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중국은 서구를 위협할 수 없나 - 미국 MIT 최고 전문가 집단이 분석한 중국 경제의 실체
에드워드 S. 스타인펠드 지음, 구계원 옮김 / 에쎄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봄에 일어났던 축제와도 같은 시위에 거의 한 명도 빠짐없이 휩슬려 참여했던 중국의 도시 시민들은 피할 수 없는 정부의 탄압 앞에서 감정적으로 녹초가 되었으며 정신적으로도 패배감을 맛보고 있었다. 1989년 늦여름이 되자 중국 사회에는 공포라기보다는 심각한 사기 저하 분위기가 팽배했다. 중국은 다시 일어나기 어려워 보였다.”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 해는 개혁개방 정책이 10년째였다. 그러나 개혁개방은 어디까지나 사회주의를 보존하기 위한 개량이었기에 체제의 외곽에서 점진적으로만 진행되었다. 농촌에선 개혁개방이 실제였지만 체제의 근간인 도시에선 달라진 것이 없었다. 바뀐 것이 있다면 물가폭등, 부정부패 같은 것 뿐이다.

“20년 전에 중국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중국의 도시들에서 독특한 특징을 발견했다. 바로 어둠이었다. 당시 중국의 도시 중심가에는 가로등이 매우 적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명을 밝힐만한 활동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상점이 띄엄띄엄 보이긴 했지만 대개의 상점은 문을 일찍 닫았다. 식당, 국수집, 찻집 등의 서비스 시설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민간이 운영하는 운영하는 만두가게하도 문을 여는 날이면 금방 호기심을 끌었다. 외식을 할 수 잇는 장소! 뭔가 할 일! 새롭게 시도해볼 대상!”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을 때까지도 중국은 여전히 사회주의방식으로 조직되었고 운영되엇다. “당시 중국 사회에서는 오늘날의 시장, 지역사회, 사회적 네트웤을 구축하는데 기반이 되는 관계란 전혀 없었다. 사실 예전 중국의 도시 사회는 사업가 정신, 기업, 시민들의 상호작용, 더 나아가 사람의 이동 자체를 ‘방해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구조나 다름없었다. 국가에서 정한 제도적인 계층구조 내에서 철저히 통제를 받는 사회였으며 공산당 최고위층에서부터 일반 국민의 직장 깊숙한 곳까지 퍼져 있는 일련의 명령체계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였다.” 그러나 1989년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졋다.

천안문 사태를 진압하려면 피를 흘려야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나라 국민에게 총을 겨누고 탱크를 앞세우는 정부는 권력의 정당성을 그 순간 포기해야만 한다. 정부의 총 앞에서 무기력하게 된 것은 국민만이 아니었다. 총을 겨눈 정부 역시 무기력하게 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무력진압은 “시위자들의 주장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전통적 사회주의의 특징인 사회계약이 중국에서 이미 유명무실해졌다는 것. 국가에 대한 자부심, 국가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국민의식, 미래는 현재보다 밝을 것이라는 믿음,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주리라는 지도층에 대한 신뢰는” 그해 탱크 앞에서 사라졌다. 국민에게 총을 겨누었을 때 “사실상 사회주의 중국은 하나의 국가로서 일종의 사회적 질서로서, 정치체제로서 이미 수명이 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충격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해 두번째 위기가 나라 밖에서 날아왔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었다. “사회주의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라가 무너지지 않으려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그 무엇은 경제발전이 되었다. “덩샤오핑이 결연하게 경제발전을 ‘절대적인 규칙’으로 선언한 것도 바로 이러한 상황과 시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중국정부가 한 일을 저자는 ‘혁명이 없는 혁명’이라 부른다. 천안문의 충격 이후 개혁은 더 이상 “사회주의를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구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에 가까웠다.” 나라를 구할 수 있다면 공산당이 정권을 잡는다는 것 이외에는 무엇이든 성역은 없었다.

“이후에 이어진 혁명적인 변화들은 여러 측면에서 국민과 국가 사이의 손상된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엇다. 새로운 사고방식, 미래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분명하게 제시해줄 새로운 사상이 필요햇다. 지금 힘들더라도 꾹 참고 희생하면 국가와 국민이 모두 훨씬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고 국민을 설득해야 했다.”

