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페리움 - 제국-권력의 오만과 몰락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외 지음, 박종대 옮김 / 말글빛냄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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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국이란 제목이 붙은 이책은 말 그대로 제국을 다룬다. 제국들 중에서 고대 지중해세계의 이집트, 페르시아, 카르타고, 그리고 로마가 그 대상이다.

이책이 다루는 네 문명은 로마를 빼면 그리 알려진 것이 없다. 우선 기록이 별로 남은 것이 없기도 하지만 그들이 ‘패자’이기 때문이다. 이집트와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멸망했고 페르시아는 알렉산더에게 망했다. 언제나 패자의 역사는 승자의 영광에 희생되기 마련이며 패자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게 마련이다. 패자의 역사는 그렇기에 거의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

이책의 목적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네 문명이 어떤 문명이었는가 그리고 그 문명들이 왜 사라져야 했는가에 있다.

저자의 답은 간단하다. 군사적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그 문명들은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야나 잉카의 경우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금속무기와 병균이란 생물학 병기 이외엔 두 문명이 무너져야 할 이유는 달리 없었다.

페르시아의 멸망이 그런 경우라 저자는 말한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했을 때 페르시아는 절정기에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페르시아는 당시 2백년이 넘도록 불변의 세계 질서를 구축한 세계의 중심축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첫째 오늘날에야 그 구조를 이해하기 시작할 정도로 진보적이었던 그들의 행정 제도를 들 수 있다. 둘째 막강한 군대가 있었다. 전투 경험이 많은 노련한 전사와 현대식 무기, 그리고 전투 코끼리와 바퀴에 낫 모양의 칼이 달린 전차들이 상대방을 압도했다. 셋째 탁월한 인프라 시설과 소중한 수자원이 있었다. 방대한 제국 곳곳에 파 놓은 운하와 도랑들을 통해 충분한 물이 비옥한 밭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것은 부의 영원한 원천이었다.”


그러나 “이 제국은 한 한 차례의 전쟁으로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도 국력이 최고의 전성기에 달했을 때였다.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은 2백여년전부터 역사가들에게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한가지 설명은 폴 케네디 식의 overstretch 이론이다. 페르시아가 하나의 제국으로 묶은 지역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포함한 중근동의 전부였다. 당시 알려진 세계의 전부로 최초의 세계제국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제국이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라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중앙 집권자들은 수많은 민족과 부족들을 서로 융합하고 끊임없이 중앙에서 멀어지려는 그들의 봉건적 원심력을 제어하는데 실패했다.” 페르시아의 적이었던 그리스인들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페르시아에 대한 기록을 독점하다시피 한 그리스인들의 관점이 페르시아에 대한 정통이 되었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그리스의 연대기 저자들은 페르시아를 평가함에 있어서 오랫동안 감탄과 혐오감 사이에서 흔들렸다.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 직전, 그리스 작가들은 페르시아를 철저한 악의 제국으로 잔인한 폭군이 백성과 신하를 노예처럼 학대하는 상극의 세계로 폭력과 야만이 판치는 불의 국가로 묘사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설명은 일방적인 선전에 불과한 왜곡일 뿐이라 말한다. 오늘날 발굴된제국의 행정문서들은 “확고한 체계를 갖춘 현대풍의 관료 제도가 페르시아 제국을 지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문서들은 그리스인들의 악의에 찬 선전처럼 “허약한 국가 조직, 무절제한 방탕과 사치, 그리고 계획된 잔인성에 대한 흔적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저자는 페르시아 제국을 지탱한 것은 로마제국 처럼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지배와 인프라 덕분이었다고 본다.

파라다이스란 말의 어원이 된 “파사르가다에의 관개 시설은 페르시아 제국 전 역사의 본보기가 되었다. 후세의 페르시아인들은 위대한 왕들이솔선수범한 예를 따라 황량한 대지 곳곳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했다. 오늘날에는 뙤악볕 아래 먼지만 폴폴 날리고 있지만 페르시아 대왕들이 다스린 시대에는 그곳에 갖가지 작물과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관개시설이 이루어진 정원에는 유리처럼 투명한 물이 수로를 따라 흘러들어왔다. 농부들은 세심하게 설계된 물길을 이용해서 소중한 물을 밭으로 끌어들였다. 그렇게 자라난 푸른 식물들이 비옥한 대지 위에 그늘을 드리웠다.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은 메마른 대지 한가운데에 생겨난 이러한 기적들에 대해 스스로 놀라워했다. 지칠줄 모르는 노동과 잘 조직된 행정 체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기적이었다. 소중한 물을 한치의 낭비없이 체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풍성한 수확을 위한 전제조건이엇고 그거쇼이 페르시아 부의 밑거름이 되었다.”

