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 - 지금 미국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 52
김광기 지음 / 동아시아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2010년 8월 조지아주 애틀랜타 시 인근의 이스트포인트. 실직자를 위한 공공임대주택 신청서를 배부하는 날이엇다. 35도가 넘는 더위에도 3만명이 넘는 시민이 북새통을 이뤘다. 혹시라도 앞으로 나올 공간을 위해 단지 신청서만 배부하는데도 소동이 벌어졋다. 이날 62명이 부상했고 20명은 입원했다. “이날 신청서를 얻으려 모인 사람은 시 인구의 2/3가 넘는다. 신청서를 거머쥔 한 시민은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 입주 당첨권도 아닌데 말이다. 그것만이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던 곳에서 쫓겨났거나 곧 쫓겨날 처지가 대부분이다.” 금융위기가 불거지고 미국의 노숙자는 30% 늘었다. 미국인 200명 가운데 1명이 노숙자이다.

미국은 중산층의 나라였다. 인구의 60% 이상이 중산층이엇고 “중산층이 두껍기에 너도 나도 기회만 닿으면 미국에서 살고 싶어아는 아메리칸 드림을 양산햇다. 그러나 그 명성은 이제 과거의 일이다.” 지난 한세대 동안 미국의 중산층은 녹아내렷다. “2009년 미국인의 61% ‘항상, 또는 늘’ 하루벌어 하루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실직하면 바로 빈곤층으로 전락한다.” 임대주택 신청서가 유일한 희망이 된 이유이다. 하루하루 연명하며 “사는 이들이 2007년 43$%, 2008년 49%였는데 2009년에는 더욱 상승했다.” 미국인 대다수가 “벼랑 끝 생활을 하는” 것이다.

구직포기자는 제외하는 공식실업률이 아니라 실질적인 실업자를 모두 포함하는 U-6 실업률은 2009년 16.2%, 2010년 16.7였다. 게다가 “새직장을 얻었다 해도 절반 정도는 최저임금을 받는 단순 노동직임”에 불과하다. “40%가 넘는 미국인이 지금 최저임금을 받는 단순 서비스 직종에 종사한다.” 실업률이 높을 때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경력이 없는 청년들이다. “청년실업률은 53.4%로 2차대전 이래 최악이다.”

“워싱턴총영사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영어강사 취업을 위해 한국비자를 신청한 사람은 380명으로 이 가운데 68명이 미국의 100대 대학 안에 포함되는 명문대 출신이엇다. 하버드대와 뉴욕대, 듀크대, 등 일류대학 출신도 포함돼 있었다. 예전엔 아무리 번듯한 직장을 준다고 해도 한국행은 그들에겐 한 치도 고려할 가치가 없었다.” 그런데 상황이 변했다. “현재 미국의 처절한 경기 침체 때문이다. 경제위기는 실업률과 직결된다.”

그러다 보니 “2009년에 미국인 8명 가운데 1명이 먹을 것을 위해 정부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으며 그중 600만명이 수입이 없어 푸드 스탬프만으로 연명하고 있다.”

미국인에게 식량이란 고기이다. 최소한 미국에선 “먹을거리 그것도 육류 값이 무척 싸서 아무 지장없이 고기를 먹을 수 잇엇다.” 그러나 이젠 먹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먹지 않을 수는 없으니(고기를 먹지 않을 수는 없으니) “대신 스팸 소비가 늘었다. 스팸 제조회사의 주가는 연일 상종가다. 그나마 유사육류인 스팸으로라도 고기맛을 보는 사람은 다행이다. 그마저도 먹을 수 없는 사람은? 그래서 지금 미국인들은 닭을 키운다.

여기저기서 닭을 키우는 바람에 닭들이 시도때도 없이 울어대 참을 수 없는 소음을 자아내고 닭들이 싸우는 소리에 밤잠을 설치는 주민들의 민원이 제기되자 한 가구당 한마리만 키우는 조례가 발동된 곳도 있다. 2009년 9월 LA 시의회가 통과시킨 조례이다.