방향을 잃고 필사적이 된 중국의 눈에 미국이 보엿다. 세계유일의 슈퍼파워가 된 미국, “19세기 후반 중국의 지식인들이 영국을 바라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20세기 후반의 중국은 호감을 갖든 그렇지 않든 활발한 개인주의, 협력을 도모하는 시민 정신, 역동성, 에너지가 모두 합쳐진 나라로 미국을 바라보았다. 미국은 적극성, 목적의식, ‘모든 잠재력의 실현’을 상징하는 나라였다. 반면에 톈안먼 사건의 혼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중국은 정반대엿다. 답답하고 조심스럽고 수동적이고 무기력했다. 중국은 연료가 다 떨어져버렸지만 미국은 프로메테우스와 같이 힘이 넘쳐흘렀다.”

이후 중국에선 “사회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구호가 사라지고 ‘현대화’와 ‘세계화의 궤도에 올라타기’라는 정부의 새로운 공식 목표가 그 자리를 대신햇다. 이 모든 노력을 포괄하는 것이 바로 현대적이고 완전한 시장경제를 구축한다는 목표였다. 100년 이상 추구해온 ‘현대화’라는 이상은 이제 시장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것도 단순한 시장이 아니라 서구의 선진국들이 정립해놓은 특정한 제도적 체계에 따른 시장이었다

덩샤오핑이 여러 번 강조했듯이 발전은 ‘절대적인 규칙’이었다. 그러나 이제 발전은 단순한 GDP의 성장보다는 현대화와 동의어로 간주되는 사회적인 제도 전체의 구축을 의미하게 되었다. 발전은 서구 선진국에게는 있지만 중국에게는 없는 모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자는 이런 상황이 100년전과 같다고 말한다. ‘세계화의 충격’이란 제목의 리뷰에서 다루었듯이 19세기는 동북아에 있어 정체성의 위기였다. 천하란 세계질서가 서구의 국제질서로 패러다임 변환이 일어난 시기였고 세계질서의 전환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정의해야 하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다. 천안문 사태를 전후한 중국의 사정 역시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1980년대에 사회주의의 개혁을 주친한 사람들의 노력과 마찬가지로 1880년대에 노후한 체제를 개혁하고자 했던 사회 지도층도 기존의 신념을 유지한다는 의지만은 분명했다. 이들은 사실상 유교의 핵심 가치를 거부하기보다는 오히려 유교적 가치를 다시 살릴 해결책만을 모색했다. 그러나 중국이 청일전쟁에서 처참하게 패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핵심 윤리가 희생되더라도 어떻게든 부와 국력을 쌓는 것으로 바뀌었다. 1990년대 초기의 사회주의처럼 유교의 정통성도 당시에 비판을 받거나 공식적으로 배척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궁극적인 목표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두 역사적인 시기를 비료하면 분명한 유사점이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으로는 국내에서 신념의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 외부에서 해답의 모색, 기존의 사회구조를 완전히 뒤엎을만한 외국의 제도적인 해결책을 직접 도입하려는 강력한 의지 등을 꼽을 수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말의 상황에서 공통적으로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외부의 강대한 국가가 정의한 현대화를 성취하려는 집3단적인 의무감과 국가 전체의 노력이다.” 그리고 저자는 현대화의 실제 과정을 ‘제도의 아웃소싱’이라 부른다.

“중국의 변화를 주도한 핵심요인은 바로 제도의 아웃소싱이었다. 중국은 미국과 같이 발달한 제도를 운영하는 나라의 제도를 아웃소싱햇다. 즉 사회적 규칙을 정의하는 권한을 제3자에게 이양한 셈이다. 세계적인 기업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중국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는데 그 이유는 보다 심층적인 측면에서 중국이 국내의 제도를 정의하고 그 결과 자국의 발전 방향을 형성하는 권한을 이런 해외기업들과 기타 외부의 주체들에게 신속하게 위임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국내산업 기반이 비약적으로 개선된 것은 물론이고 생산 효율이 대폭 향상되었고 기술이 발전했으며 경영 기술도 크게 개선되었다. 동시에 중국 산업은 지금까지 모든 것을 생산하는 독자적인 국가산업체제에서 벗어났다. 그 대신 주로 외국기업들이 주도하는 훨씬 커다란 글로벌 퍼즐의 한 조각, 또는 극히 일부분인 몇 조각을 제공하는 기업들의 집합으로 변모했다.”