페르시아의 멸망은 그런 원심력 때문이 아니라 군사적 문제였고 정치 시스템의 문제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는 그리스 군의 전형적인 전투 대형을 한 단계 발전시켜 팔랑크스를 만들어 냇다. 팔랑크스 부대는 장창 덕분에 거의 모든 적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적의 기병과 보병, 심지어 전차 부대에도 팔랑크스는 그 자체로 가공할 무기였다. 적의 정면 공격은 팔랑크스 태형에서 수 미터씩 앞으로 튀어나온 장창의 뾰족한 칼날에 막혀 무력화되었다. 팔랑크스 부대가 이런 밀집 대형으로 진격하면 16줄 혹은 그 이상의 열로 빽빽하게 줄지어 선 장정들이 밀어붙이는 엄청난 압력 때문에 그 어떤 적진도 버텨 낼 수 없었다.”

알렉산더는 팔랑크스와 중기병을 활용한 전술과 나폴레옹에 비견되는 전술적 유연함으로 무적이 되었다. 당대 최고의 군사적 혁신에 페르시아의 군대는 대처할 수 없었고 알렉산더란 군사적 천재의 맞수로 페르시아의 유약한 황제는 적당하지 않았다.

“페르시아 제국의 그늘에 있는 모든 민족과 부족들은 ‘다리우스’라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통합될 수 있었다. 그는 대왕으로서 전 페르시아 권력의 구심점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이처럼 국가의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제국을 몰락으로 이끈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만일 왕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겨 왕좌가 비게 되면 페르시아 제국은 갈가리 찢겨져 나갈 것이다. 이처럼 그의 생명과 생존은 제국의 존속을 위한 선결조건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왕이 사라진 왕좌에 알렉산더가 그렇게 쉽게 앉을 수 있엇고 제국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저자는 카르타고가 로마에 의해 무너진 것도 시스템의 문제였다고 말한다. 저자의 카르타고에 대한 설명은 시오노 나나미의 포에니 전쟁 서술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으므로 다음의 인용구만으로 넘어가겠다.

“북아프리카 해안의 대도시가 로마를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한니발이라는 전설적 명장ㅇ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개인이 아닌 국가 대 국가로서는 도저히 로마를 당해낼 수 없었다. 로마 공화국은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조달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정치 시스템도 카르타고보다 훨씬 현대적이었다. 시민들은 각자 자신의 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군대에 들어가 싸웠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보자면 용병 부대보다 우세한 전투력을 낳은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로마의 ‘동맹 정치’의 우수성을 빼놓을 수 없다. 로마의 지도부는 정복한 이탈리아의 다른 민족들에게 의무만 부과한 것이 아니라 권리도 함께 인정함으로써 한니발이 도저히 와해할 수 없는 안정된 정치 조직을 구축했다. 포에니 전쟁은 서부 지중해권으로 진출하려던 로마인들에게 빌미를 제공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이 그들에게 시련을 안김으로써 오히려 로마는 세계권력으로 부상하는 전기를 맞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로마와의 시스템 경쟁에서 졌기 때문에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의 문제는 이집트의 멸망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집트의 문제는 내향성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위는 바다로 막히고 삼면은 사막과 산맥으로 막힌 이집트는 외침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한 조건이 수천년의 수명을 보장했다. 더군다나 “이집트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 즉 물, 비옥한 땅,. 따사로운 햇빛 등을 무한정으로 갖춘 나라였다. 이집트인들은 매우 보수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문명의 건설에 원동력이 되는 자원이 어디에나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외침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지리적 요건, 탁월한 농업 기반, 신에 대한 강한 믿음, 그리고 역사적 연속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민족성이 3천년동안 이집트 문명을 하나로 묶고 꽃피우게 한 접착제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 조건은 이집트를 내향적 문명으로 만들었다. 파라오들은 인간에겐 영원에 가까운 천녀동안 ‘피라미드들을 짓게 했다.” 그 시간동안 주변의 다른 민족들은 “전쟁에 집착하고 생존 그 자체를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지만 파라오들은 “신에 좀더 가깝게 다가가려는 교만한 생각에 푹 빠”질 수 있었다.