그런데 이런 추세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이 있다. 가정에서 닭을 치는 것이 반드시 비용절감만은 아니다. 비용을 생각하면 병아리 사육은 그렇게 큰 경제적 이득은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일까?

미국인은 지금 다른 것은 몰라도 총과 닭 그리고 씨앗을 사려고 안달이다. 그것들은 미국인들이 유사시에 의지할 최상의 방책이라 간주하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느끼는 심리적, 물질적 위기는 도를 넘어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닭을 키우는 것은 생존을 위한 자립심의 발로라는 상징적 의미이다. 여기서 자립심이란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고 의지하지 않는 생존능력을 말한다. 닭을 키우는 것은 정상적인 사회의 그물망이 해체되고 타인의 도움을 유기적으로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택한 최후의 전략이다.

이런 위기감은 기분 나쁜 징조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직장에서 쫓겨났고 살던 집에서도 쫓겨날 수 있으며 호주머니와 은행에 모아둔 돈도 없다. 이럴 때 나를 도와주고 지원해줄 국가도 빈털터리다. 내가 믿고 의지할 이는 어디에도 없다. 이제 내가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 비상식량부터 챙기자.”

“경제적인 실패는 사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미국만이 가진 그리고 미국인만이 소유한 소중한 무엇이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유학시절 주유소에서 겪은 일이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아무리 지갑을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당황한 필자는 주유소 직원에게 시계와 운전면허증을 건네주며 사정햇다. 그리고 곧 가지고 오마했다. 그랬더니 주유소 직원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면 시계와 면허증을 돌려주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지불하면 되고 이런 것은 필요없단다. 단골 주유소도 아니라 안면도 없었다. 그런데 필자를 믿어준 것이다.

그랫던 미국이다. 정직, 정의, 공평성을 바탕으로 신용이 미덕이 되는 신뢰사회가 미국의 자랑이엇고 힘이엇다.”

저자는 미국의 위기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본다. “진정한 위기는 바로 신뢰 증발의 위기다.” 모르는 사람을 만날 수 밖에 없는 대규모 사회에서 남을 믿을 수 없다면 그 사회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이든 사회가 돌아가려면 신뢰가 있어야 한다. 저자는 사회적 신뢰를 두가지로 구분한다. 먼저 중국, 일본, 한국 사회의 신뢰는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맺어지는 신뢰다. 그러한 기준으로 나누어지는 집단 구성원들끼리 지닌 신뢰다.” 그예로 저자는 한국 대학들의 자기대학 출신 교수(여기선 학부가 중요하다) 비율이 높은 것을 든다. 자기 대학 출신을 뽑는 것은 밥그릇 싸움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보다 큰 이유를 신뢰의 문제라 본다. “자기 대학 출신만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당파싸움도 마찬가지라 말한다. 지연, 학연으로 뭉쳐 밥그릇 싸움을 한 당파싸움이나 교수자리의 밥그릇 싸움이나 다를 것은 없다. “아담 셀리그만은” 이런 신뢰를 “확신(confidence)”라 말하며 저자가 미국 주유소에서 경험한 신뢰를 “신뢰(trust)라고 부르며 명확히 구분하다.”

확신의 전형적인 예는 일본의 ‘이에(家)’이다. 나카네 지에는 '우리'란 말의 의미는 두가지 원리에 의해 말들어진다고 말한다: 자격(attribute)와 場(frame).

자격은 혈연, 지연, 학연, 직업, 계급, 계층 등과 같은 개인이 가진 속성을 말하며 場은 공간적 테두리를 집단을 만드는 기준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두가지 원리 모두 어느 사회에나 보편적이다. 그러나 두 기준이 동등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두 기준이 어느 정도로 섞이는가에 따라 사회를 구분할 수 있다고 나카네 지에는 말한다.

자격과 장의 두 기준으로 사회의 스펙트럼을 만들어보면 인도와 일본이 양극단에 있고 다른 사회들은 그 중간에 있다고 나카네 지에는 말한다.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자격을 기준으로 한 집단구성의 전형적인 예이다.

