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3 - 인도로 가는 길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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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들에게 불교가 어필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달라이 라마가 도올에게 던진 질문이다.

유럽에서 기독교는 멸종 직전이다. 서구에서 기독교의 생명력은 그나마 미국에서 살아남았지만 “미국에서도 상류층이나 지식인이나 지도층보다는 흑인이나 소외된 보수세력의 지지기반 속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과 같은 샤머니즘적 성향이 강렬한 제3세계나 기독교 전통을 새롭게 수용한 신생국가에서 오히려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에서 개화된 상류층의 트레이드 마크가 기독교일 수는 있어도 불교이기는 어렵다. 그런데 미국사회에서는 오히려 하층부의 사람들은 햄버거나 스테이크를 잔뜩 먹고 뚱뚱하며 기독교의 영성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 개명한 상층부의 사람들은 비만형의 인간들이 별로 없고 채식주의자들이 많으며 불교도라는 트레이드 마크를 달고 일본 스시집에를 잘 간다.”

뉴욕 센트럴 파크에 달라이 라마가 나타나면 잔디밭을 “메우는 업숙한 수만의 군중은 75%가 대학원 졸업생들이라고 한다. 현재 미국 불교도의 60%가 박사며 의사며 변호사며 회사고위간부 등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달라이 라마는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 사회의 인텔리겐챠들은 더 이상 기독교로부터 새로운 문명의 젖줄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정신적 빈곤이 찾아오게 마련이고 여유로운 정상적 생활의 루틴을 가진 사람일수록 새로운 정신문화를 갈망한다.” 사람은 어쨌든 의미를 찾는 동물이고 그 의미를 영성이라 한다. 더 이상 기독교는 그 영성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과학의 보편화이다.

현대인의 종교는 과학이라 말해진다. 그러나 과학은 삶의 의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의미는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맥락은 다르지만 이책 다른 부분에서 언급되는 중국의 상황이 과학으로 인한 의미의 공허와 유사한 예이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진정한 문제를 문화와 도덕이라 말한다. “그것은 중국문명의 총체적 위기상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중국공산당은 맑스주의에 대한 완벽한 믿음의 기초 위에서 완벽하게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신념에 불타있었습니다. 더 이상 유교적, 불교적, 도교적 가치가 새로운 사회건설에 타당성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난 50여년동안 계급투쟁만을 가르쳤고 전통적 가치의 타도를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가르친 것은 ‘증오’였습니다. 전통적 仁의 가치, 서로의 인간성을 존중할 줄 알며 약한 자를 도와줄 줄 아는 마음씨, 온유와 사랑, 양보와 희생, 이런 것들이 갑자기 무용지물이 되고 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홍위병과 같은 어린애들 장난의 파괴적 광대짓을 보면 얼마나 그 가치전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의 공산주의의 모든 실험, 무계급사회의 건설은 하나의 춘몽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여실하게 입증되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목표 그 자체가 현실성이 없는 것이라면 그 이데올로기의 정당성 그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은 갑자기 모든 가치관을 잃어버렷다. 문제는 “아시아에서 자유라는 가치의 최대의 의미는 저는 전통문화의 보존과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어떻게 살려나가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된 창조적 혼돈이라 생각합니다. 중국은 여태까지 그러한 창조적 혼돈이 허용되지 않는 50여년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에 생긴 정신적 공백을 메꿀 길이 없습니다. 그러한 정신적 공백 때문에 범죄, 마약,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관료들의 부패, 도덕적 해이, 이러한 문화의 총체적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구의 문제는 과학혁명의 충격으로 기독교가 무력화되었다는 것이다. 도덕을 정당화해주는 종교가 무력화되면서 중국처럼 정신적 공백이 생긴 것이다. 과학은 도덕을 정당화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근세과학은 인류에게 무신론과 상식에 대한 무한한 신념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초월적인 창조주에로의 복속을 거부하게 되었다. 기독교로부터 불교에로의 세계사적 전환은 바로 이러한 과학의 보편화란 정신적 토양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다시 말해 싯달타의 정신혁명은 2500년후에나 세계 기독교가 성취해놓은 과학문명의 새로운 정신적 토대를 계기로 겨우 드러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과학과 호환되는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들에게는 무신론의 종교가 필요하다. 무신론 자체가 과학이라는 인과세계의 신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영성을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에 21세기 인류사의 정신적 패러다임 쉬프트가 불교를 통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That’s right” 달라이 라마의 말이다. “불교는 신이 없이도 인간에게 무한한 영성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는 엄연한 종교입니다.”

