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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 ㅣ 논형학술총서 31
강상규 지음 / 논형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1세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9.11 테러로 불길하게 개막한 새로운 밀레니엄의 출발 이후 우리는 어떠한 ‘거대한 변환’의 소용돌이 위에 떠있는 것은 아닌가.”
저자는 21세기의 불확실성과 19세기의 불확실성이 같은 이유였다고 말한다. 19세기와 20세기말의 공통점은 세계화였다.
세계화라면 보통 경제를 떠올린다. 세계정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가 하나의 문화로 묶인 것도 아니니 현실적으로 세계화는 경제현상이라 생각하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다. 세계화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세계는 평평하다’도 경제현상으로 세계화를 다룬다.
그러나 세계화를 단순하게 경제현상으로 이해한다면 세계화가 어떻게 가능하고 세계화가 어떤 역학으로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지난 30년간 세계화와 함께 가장 많이 말해진 것은 글로벌 스탠다드일 것이다. 세계화를 경제적으로 이해하더라도 세계시장이란 실체가 있어야 세계화가 가능하다. 세계시장이 가능하려면 그 시장에서 통용되는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거래가 가능하다. 그 규칙을 글로벌 스탠다드라 불렀다. 국경을 넘어 적용되는 규칙이 있다는 것은 세계화가 단순히 경제현상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느슨하더라도) 정치적 통합이 없다면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묶을 수 없다. 글로벌 스탠다드는 세계가 하나의 문명표준으로 묶인다는 의미이다.
19세기가 그런 시대였다. 19세기 동북아 3국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세계화의 개념으로, 문명표준이란 시각으로 그 시대를 봐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19세기 동아시아의 경험을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발전과정이라는 틀에서 단선적으러 이해해온 기존의 논의방식과는 달리 상이한 문명 간의 충돌과 패러다임 변환이라는 보다 복합적이고 상호구성적인 틀 위에서 검토”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게 봐야만 일본은 제국이 되고 중국과 한국은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로 떨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19세기 흔히 서세동점으로 집약되는 거대한 변환의 과정이란 동아시아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던 중화질서가 현실적으로 붕괴되고 서구의 국제질서로 재편되어가는 과정이었다.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은 이 과정에서 이른바 ‘예의 관념’에 의거한 중화질서로부터 ‘부국강병’과 ‘국가평등 관념’에 입각한 근대 국제질서로 동아시아 세계를 구성하는 패러다임의 변동을 겪어야 했다.”
그 과정은 말그대로 ‘문명의 충돌’이었고 ‘문명의 표준’이 바뀌는 ‘거대한 변환’이었다. 그런 과정이 쉽게 될리가 없었다. 수천년을 이어온 질서가 표준이 쉽게 바뀔 리가 없었다. 당하는 입장에선 하늘(천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중화질서의 “’무대’가 예의 관계에 입각한 ‘천하질서’에서 상위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주권국가 간의 관계, 즉 ‘근대 국제질서’로 변화해 간 것을 지칭한다. 무정부적 속성을 지닌 새로운 무대 호나경에서는 덕치나 예치, 왕도정치, 사대자소와 같은 기존의 ‘연기’와는 다른 부국과 강병, 균세(세력균형)와 자강의 능력이 보다 중시되었고 이에 적응하지 못한 배우들은 무대 밖ㅇ,로 밀려났다.” 중국과 조선은 그 무대에서 밀려났고 일본은 그 무대에 남았다. 왜 그랬을까?
저자는 그 이유를 문명의 표준이란 관점에서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19세기 문명의 표준으로 떠오른 ‘만국공법’을 중국과 일본에서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그리고 만국공법이란 표준에 따라 자신이 자신의 정체성을 즉 국체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검토하면서 적응과 부적응의 이유를 설명한다.
중화질서의 붕괴 또는 문명의 충돌은 아편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에서 아편전쟁은 심각한 사건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아편전쟁이 영국한테는 국가의 전쟁이었으나 청국에게는 회민기의나 백련교도의 난과 같은 지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중국은 태평천국의 난이나 염군의 난 같은 내부문제가 아편전쟁 같은 외환을 압도했다.
청국 입장에서 불평등조약으로 양보하는 문제는 예전 중화질서에서처럼 오랑캐를 달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청은 서양의 여러 나라가 중국과의 조약을 통해 획득한 특권을 기본적으로 천자가 이적에게 베푼 은혜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에 어차피 일방적인 성격이 강할 수 밖에 없었고 오히려 상국인 중국의 편벽되지 않은 공정한 은혜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별다른 거부감없이 수용되었다.”
그러나 1860년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황제가 도망가는 경신변란이 일어나면서 양이의 문제는 심각한 사안이 되었고 중국 최초의 외교전담기구인 총리아문이 만들어진다. 예부 관할의 조공관계에 포섭되지 않는, 천하질서에 포섭되지 않는, 중국 자신이 일개 국가에 불과한 무질서의 국제질서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질서의 규칙인 ‘만국공법’에 주목한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에서 만국공법은 적극적으로 수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양이들과 대화를 하기 위한 지피지기의 전략적 차원에서 수용되엇고 참고문헌이요 실무지침서일 뿐이었다.
그에 비해 일본에선 “막말의 2대 베스트셀러는 뭐니뭐니해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과 휘튼의 ‘만극공법’이었다.”
이 차이가 두 나라의 운명을 갈라놨다고 저자는 말한다.
중국의 입장에서 만국공법이 전제하는 ‘국가평등’에 근거한 주권국가의 개념은 받아들일 수 없엇다. 그것은 ‘제국으로서의 중화라는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중국적 세계질서의 해체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중화문명권에서 문명의 정수를 구현하며 문명 기준을 제공하던 화(華)의 입장에서 새로운 문명 기준인 유럽문명에 의해 스스로를 재편해야하는 이(夷)의 입장으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천하질서의 논리는 화와 이의 구분에서 시작한다. “화와 이의 관계란 문명의 완전태와 결여태의 관계”였다. 서구의 국제질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관계가 뒤집힌다는 의미엿고 화에서 이로 전락한다는 의미였으며 정체성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의미엿다. 왕조의 “흥망성쇠를 넘어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중화질서에서 주변이었던 일본의 입장에선 중국보다 적응이 쉬웠다. 주변에 있었기에 일본의 화이관에서 화는 실체가 불분명했고 이로서 서양에 대한 관점은 중국보다 유연할 수 있었다. 일본은 “중국의 천하 개념에서 드러난 자기완결성’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화이사상은 중국과 달리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경향성이 현저했다. 지배층이 사무라이 집단이었으며 화이사상을 지탱한 문화적 기반이 상대적으로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이후 “양이(攘夷)로 대표되는 배외주의적 기운이 일본열도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들어갓다.” 그러나 그 기운의 뿌리는 “화이라는 명분보다 이기느냐 지느냐 죽느냐 사느냐라는 긴박한 위기의식’이었다. 그들이 본 것은 “서양제국의 군사적 우월성”이었고 “그 저변에 놓인 서양의 과학기술을 섭취해서 국력을 충실히 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전략적 인식이”었다.
일본에겐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생존의 문제였고 적응의 문제엿다. 그렇기에 만국공법을 읽는 것은 적응의 생존의 수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