"인도의 농촌에서는 친정집에 가서 장기간 머무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수시로 형제가 방문을 하고 원조를 받기도 하며, 고부간의 싸움을 옆집에 들릴 정도로 크게 하여 그것을 듣고 같은 카스트에 있는 옆집의 시어머니나 며느리가 응원을 오기도 한다. 다른 마을에서 시집 온 며느리끼리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은 일본의 여성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돈독한 것이어서 부러울 정도였다.. 이것은 며느리라는 같은 자격을 가진 사람들의 사회적 기능이 발휘되어 '이에'라는 테두리와 교착하면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반대로 '아이들 싸움에 부모가 나선다'는 식으로 완전히 반대의 경향이 존재한다." (나카네 지에)

일본에선 며느리나 카스트같은 자격은 시집을 오면 사라진다. 같은 공간에 살면서 경제적 공동체가 되면 일본에선 '우리'의 한 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릴사위제도는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며느리는 고달프다. "일본에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문제는 '이에' 안에서만 해결되어야 하는 것으로 학대받는 며느리는 자시의 친형제, 친척 내지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원조를 받지 못하고 혼자서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집을 갔으면 이전에 속했던 '이에'에선 탈퇴하고 다른 '이에'에 속하게 된 것이므로 다른 '이에'일 뿐인 친정사람들은 도와줄 이유도 없고 도와주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주유소에서 경험한 신뢰는 확신과는 다르다. 이 신뢰는 ‘우리’란 말이 붙을 수 없는 사람에게도 주어진다. “낯선 이들끼리 일단 믿어주고 시작하는 신뢰를 말한다. 따라서 이 신뢰는 아슬아슬한 신뢰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신뢰가 절실히 요구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과거 전통사회에서 보이던 끈끈한 집단이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설사 그런 것들이 존재할지라도 그들만 서로 위하면서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넓어졌고 복잡해졋기 때문이다.

서양의 사회학자들은 동양사회를 저신뢰 사회, 즉 신뢰할 수 없는 사회로 규정했었다 맞는 말이다. 솔직하게 말하자 우리 사회가 이렇지 앟은가. 얼마나 연줄을 좋아하면 연줄의 대명사인 대학 간판을 따려고 젊은 시절을 그토록 허비하고 잇지 않은가.”

저자는 미국의 진정한 힘은 바로 신뢰엿다고 말한다. “필자가 걱정하는 바가 이것이다. 미국인들 사이의 믿음은 후자의 신뢰엿다. 학연, 혈연, 지연으로 끈끈하게 맺어지는 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많은 인종과 민족을 바탕으로 하는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신뢰가 사라진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피부색, 말, 밥 먹는 문화도 각양각색이다. 아무런 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 곳에 과연 사회가 남아날까?”

학계에 더 널리 쓰이는 말로 하자면 저자는 사회적 자본의 고갈을 언급한 것이다. 미국의 사회적 자본이 바닥났다는 지적은 퍼트넘의 ‘Bowling Alone’이란 책으로 대중화되엇다. “사회적 자본을 가진 네트웤의 특성은 그 속의 사람들이 반복적인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자본은 접촉의 스포츠와 같다. 하회적 자본을 가진 네트웤의 전형적인 예로서 주민모임, 자선단체, 종교단체, 스포츠팀, 사교클럽, 시민단체,동호인 모임, 볼링 리그 등이 있다. 회사와 직장 역시 중요한 사회적 자본의 원천이다.” (에릭 바인하커)

사회적 자본의 예로 많이 인용되는 퍼트넘의 이탈리아 남부 연구를 보자.퍼트넘은 남부 이탈리아의 푸글리아 지역 관공서 방문 경험을 이렇게 기술했다: “침침한 대기실에 몇몇 나태한 공무원들이 서성대고 있다. 그들은 하루에 한두 시간밖에 출근하지 않지만 민원인의 요구에 대응하지도 않는다. 자주 가는 민원인들은 건너편 사무실에 놓인 텅 빈 책상만 보게 된다. 이러한 지방 공무원을 일하도록 만들 수 없는 자신의 무능을 개탄한 시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엿다. ‘그들은 편지에 회신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