이 세계를 하나의 완결된 시스템으로 만든 것은 종교와 정치의 일치였다: 신의 대리인으로서의 파라오. 그 시스템의 완결성은 막강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민족이 이집트를 지배한 기나긴 역사의 마지막 군주였다. 후기 왕조 시대의 파라오들은 더 이상 이집트 출신이 아니었다. 리비아족, 쿠시트족, 페르시아인, 마케도니아인 들이 각각 시대를 달리하며 나일 제국을 다스렸다. 그런데 이들 모두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파라오 제국에 도착하자마자 자신들의 출신을 모두 잊어버린 거시다. 이집트에 왔던 모든 이민족은 즉시 이집트화되었다. 이것은 당시 이집트 문명의 엄청난 영향력을 말해 준다. 이집트는 모든 이질적인 것을 거부했다. 이집트인들은 무엇보다 자신들을 뺀 나머지 세계에 대해 차단막을 치고 그들과 스스로를 구분하여 자의식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 자의식은 종교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자의식을 철저히 내면화할 수 없었던 “이방의 지배자들은 항상 권력의 틀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쳤고 비싼 급료를 주고 고용한 용병들의 도움으로 나라를 통치했다. 사실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프톨레마이오스 왕가가 의지할 곳은 용병들뿐이엇다. 어느 이집트인이 이민족 지배자들을 위해 칼을 들고 목숨을 내놓겠는가?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집트의 전력은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강한 군사력을 갖춘 로마는 이미 기원전 168년부터 나일 제국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집트는 로마의 곳간이 되었다.

그러면 그 로마는 왜 멸망했는가? 저자는 로마라는 존재가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었을 때 로마는 멸망했다고 말한다. “로마는 원래 존재하는 세계였다. 하나의 자연현상처럼, 그리고 신에 의해 주어진 현실처럼. 그렇기에 후기 고대의 사람들은 로마의 종말을 곧 세계의 종말로 인식할 정도엿다. 로마는 사계절처럼 분명하고 선연한 실체였다. 일체를 포괄할 권리가 있는 세계 그자체였다.”

그렇기에 군인황제 시대의 무질서에서도 로마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게르만족 출신 지휘관들이 “로마 제국의 영토 안에서 제멋대로 지방 왕국을 선포하고 제국의 경계를 기분내키는대로 무시하곤” 했어도, 로마제국이 제국이 아니라 “별다른 결속력이 없는 군 연합체”로 전락해버렸어도 “로마 제국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몰락하지 않는 영원한 제국으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로마는 지탱할 수 있었다.

로마제국에 최후의 일격을 날린 것은 민족 대이동이었다. 그 일격은 허약해져 있었던 로마를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면 왜 로마는 허약해졌던 것일까?

그리스도교의 번성은 로마, 세계 자체였던 로마가 무너져가는 상황이 아니엇다면 있을 수 없는 일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비관주의” 그 위에서 기독교가 번성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위로의 복음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궁핍한 상황에 처해있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교가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로마가 서서히 죽어간 이유를 저자는 정치시스템의 문제라 생각한다. 헤르더의 말마따나 페르시아 제국과 마찬가지로 “’100여 민족과 120개 속주를 강제로 통합시킨 제국은 국가가 아니라 괴물이다.’ 이러한 괴물을 길들이려면 강철 같은 주먹과 고대 후기의 나약한 황제들에겐 없었던 강력한 권력 의지가 필요했다. 나약한 황제들의 등장과 함게 로마 제국의 이념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국가의 행정과 조직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로마 제국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우구스트;라고 불리며 중앙집권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황제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좌지우지되었다.”

그런 상황을 개선해보려는 최후의 시도가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이엇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새로운 혁명적 이념들 속에서 고대의 견고한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이 서서히 붕괴되어 갔다. 근본적인 가치의 변화로 야기된 이러한 징후들은 ‘사회적 불안감’이라는 말로 특징 지울 수ㅜ 있을 듯하다. 그래서 일부 역사가들은 4세기를 ‘불안의 시대’라 말한다. 당시는 옛것이 붕괴되었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결실을 맺지 않은 시대였다. 극도로 불안정한 과도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제국을 수호하는 옛 신들이 없는 로마는 과연 무엇일까? 과거에 로마를 위대하고 강하게 만든 모든 것들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사라진 지금, 천년을 이어온 모든 전통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신전에 세워져 있는 수많은 동상들과 영광스런 과거를 증언하는 신격화된 황제들의 조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선택받았다는 절댖2ㅓㄱ 특권 의식, 세계의 다른 모든 민족에 대한 우월감, 그리고 로마의 시민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새로운 고리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어느날 갑자기 서로 형제가 되었다. 지금가지 언제나 칼의 힘을 신뢰하며 세력의 확장과 안정에만 노력을 기울여 온 나라가 ‘자선’과 ‘사랑’으로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과도한 요구였다. 새로운 종교와 그 종교의 혁명적 가치관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정치시스템은 여전히 과거와 동일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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