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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와 역사
랜디 체르베니 지음, 김정은 옮김 / 반디출판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약 500년 전에는 따뜻한 날보다는 추운 날이 훨씬 더 많았다. 1500~1850년까지의 소빙하기에는 유럽과 북아메리카 동부에 걸쳐 지속적으로 대단히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역사학에서 이 시기의 소빙하기는 중요하게 언급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시기 소빙하기는 태양흑점의 감소 때문이다. 태양흑점이 감소하면 태양에서 지구로 오는 복사에너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17세기 후반에 걸쳐(기본적으로 1645-1715년까지) 흑점의 활동이 대단히 분명하게 그리고 예기치 못하게 사라졌다.”
기후학에서 1645-1715년 사이의 기간을 마운더 극소기라 부른다. 흑점활동에 따른 기온의 냉각이 중요한 이유는 농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17세기 소빙하기 이전 흑점주기로는 1400-1510년의 슈뢰퍼 극소기, 1280-1340년의 볼프 극소기가 있다.
볼프 극소기 직전에 중세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12세기 르네상스가 있었다. 이 시기가 끝난 것은 보통 흑사병 때문이라 본다. 그러나 저자는 흑사병의 유행보다 볼프 극소기로 들어선 것이 12세기 르네상스의 종식의 더 큰 원인이라 생각한다.
슈뢰퍼 극소기 역시 중요한 시기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겹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본질적으로 경제의 장기순환에서 하강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낮은 이윤율에 시달린 자본이 생산적인 투자로 돌려지지 않고 과시적인 소비에 돌려졌으며 그 소비가 르네상스의 자금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종교개혁과 30년 전쟁 같은 전란의 시기였다.
마운더 극소기에 “지구의 기온은 오늘날에 비해 1.5도 정도 더 낮았다. 혹독하게 추었고 서구문명에서 전쟁과 혁명이 많이 일어났던 시기와 맞물린’다.
당시는 대항해시대이기도 햇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폭력의 일반화 혹은 폭력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이전 시대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이상사회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군사기술과 무기가 더 발달하고 군사력이 훨씬 강력해졌으며 또 그렇게 강화된 군사력을 더욱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소위 ‘군사혁명’이 일어난 유럽의 근대는 전쟁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발전한 폭력은 곧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세계 여러 문명의 조우는 불행하게도 평화적이시보다는 대개 폭력적이었다. 유럽의 팽창 자체가 우선 무력 사용이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다른 대륙의 이질적인 문명권 안으로 뚫고 들어가기 위새서 무엇보다도 강한 무력을 갖추어야 한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아에 거주했던 포르투갈 인의 보고에 의하면 1502년 바스코 다 가마가 캘리컷에 도착했을 때부터 벌서 가공할 폭력성을 드러냈다. 그는 무슬림 선단을 격침한 다음 800명의 귀와 코 손을 잘라서 캘리컷의 지배자에게 보내면서 카레라이스를 해먹으라고 말햇다고 한다. 그의 선단의 한 선장은 무슬림 상인을 채찍질하여 그가 실신하자 입에 오물을 넣고 돼지고기 조각으로 입을 막음으로써 종교적인 모욕을 가했다. 유럽인과 아시아 인 사이의 거의 첫번째 접촉부터 유럽 인들은 너무나도 폭력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앞세워 그들이 찾아간 해외 지역의 현지인을 지배 정복하거나 약탈과 해적 행위를 통해 직접 부를 취하기도 했으며 교역 행위를 할 때에도 무력 위협을 통해 유리한 위치를 점하였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여러 학자들은 전산업화 시대에 유럽 인들이 전 세계에 수출한 것은 다름 아닌 폭력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주경철)
유럽인들은 왜 그렇게 폭력적이엇을까? 지금의 유럽인들을 생각하면 떠오르기 힘든 이미지이다. 저자는 소빙하기가 그 일부를 설명할 수있다고 말한다. “소빙하기(1550-1850) 기간은 오늘날 보다 상당히 추웠다. 이런 혹독한 환경에 걸맞게 당시 유럽 문명은 문화적으로 대단히 요란하고 열광적이어서 식민지 확장, 혁명, 전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지구의 기후는 어떤 외부적인 변화에 하나의 단위처럼 반응하는 일이 대단히 드물다. 유럽 서부와 북아메리카 동부는 소빙하기 동안 오늘날보다 확실히 추었지만 중앙아시아 지역은 오늘날보다 비도 많았고 훨씬 습했다.” 그리고 아시아 대부분이 지금보다 온난다습했었다. 그 기간 동안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는 “폭동이나 반란이 거의 없었다.”