퍼트넘은 북 이탈리아 에밀리아 로마냐의 관청을 이렇게 소개했다: “유리벽으로 되어 있는 자방관청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현대식 첨단 기업을 방문하는 것과 같았다. 활달하고 예의바른 안내원이 방문자들을 사무실로 안내하였고 공무원들은 전산화된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하여 지역의 문제나 정책에 대해 잘 설명했다. 많은 분야에서 입법을 선도한 에밀리아 정부는 약속을 실천에 옮겼으며 정부정책의 효과는 수십개에 달하는 어린이 보육센터, 산업단지 공연장, 직업훈련원 등으로 설명된다.”

퍼트넘은 두 관청의 차이를 그 지역의 사회적 자본의 차이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대규모 협력을 실행할 수 없는 낮은 신뢰성”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탈리아 남부 사회는 극도로 원자화되어 있어 모든 협력적 노력이 가장 작은 사회적 단위인 가족에서만 이루어진다. 사촌 같은 친족과의 관계는 물론 때로는 성인이 된 형제자매와의 관계에서도 신뢰와 협력을 찾아볼 수 없다. 공동체 차원의 협력적 노력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밴필드는 이런 유형의 사회를 ‘무도덕한 가족주의’라고 부르고 그 기본 철학을 이렇게 정의했다. ‘핵가족이 단기적으로 얻을 수 잇는 물질적 이익을 최대한 얻어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럴 거라고 생각하라.’ 이것은 악당의 철학이다. 사회가 사회로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사회라고 부르는 것조차 사태를 오도할 수있다. 그것은 사실 원자화된 핵가족의 집합체다.” (피터 터친)

그에 비해 “이탈리아 북부 사람들은 훤씬 많이 네트웍화되어 잇다. 합창단과 산악회, 문학 서클, 사냥 클럽 같은 시민들의 모임이 훨씬 촘촘하게 짜여잇다. 공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과 공적인 원인에 대한 헌신도 같은 양상을 보인다.

시칠리아의 마치아와 자매 조직인 나폴리의 카모라는 늘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북부에는 그와 비슷한 것이 없다. 마피아는 만연한 신뢰 부족에 대한 사회적 대응으로 생긴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부족한 곳에는 보호에 대한 수요가 많다. 마피아는 보호를 젝5ㅗㅇ해주는 개인 사업가이다. 메초조르노에서는 절대 기업을 할 수없다. 잠재적 파트너도 기회만 있으면 속이려 들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애초에 그런 위험에 자신을 노출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마피아에 의존해 계약을 이행하도록 강제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마피아는 그런 역할을 했다.” (피터 터친)

그러나 북부 이탈리아에 사회적 자본이 풍부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탈리아에서 “성공하는 기업은 일반적으로 가족이 소유하고 직원이 100명쯤 되고 밀라노나 볼로냐에 있다. 그런 기업들은 패션에서 정밀기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틈새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국제시장에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은 규모의 이점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북부에서도 중간규모의 집단에서만 협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터 터친)

피터 터친은 그 원인을 로마제국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터 터친은 서로마제국은 사회적 자본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에서 사회적 협력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멸망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회적 자본의 “블랙홀이 로마제국의 핵심지역에서 발생했다. 제국이 붕괴된 두에 이탈리아 북부에는 6세기의 랑고바르드족을 비롯해 몇 차예나 게르만족이 밀려들었다. 이 이주민들은 아사비야(피터 터친이 사회적 자본 대신 쓰는 이븐 할둔의 용어)가 높은 사회에서 왔고 따라서 이들의 유입은 제국 때 생긴 남북의 차이를 더욱 강화햇다.”

