훼는 이스라엘만을 열정적으로 편애하는 단순한 부족신도 아니었다. 이제 야훼의 영광은 더 이상 약속의 땅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에 가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초월해야 할 대상인 탐욕, 증오, 자기 중심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초월해서 나아가야 할 목표인 신을 규정하는 데 집중하면 공격성과 호전적인 배외주의를 드러낼 위험이 생긴다. 자유는 축의 시대의 핵심 가치였다. 따라서 훗날 축의 시대 현자들 가운데는 엘리야의 고압적 전술을 ‘해롭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도 않은 영성응ㄹ 강요하는 것은 역효과를 낳았다. 본진적으로 규정불가능한 초월을 두고 교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축의 시대)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인은 이러한 신을 받아들였고 그들은 신의 실재에 대한 “아주 독창적인 개념”을 발전시킨다. “그것은 이 신과의 경험이 곧 한 인격과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타자성에도 불구하고 야훼는 말을 건네고 이사야는 대답할 수있었다. ‘우파니샤드’의 현인들에게는 이런 일을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대화를 나눈다거나 만난다는 생각은 신을 지나치게 의인화하는 부적절한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야훼와의 계약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으로 재정의된다. 그리고 “일신숭배는 예배협정이엇다. 야훼유일운동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훼에게만 희생을 드리고 다른 신들에 대한 신앙은 무시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신성한 자원이 축소되고 친숙하고 사랑하던 신성한 의무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중동의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합의와 단절하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여행을 떠나는 길에 나설 참이엇다.” (축의 시대)

그리고 그렇게 외로운 길로 그들을 이끈 야훼는 이전의 야훼가 아니었다. 헤브라이 예언자들은 “신을 파열, 뿌리 뽑기, 박살내는 타격으로 경험하고 한다. 아모스는 신을 자신에게 익숙한 모든 것을 낚아채 가는 파괴적인 힘으로 경험햇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느꼈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데 겁내지 않을 자 있겠느냐? 주 야훼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 전하지 않을 자 있겠느냐? 헤브라이 예언자들은 신비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도의 현자들처럼) 스스로 시작한 규율잡힌 오랜 탐구 끝에 내부로부터 깨달음을 경험한 것이 아니었다.아모스의 경험은 인도나 중국의 축의 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잇는 깨달음과는 매우 달랐다. 그는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힘에 사로잡힌 느낌을 받았다. 이힘은 그의 의식적인 삶의 정상적인 질서를 헝클어놓앗다. 이제 그는 자기 삶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엇다. 야훼가 목적을 가지고 통제하는 에고의 자리를 차지하여 아모스를 완전히 다른 세계에 던져버린 것이다.” (축의 시대)

그렇게 자신의 말이 아니라 야훼의 말을 해야 했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불의”에 분노했다. “이사야는 외면적으로 제의를 준수하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다. 이스라엘인은 그들 종교의 내면적 의미를 발견해야만 했다. 야훼는 희생보다도 공감(compassion)을 더 원한다. 선지자들은 스스로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하는 공감이라는 의무를 발견했다. 바로 이것이 축의 시대에 형성된 모든 주요 종교의 특징이 된다.

아모스는 사회정의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초의 선지자였다. 아모스의 계시를 통해 야훼는 억눌린 이들을 위해 대변하며 말 못하고 무기력하고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아모스 예언의 첫째 줄에서 야훼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도 모든 나라의 고통을 생각함녀서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성전에서 사자후를 발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만큼이나 사악했다. 그들은 잔혹함이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압제를 모른 척했으나 야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계약은 신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했음과 따라서 모두가 온당하게 취급되어야 함을 말하고 잇다. 신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정의를 위하여 역사에 개입하신 것이다.” 그래서 야훼는 이스라엘을 부수기로 결정한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둘 다 이스라엘 종교에 중요한 새로운 영역을 도입햇다. 그들은 올바른 윤리적 행동이 없으면 제의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더 이상 참지 않는 야훼의 분노와 함께 “기원전 6세기에 이스라엘은 본격적으로 축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번에도 변화의 촉매는 걷잡을 수 없는 충격적인 폭력의 경험이엇다. 새로운 축의 시대 전망을 창조한 사람들은 처음으로 바빌로니아에 끌려간 사람들이엇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공허를 들여다보앗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었기에 몇몇 사람은 슬픔, 상실 모욕의 경험에서 새로운 전망을 창조할 수 있었다.” (축의 시대)