이 시기는 청나라의 통치기간과 일치한다. “소빙화기 5기간 동안 유럽의 혹독한 날씨와 대조적으로 중국에서는 여름과 겨울 모두 강수량이 오늘날의 평균 강수량보다 확실히 높았다. 소빙하기 동안 중국에 내린 풍부한 비는 특히 겨울에 많이 집중되었는데 그로 인해 계속 풍작을 이뤘고 그 결과 더욱 풍족하고 편안한 사회로 나아갔을지도 모른다.” 강희제로부터 시작된 한세기 반의 태평성대는 그런 기후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 비옥한 땅에서 인구가 엄청나게 늘었기 때문에 갑자기 비가 내리지 않으면 끔찍한 재앙이 될 수 잇었다.” 1850년 소빙하기가 끝날 때 중국의 기후는 건조해지기 시작햇다. 19세기 후반의 끔찍한 가뭄과 홍수는 청나라를 무너트리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청나라의 지도자들은 소빙하기 이후의 잇따른 환경 재해와 씨름하는 동안 갑작스럽게 증가한 서양의 영향도 감당해야 했다. 유럽국가들은 소빙하기를 거치면서 식민화와 산업화를 통해 성장햇다. 1550-1850년 동안 상대적으로 혹독했던 북미와 유럽의 기후 조건은 환경을 극복하는 수단이 되었던 기계의 발달을 촉진하는 데 부분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서구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대체로 중국에까ㅓ지는 이르지 않았다. 대신 소빙하기 이후 19세기 중반부터 후반까지 이어지는 가뭄과 기근으로 황폐해진 시기를 겪으면서 청나라의 지도자들은 유럽 열강들과 대단히 불평등한 조약을 연달하 체결해야 했고 중국은 식민지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국에서 청나라는 소빙하기 동안 상대적으로 다습한 환경에서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러나 이후 환경조건이 바뀌면서 이 다습ㅂ한 시기가 중국 역사에서 청나라의 존속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어느 정도 증명되었다. 그리고 이런 환경 변화 추세는 20세기에도 계속 이어졋다.”
이상은 이책의 자료를 근거로 소빙하기의 유럽과 중국사를 정리해본 것이다. 물론 위에서 정리한 내용은 이책에 소개된 것과는 다르다. 이책의 저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기후학자이기에 과학자로서 통계자료를 많이 제시하고(과도하지는 않고 쉽게 이해되는 수준이다) 기후학의 모델에 따라 당시의 기후를 재구성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그러나 위에서 정리해본 내용에서 이책의 성격을 짐작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책은 공룡의 멸종부터 원시시대 인류가 멸종의 위기까지 갔던 화산폭발, 그리고 인도의 인더스 문명, 마야문명, 고대 그리스의 암흑시대 등을 기후학의 시각에서 설명하고 가까운 시대에는 1930년대 더스트 볼이라 불리는 미국 대평원의 혹독한 가뭄 등을 다루고 앞으로 다가올 빙하기등에 대해 다룬다.
잡다하게 들릴 것이다. 이책이 얇은 책은 아니지만 그 많은 내용을 한권에서 다루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겠다. 그러나 이책은 전문서적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다. 위에서 소빙하기를 정리하면서 이책에서는 다루지 않는 사실들을 다수 삽입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책은 교양서적으로 의도된 것이다. 다양한 케이스들을 다루면서 기후학의 기초개념들을 이야기 속에서 쉽게 쉽게 이해하게 하는 것이 이책의 기본 의도라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그런 의도는 성공적이다. 이책은 아주 쉽게 재미있게 읽힌다. 기후학이란 분야에 거의 지식이 없는데도 이해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게 쉽게 잘 쓰인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