퍼트넘은 ‘Bowling Alone’에서 미국의 상황이 이탈리아 남부를 닮아간다고 우려한다. “’우리는 갈수록 가족과 친구, 이웃, 사회조직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사회조직은 학부모회든, 교회든, 레크레이션 클럽이든, 정당이든, 볼링연맹이든 마찬가지다.’ 30년전에는 지금보다 두 배는 자주 친구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햇다. ㅎ사회적 신ㄹ회도 감소하는 것같다. 분명히 워싱턴에 있는 정부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계속 줄엇다. 1950년대에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70%에서 80%였는데 1990년대는 30%에서 40%였다. 미국사람들은 45%가 신문을 거의 또는 전혀 믿지 않아 20년 전의 16^에서 크게 증가햇다. 퍼트넘이 하고자 하는 말은 개인이 갈수록 고립된다는 것이다. 차에서도 혼자 잇고 일도 혼자 하고 이혼하고 형광등 불빛 아래서 혼자 볼링을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것은 어떤 사회에서나 위험이 임박했다는 신호다” (피터 터친)

퍼트넘과 후쿠야마는 상당히 복합적인 이유들을 들고 있다. 피터 터친은 그 이유들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불평등의 증가를 말한다.

퍼트넘과 후쿠야마는 미국의 사회적 자본이 고갈되기 시작한 시점을 1960년대로 말한다. 그리고 미국의 불평등 역시 “1960년대가 분기점이다. 그전에는 미국에서 불평등이 줄어들고 잇엇는데 그 뒤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몇십년동안은 일반 노동자의 봉급과 CEO의 보수 사이에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1970년부터 하위 20% 노동자의 봉급은 그대로여서 사실상 줄어들고 있다. 마태원리가 풀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물가상승률은 모든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사려면 큰돈이 들어가는 많은 것들, 그중에서도 특히 집값과 교육비, 의료비는 훨씬 빠르게 증가했다.”

피터 터친은 제국의 붕괴를 사회적 자본(그의 용어로는 아사비야)의 고갈이 원인이라 말한다. 불평등이 증가하면서 제국이 만들어지도록 했던 사회적 협력이 사회적 경쟁으로 바뀌면서 집단협력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들이 무너지면서 사회적 자본이 고갈되기 때문이라 말한다.

피터 터친은 미국의 학벌사회화를 그 예로 든다. “교육에서 나타나는 경향들이 특히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엘리트증 내부의 경쟁을 가장 잘 말해주는 것 가운데 하나이기때문이다. 미국에서는 20세기에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들의 수가 계속 증가햇다. 20세기 말에는 대학을 졸업하는 것만으로는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일자리 시장을 뚫고 들어가기에 충분하지 않아 박사 학위를 따는 대학 졸업자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햇다. 박사 학위 값은 박사 학위를 마치는데 걸리는 햇수로 치면 더욱 빠르게 증가햇다. 1967년부터 1995년까지 박사학위를 마치는 데 드는 평균 시간이 자연과학은 6년에서 8.4년으로 사회과학은 7.7년에서 10.5년으로 인문학은 12년, 교육학에서는 무려 19.9년이다.

이런 흐름들은 위기가 오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이며 엘리트층 내부의 경쟁이 심해지고 잇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성인들이 익숙한 수준의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 갈수록 더 많은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피터 터친)

조선후기의 당쟁은 엘리트 내부의 경쟁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잘 보여준다. 마찬가지 현상이 미국에서 나타난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의 유명 토크쇼 진행자, 앵커맨과 앵커우먼들의 학력을 보라.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곳 출신이 대다수이고 고졸, 중퇴자도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런 일이 가능한 곳이 미국이엇다. 우리처럼 번듯한 학교 간판 하나만 가지면 실제 능력 없이도 행세하는 나라가 아니엇다. 많이 배운 자나 못 배운자나 능력에 맞게 케이크를 적당히 나누어 가질 수 잇는 곳이 미국이엇다. 이런 풍토가 요즘 급격히 바뀌엇다. 나눠 먹을 케이크를 소수가독점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 소수는 죄다 동부의 아이비리그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돈다. 이런 와중에 나온 것이 학벌주의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또는 그런 곳으로 많이 보내는 명문고교에 보내기 위해 사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미국에서는 없던 풍경이다. 하지만 이것이 보인다는 것은 미국이 그만큼 달라졌음을 방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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