중국이 혁명이 아닌 혁명을 하려 했을 때 우연히 세계는 세계화의 파도를 타고 있었다. 그 파도를 탄 중국의 경제발전은 일본과 한국이 고도성장을 하던 시절과는 조건이 달라져 있었다. 세계화 이전 국제화 시절 발전햇던 일본과 한국은 국가경제를 부분적으로만 세계경제의 네트웤에 연결했다. 외국자본이 아닌 국내자본이 경제성장을 주도하도록 했고 국가가 전체 프로세스를 관리햇다. 그러나 세계화의 시대엔 더 이상 그런 전략은 먹히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세계화의 이미지는 ‘세계는 평평하다’보다 ‘렉서스와 올리브’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무역, 국제적인 경쟁, 평등화 등의 현상은 여러 측면에서 오래전부터 익숙한 개념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볼 수 없던 그야말로 현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현상은 수많은 산업을 아우르고 전 세계를 기반으로 생산활동을 조직하는 역량이다.

세계화가 되면서 생산과정이 여러 단위로 분할되엇다. 전통적인 소유권의 구조에서 보면 이는 생산과정의 탈수직화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새로운 다기업 생산체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수직적인 명령체제를 수립해 확실히 조정하고 통제해야ㅐ 한다. 이와 동시에 이 명령체제는 단일 기업의 경계를 넘어 네트웤을 통해 운영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런 네트웤의 세계는 평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네트웤이 작동하려면 정점에서 네트웤을 통제하는 소수의 기업이 있고 이들이 규칙을 정하고 나머지는 규칙을 따른다. 중국이 뛰어든 세계는 그런 과두정의 세계였고 중국은 규칙을 받아들이고 명령을 받는 입장이었다.

“중국은 1990년대 초반에 이러한 글로벌 생산 시스템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이때 중국의 행보는 치밀한 고심 끝에 마련한 장기적인 비전이나 산업을 일으키고 경쟁자를 따돌리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정반대에 가깝다. 중국은 최대한 빨리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세계경제에 뛰어들었다.”

네트웤에 연결되기 위해 중국은 “선진국들 특히 미국의 주도로 생성되고 정의된 규칙에 따라 운영되는 게임에 참여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중국의 개혁을 주도한 사람들은 서구 선진국들이 만든 규칙에 따라 세계경제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의도가 어떠했든 현대 역사에서 가장 독특한 정치사회적 변화를 중국 내부에서 이끌어냈다.”

“생산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상호작용은 별다른 조율없이 적당한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이 아니라 엄격하고 정교하게 조율된 공동 생산체제이다. 이러한 종류의 시스템에 ㅜ깊숙이 통합되려면 개발도상국 내의 경제제도가 공급사슬을 선도하는 주체들에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생산 시스템 전체에 걸쳐 제도적인 조화를 모색하거나 반드시 공식적으로 규정한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생산과 관련된 핵심영역에서는 어느 정도 제도의 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핵심영역들은 대부분 국경을 넘나들며 다양한 경제,. 정치제도 하에서 운영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화가 만들어낸 세계의 진정한 모습이다. 결국 생산이란 관점에서 보면 정치와 경제의 괴리라는 가정 전체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그 규칙은 “무역을 위한 장벽 낮추기, 낮은 관세율, 기본적인 환전 체계 등” 기본적인 것부터 자유로운 노동시장이란 사회주의원칙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까지 시장경제의 모든 것이었다. 아웃소싱은 경제를 넘어 정치까지 포함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공산당의 문호개방, 법치주의, 시민운동의 용인 등. 경제의 규칙을 아웃소싱하기 위해선 정치 역시 바뀌어야 했기에 이는 필연적이었다.

“제도의 아웃소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중국의 정치와 경제가 동시에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즉 정치와 경제가 서로 맞물려 윺기적으로 빠르게 발전한다는 뜻이다. 극렇다면 글로벌 생산체제에 합류한 것은 하나의 중요한 발전요인이 된다. 그러나 수많은 연구가 중국 정치경제의 발전이 서로 어긋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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