불교의 교리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緣起이다.

“시공간 밖에서 일어나는 사태는 연기론에서는 인정이 안됩니까?”
“인정될 수 없습니다.”
“연기는 과학입니까?”
“그렇습니다. 불교는 과학입니다.”
“불교는 마음의 과학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심리학이라고 해도 좋겠군요.”
“심리학이라 말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지요. 불교는 심리학입니다.”

달라이 라마의 답변은 단호하고 간결하다.

“과학적 진리도 상대적 진리일 뿐입니다. 성하께서는 절대적 진리가 잇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적 진리는 없습니다. 물론 불경에 보면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 이 따위 말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불타의 깨달음이 연기인 한 절대적인 진리는 없습니다.”

불교에는 기독교처럼 절대진리를 선포하는 교리가 없다. “마치 절대적 진리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이 우주에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공포감이나 중압감의 포로가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기독교 일신론 사유가 지어낸 서구적 발상의 일대오류라 생각합니다.” 연기론을 확장한 空은 이러한 사유를 절대를 실체로 만든 유아론이라 말한다.

불교에서 절대적인 것은 없기에 지혜와 지식은 같이 가야만 한다. “저는 감정과 본능에 치우친 신앙심과 자비심은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누누이 역설해왔습니다. 궁극적으로 감정과 이성은 인간에게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의식쳬게의 소산이며 영적 수행에 지성의 역할은 너무도 중요한 것이비낟. 그리고 물론 지혜와 지식은 이분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혜를 증가시키지 않는 지식은 결코 지식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이런 말을 한다. “지식이 곧 지혜라는 신념은 나의 체험적 소산이며 그러한 생각에는 동요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현상적 일원론입니까?”
“물론입니다. 모든 일원론은 현상론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서양철학의 한계는 현상 그 자체를 무시하고 들어간다는데 있습니다. 이것또한 기독교와 관련된 사유체계가 파생시킨 뿌리 깊은 오류이지요. 우리가 살고 잇는 현상은 허깨비 같은 것이며 가치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뿌리깊은 경시가 모든 오류를 파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일원론은 현상적 일원론밖에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불교의 핵심은 不二입니다.”

명쾌하다.

“불교를 심리학이라 하셨는데 그 심리학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입니까?”
“마음의 평화입니다.”

여기서부터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논쟁이 시작된다. 마음의 평화는 열반을 쉽게 말해준 것이다. 문제는 윤회이다.

“”열반이 마음의 상태라 하신다면 우리가 열반적정의 마음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면 번뇌도 곧 보리가 되는 것이르므로 윤회도 사라져 버릴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의 상태에 이르든지 그 마음의 상태가 윤회하는 것입니다. 윤회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윤회를 사라지게 하는 것은 해탈이라 구분한다. 그러면서 “윤회는 사실입니다.”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장시간에 걸쳐 불교교리사에 등장하는 윤회에 대한 복잡한 논쟁이 둘 사이에 재연된다.

도올의 마지막 질문은 깨달음에 관한 것이다. “성하 당신은 정말 깨달으셨습니까? 정말 깨달으셨다면 그것을 저에게 전달해 주실 수 있습니까?” 모두 궁금해할 질문이다.

“지금 내 몸은 예순하고도 일곱해가 된 몸입니다. 그런데 나의 정신, 나의 생각은 항상 맑고 깨끗합니다. 저는 자라나면서 어느 순간엔가 空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갑자기 세계가 넓어지더군요. 뭔가 이 우주와 인생에 대해 조금 알듯햇습니다. 그러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공이라는 진리는 내가 살아가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물 전제를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자비를 깨달았습니다. 깨달음을 물으신다면 이 공과 자비를 통해 무엇인가 조금 이 우주와 인생에 대해 통찰을 얻었다는 것, 그런 것으 말씀드릴 수 있을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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