이 시대의 예언자는 예레미야이다. “그는 선지자가 되는 것을 싫어했고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을 저주해야 하는 것에 심히 부담을 느꼈다. 예레미아는 아모스나 호세아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자신을 장악했다고 느꼈다. 관절을 마비시키고 심장을 쪼개고 마치 주정뱅이마냥 비틀거리게 만드는 고통으로서 신을 채험했다. 선지자가 느꼈던 두렵고 황홀한 신비라는 이중적 체험은 동시에 거친 폭력과 달콤한 유혹으로 경험된다. 선지자들의 신은 이스라엘인에게 중동의 신화적인 사고 방식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하고 당시 주류적 흐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갈 것을 종용했다. 예레미야의 고뇌를 통하여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충격과 혼란을 의미햇는지 볼 수 있다. 야훼의 종교는 아직 내재적인 신적 원리인 아트만과 비교할 만한 것이 나타나지 않앗다. 야훼는 외부의 초월적인 실재로 경험되었던 탓에 덜 이질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어떻게든 인간화될 필요가 있었다.”

“예레미야는 뒤에 남은 사람들이 아니라 기원전 597년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시련의 시기를 견디면 그들은 더 내적인 영성을 얻게 될 터였다. 야훼는 그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을 것이다. 이번에는 모세와 맺은 낡은 언약처럼 언약이 돌판에 새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내면으로 향했다. 각 개인은 자신을 책임져야 했다. 그들은 축의 시대의 더 내적이고 직접적인 앎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욥기가 이 당시에 쓰여졌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유없이 잔인해지는 신, 단지 재미삼아 내기 승부를 위해 인간을 갖고 노는 신, 그 신은 무엇인가? 바빌로니아에 끌려간 유대인 중 상당수가 믿음을 잃엇다. 그들에게 신은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에스겔의 환상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에게 건네진 두루마리에는 ‘신명기’ 저자들의 율법의 서와는 달리 분명한 지침이 없었다. 확실한 것은 전혀 없고 정리되지 않은 슬픔과 고통의 외침뿐이엇다.

성전 신앙에서 피는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제 에스켈은 피를 살인, 무법, 사회적 불의의 상징으로 바꾸엇다. 제의는 이제 축의 시대의 새로운 도덕적 의무에 따라 해석되었다. 이 사회적 범죄들은 우상숭배만큼이나 심각했으며 이스라엘은 임박한 재난을 두고 남을 탓할 수 없었다. 에스겔이 그리고 아마도 추방당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도 고통을 소화하고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심장이 부서지는 것을 감수했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제 성전은 사라졋지만 이스라엘은 세계 나머지 땅과 다른 삶을 살아 여전히 신성함에 참여할 수 있었다. 회복된 공동체를 보여주는 이환상은 미래를 위한 세밀한 청사진도 아니고 설계도도 아니었다. 인도 사람들이라면 만다라, 즉 명상응ㄹ 위한 이콘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서 신을 중심에 둔 제대로 질서 잡힌 생활의 이미지였다. 야훼는 자신의 백성이 추방당했을 대도 함께 있었다. 따라서 이 백성은 이교도와 구분되어 마치 여전히 성전 옆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이교도와 친하게 사귀거나 동화되지 말고 영적으로 야훼 주위에 모여야 한다. 성전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내적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추방당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이 다시 돌아와 머물 수 잇는 공동체를 창조할 수 있엇다. 그들 모두가 고대 제사장의 율럽을 따라 삶으로써 가능한 일이엇다. 이것은 놀라운 혁신이었다. 민족의 성전이 파괴된 이스라엘은 사제들의 나라다. 모든 사람이 성전에서 신성한 존재를 섬기듯 살아야 한다. 아느님이 여전히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P 기자의 율법은 삶 전체를 제의화하는 것이엇지만 그는 이 고대의 성전 율법을 이용하여 추방의 경험에 기초한 새로운 윤리적 혁명을 개시했다.

삶의 모든 세세한 면에서 하느님의 다름을 모방하면 야훼가 신성한 만큼 신성해질 수있으며 하느님이 있는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신성한 삶을 살지 않았으며 그것이 그들이 지금 추방을 당한 이유다. 하지만 회개를 하면 야훼는 적의 땅에서도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이것은 공감에 기초한 율법이었다.” (축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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