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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스미스 W. Eugene Smith ㅣ 열화당 사진문고 12
샘 스티븐슨 지음, 김우룡 옮김, 유진 스미스 사진 / 열화당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한 말이다. '언젠가 스미스가 사진 대학에서 강의할 때 들을 기회가 있었다. 가으이 마지막에 가서 학생이 항의했다. 사진 얘기는 한마디도 없었고 강의 시간 내내 음악 얘기만 했다. 스미스는 한 인간에게 아주 소중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가치가 있다는 말로 학생을 진정시켰다."
유진 스미스에게 음악은 중요했다. 2차대전 때 종군사진가로 일할 때도 음악을 들어야만 했던 그에게 음악은 사진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는 종종 그의 사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음악이엇다고 말햇다. "음악적 질서를 불어넣기 위해 내가 음악을 의도적으로 이용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간단히 말해 음악은 나의 스승이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관점이다. 모든 예술은 음악을 지향한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아니더라도 공간의 예술인 사진에 시간의 예술의 관점을 접목한다면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사진 강의에서 사진은 말하지 않고 음악만 말한다는 것은 그에게 문제가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스미스가 대학에서 강의를 한 것은 미국의 저널리스트들이 대개 그렇듯 자신의 경력이 끝났을 때였다. 1960년대 내내 스미스는 대학과 강연회에서 강의를 했다. 그 당시 이미 스미스는 대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직 사십대 중반의 스미스는 애가조의 회고를 거듭하면서 마치 그의 경력이 이미 끝나 버린 것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학생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다. ''라이프'에서 박하고 나오고서도 포토에세이스트로 활동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스미스는 머뭇거리다 이렇게 말했다. '글쎄..., 흠..., 그건 나도 잘 알 수가 없어요.'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스미스 특유의 유머엿다. 학생들은 예상 밖의 이 대답에 크게 웃었고 스미스도 웃었다." 그러나 그의 유머는 그의 진실이었고 그의 웃음은 텅 빈 웃음이었다.
라이프의 촉망받는 사진기자였지만 스미스는 편집진과 갈등이 많았다. 물론 사진작가와 잡지사의 갈등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스미스 만의 문제도 아니다. 라이프 등의 유력 잡지사들과 일했던 베르너 비숍은 잡지사와의 작업을 "끔찍했다"고 말햇다. "비숍은 자신이 생각한 바에 따라 문제를 최대한 강하고 분명하게 드러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잡지사는 이익을 올리고 싶어햇다. '편집진과 다른 구매자들이 사진 속의 불쾌한 진실에 손질을 가하고 별 신통치 않은 이유로 톤을 약화하고 독자들에게 영합하기 위해 그것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을 때 그는 아주 기분 나빠 했다.' 사진에 대한 해석을 오도하는 왜곡된 설명과 기사, 엉망으로 잘리고 뒤집힌 사진들, 정치적 편향과 멜로 드라마적 이미지를 요구하는 취재지시 등, 편집과정에서 그의 사진과 관점에 가해지는 모욕에 비숍은 몹시 괴로워했다." (클로드 쿡맨)
언뜻 보면 스미스와 라이프 지의 갈등 역시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리고 그 갈등은 비숍처럼 투덜 투덜 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편집권에 대한 도전으로까지 격상되었다. 스미스가 라이프의 잘 나가는 지위를 박차고 나온 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비숍과 달리 스미스의 도전은 도가 지나쳤다. 스미스의 경우엔 잡지사로선 참을만큼 참았다고 두둔할 수 밖에 없다.
"스미스의 방식은, 언제나 첫 사진을 찍기 전 며칠 또는 몇 구간 그 지역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곳 사람들과 섞여 지내는 등 대상에 대한 사전 이해의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이엇다. 촬영할 대상과 아주 친근해지는 한편으로 그 대상과 배경에 아예 녹아 들어감으로써 거부감이 없어지도록 최대한 노력한다는 태도였다. 객관적 태도를 냉정히 견지한다는 저널리즘의 원칙을 엎고 스미스는 어떤 경우에라도 대상과 자신의 거리감을 없애려 애를 썼다. 개인적 거리감이든 직업적 거리감이든 그에게는 없애 버려야 할 적일 뿐이었다. 스미스에게 한 장의 사진은 그가 보고 느끼고 겪었던 바로 그 이미지엿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보았던 그 순간 그대로를 생생히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
이런 사진가이니 유명해지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대학 졸업장도 없는 그가 라이프 지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전쟁사진 때문이엇다. 그의 전쟁사진은 간결하면서 요점이 분명하면서도 생생하다. 아마도 그의 작업 방식은 병사들과 함께 전장을 누비면서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작업방식이 문제엿다. "'라이프'에 있는 동안 쉰 건 이상의 프로젝트를 맡았지만 스미스와 잡지사와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잡지의 편집진은 사진가의 역할이 네거티브를 만드는 것에서 끝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엇다. 스미스는 그 네거티브로부터 제대로 된 프린트를 만들고 그것을 지면에 배치하는 것까지 사진가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어떤 편집자가 시인에게 묻지 않고 시를 뜯어고칠 수 있단 말인가. 사진이 시와 달리 취급되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라고 편집진에게 요구했다. 기사 하나가 나갈 때마다 격렬한 갈등과 최후통첩의 말이 오갔고 어쩔 수 없는 최소한의 타협이 있은 후에야 겨우 지면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사진은 감동적이었고 아름다웠으며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거기까지였으면 어떻게 타협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미스의 집념 나쁘게 말하자면 편집증이 더 큰 문제였다.
예를 들어 “1952년의 작업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1953년 작업인 ‘미시간 주의 이주 노동자’의 경우 스미스는 수개월을 들여 수백 점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 잡지가 필요로 하는 것, 또 청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이엇고 비용은 모두 ‘라이프’가 지불했다. 두 작업 모두 겨우 잡지의 몇 페이지를 채울 기사엿다.”
그의 작업은 놀라웠지만 그 작업의 뒤에는 인간의 폐허가 있었다. “라이프의 강력한 채널을 통해 스미스야말로 함게 일하기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퍼져났다. 당시의 스미스는 잡지사가 기다리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프린트 하나를 만들기 위해 휴식 없이 며칠을 매달리곤 했다. 나아가 사진에 대한 이런 강박적 몰두와 약물 의존으로 일상생활 역시 황폐해졌다. 갈수록 작업실에서 보내는 날이 많아지고 네 아이들과 아내가 잇는 집에서는 점점 멀어졌다. 1950년 9월 그의 불후의 명작 ‘스페인 마을’ 작업 도중 지친 스미스는 팬티 바람으로 작업실 앞길을 돌아다니다 경찰에 체포된다. 그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몇주간 치료를 받아야 햇다.”
가족을 팽개치고 나와 살던 맨해튼의 로프트에 자주 들렸던 드러머 로니 프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마치 미친 과학자 같았다. 그가 자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앉아 잇는 것마저 본 기억이 없다. 언제나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의 완벽주의 또는 강박증을 잘 보여주는 예는 ‘불타는 코크스와 춤을(1955)’일 것이다. “피츠버그 작업에서의 걸작 인화인 이 사진에서 “한 노둥자가 코크스 가마 위에 두껑을 덮고 잇다. 인간과 인간이 만든 문명 사이의 의문 가득한 관계성이 이사진에 드러나 잇음을 본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 사진의 압도적인 충격은 스미스 사진 인화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된다.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완벽주의자 스미스는 프린트 하나를 위해 버닝, 닷징, 블리칭을 평균 백오십 회가량 햇다고 한다. 때론 프린트 하나에 수일이 걸렸다. 이 사진을 보면 전설은 사실일 것같다.”
라이프를 박차고 나와 매그넘과 손을 잡은 후에도 그의 극단성은 도를 더해갔다. “매그넘에서 첫 작업은 피츠버그 시를 촬영하는 일이었다. 역사가이자 저명한 편집자인 슈테판 로란트가 피츠버그 시 이백주년을 기념하여 발간되는 대형 간행물을 시민 대표 자격으로 맡았다. 스미스는 이 간행물 가운데 현대 피츠버그 시에 대한 한 대목을 맡아 삼 주간의 예정으로 백 점의 사진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스미스는 그의 작업방식대로 “첫 한달을 이리저리 도시를 배회하고 그 역사를 찾아 읽고 가능한 모든 것을 입력하는데 보냈다. 그리고 거의 한 해를 피츠버그 시를 찍는데 바쳐 만삼천 점의 네거티브를 얻었다. 라이프에서의 싸움과 다를 바 없는 전쟁을 로란트와 치른 후 스미스는 수백점의 프린트를 넘겨주고 작업을 마무리짓는다.” 그러나 피츠버그 프로젝트는 스미스 자신의 과업이 되어 이후 3년을 바치고도 마무리 짓지 못한다.
이러니 아무리 그가 대가임을 알아도 그에게 일을 맡기려 하지 않았고 스미스는 가난과 싸워야 했으며 60년대에 들어서면 과거의 영광을 되씹으며 대학 강의실을 떠도는 보따리 장수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진기를 평생 놓지 않았다. 돈이 되건 안되건 알아주건 말건 찍고 또 찍었다.
“1975년 12월에 스미스의 주치의가 그의 상태에 대해 써 놓은 한 통의 소견서가 남아 잇다. 쉰일곱의 스미스는 이때 ‘당뇨병, 간경화, 심한 고혈압, 정맥류, 울혈성 피부염, 심혈관질환, 관상동맥질환 그리고 심장비대증’을 앓고 있었다. 주치의는 ‘금주’하라는 명령으로 자신의 소견을 맺는다.. 스미스가 의사의 소견을 마움에 두엇는지는 의문이다. 친구들은 스미스가 뉴욕을 벗어나 보다 안정되고 건강한 환경으로 옮기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음을 알고 잇었다. 거의 잠을 자지 않고 광적으로 일하는 습관, 알코올과 약물의존, 그리고 다른 여러 위험한 강박 상태가 그의 몸을 근 삼십년 동안 짓눌렀다.” 친구들의 주선으로 애리조나 대학의 강사직을 맡아 옮겨가게 된다. 그러나 일년을 넘지 못했다. 1978년 편의점에서 고양이 먹이를 사던 스미스는 심장마비로 급사한다. 쉰아홉이엇다.
매그넘 갤러리
http://www.magnumphotos.com/Archive/C.aspx?VP=XSpecific_MAG.PhotographerDetail_VPage&pid=2K7O3R139C2T&nm=W.%20Eugene%20%20Smi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