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유토피아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2
박해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1993년 처음 서울을 방문해 아파트단지의 거대함에 충격을 받은 이후, 나는 어떻게 이런 대단지 아파트가 양산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박사 논문의 주제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프랑스인들에게 아파트는 부정적으로 보일 뿐이다. “그들에게 이 아파트단지들은 관리부실, 볼품없는 건축미, 저급한 생활환경을 연상테 한다. ‘대단지 아파트=도시문제 발생지역’이라는 단순도식은 서구도시의 상징체계 안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발레리 줄레조)

코 크고 파란 눈의 아가씨가 아파트에 대해 묻고 다닐 때 사람들은 당연한 것도 모르는 ‘순진한 외국인’이란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사람은 많고 땅은 이리 좁은데 어디다 집을 짓자는 말인가? 위로 올릴 수 밖에. 살기 편하니 또 좀 좋은가? 아파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프랑스와 달리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1970년, 정부 주도로 건설된 몇몇 소형 아파트단지는 20여군데였고 모두 강북에 위치했다. 당시 서울시에서 아파트는 전체 세대의 4%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서울에는 아파트가 없는 지역이 없고 주택 수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5년 현재 52.&%로 상승했다.” (줄레조)

어떻게 이런 급팽창이 가능했는가? “1970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에게 아파트는 그다지 각광받지 못햇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땅이 좁고 사람이 많다고 해서 고층의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불가피한 것도 아니다. 협소한 영토에 인구밀도가 높은 네델란드나 벨기에에서는 도시로의 집중화가 대규모 주택단지 건설을 가져오지 않았다. 이들 나라에서 건설된 대규모 주택의 수는 영토가 훨씬 넓은 프랑스보다도 적다.” (줄레조)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줄레조가 던진 질문에 대해 이책의 저자는 문화적 헤게모니라 답한다. 프랑스나 미국에서 대규모 주택단지는 서민을 위한 주거공간으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처음 들어선 아파트의 포지셔닝은 중상류층 이상을 위한 공간이엇다.

물론 한국이라고 프랑스와 같은 부정적 인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가 “마치 단층 운동에 의한 지각의 융기처럼 솟아오르던 30여년전에도 부정과 부패의 악취를 풍기는 투기의 온상이라니, 사회 구성원의 공동체적 유대감을 해체하며 인간 소외를 가속화하는 끔찍한 벌집이라니, 비판의 화살들이 수북이 박혀 생매장의 말무덤을 만들지만” 아파트라는 “불도저는 막지 못한다.” 아파트는 “담론의 가상세계에선 언제나 패배하지만 물질의 현실세계에선 백전백승이다.” 비판의 무기를 휘두르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그것뿐이다. 무기의 비판은 그들이 아니라 아파트의 몫이다. 왜 이런 일이 몇십년동안 반복되는가? 저자의 물음이다. 그답은 욕망의 정점에 아파트가 있기 때문이다.

1962년 ‘단지 개념으로 건설된 한국 최초의 아파트 단지’였던 마포아파트는 ‘도시 중산층의 주거 모델’로 제안되었다. 아직 전근대적 생활방식이 지배적이었던 당시엔 아파트가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서구식 가정행활을 꾸리려던 서울 토박이의 젊은 중산층들’이 이 아파트에 주목했고 “자유분방함을 선호하는 소설가, 화가, 영화감독, 연극인등 저명 예술가들의 이름이 마포아파트의 초기 입주자 목록에” 남는다. 그후 미국인들이 대거 입주하면서 이 아파트가 일반인들에게 주목을 받고 ‘일반 회사의 중견 간부급들도 이곳으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파트의 “주거 모델로서의 타당성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했지만 주말만 되면 아파트의 집치레와 세간살이를 구경하려고 방문한 주변 친지들로 현관 문턱이 닳을 지경이었다. 그들에겐 아들과 손자가 거주하는 이 아파트가 박람회에 전시된 미래의 견본주택이나 다름없었다. 현대적 일상생활의 실험실이자 구경거리로서의 마포아파트,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대한주택공사 총재 장동운이 본래 의도했던 바였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대한주택공사는 마포아파트의 실험을 통해 아파트 보급의 타당성을 확인했고 본격적인 도입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저자는 마포아파트에서 그리고 이후 쏟아진 아파트에서 당시 정부가 의도했던 것은 ‘조국 근대화’의 생활측면, ‘생활의 혁명’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저 잘 먹고 잘 입는 것처럼 별다른 매력을 지니지 못한 현대화도 너무 추상적이어서 체감이 힘든 막연한 현대화도 아니었다. 그것은 구체적인 질감을 지닌 또 다른 현대화였다.” 그리고 그 현대화의 질감은 ‘선진 외국에서나 볼 수 있는 대중사회의 면모’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서울시 전체 가구의 아파트 보급률은 1972년에는 4%, 1977년에는 7%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수치를 무시할 수 있을만큼 아파트는 ‘현대적인 문화생활’의 상징으로 자리를 굳건히 다져갔다. ‘매일 저녁 우리를 찾아오는 기라성 같은 탤런트’, ‘부의 상징으로 꼽히는 사장’, ‘출세의 부러움을 사는 고급관리’, ‘서울 명문대의 교수’등 이른바 사회지도층 상당수가 아파트로의 이사를 서둘렀고 대중 산업사회의 인간소외에 비관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문인들조차도 아파트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햇다.

1977년 대학생 500명을 상대로한 설문조사에서 아파트에서 신혼 살림을 차리겠다고 응답한 대학생이 81%에 달했다. 특히 여학생이 선호도는 91%에 달햇다.”

아파트가 부정할 수 없는 실세로 등극한 것은 강남개발부터였다. 강남개발의 설계자들이 염두에 둔 것은 “당시 새롭게 등장하던 인구통계적 집단이었다. 이후에 ‘신중산층’이라는 이름을 얻게 도리 그들은 1970년대 압축적인 경제성장의 인적 견인차이자 실질적 수혜자로 부상하던 ‘조국 근대화’의 자식들이엇다. 1940년애에 지방에서 태어나 이제 막 출세의 초입에 들어서려는 찰나에 있던 이들, 그들은 경제성장의 격랑으로 극대화된 사회적 이동성을 십분 활용해 정부 관료와 대기업 관리직, 고소득 전문직과 자영업자로 성공신화를 써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주로 출신대학의 인근지역이나 사대문 밖에 머물며 아직 서울의 구도심으로 진입할 만큼의 경제적 여력을 갖추지 못햇다. 그곳은 여전히 뜨내기들이 넘보기 힘든 토박이들의 거처였다.”

설계자들은 이들을 주목한다. “이들을 집장사 집들이 점령한 서울 변두리에 방치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 질서로 끌어들여 입신과 출세의 기회를 제공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이들을 위해선 역사, 관습, 제도들이 퇴적되어 봉건 질서의 악취를 풍기는 장소에서 벗어나야 했다. 설계자들은 한강 이남에 위치한 무색무취의 턴 빈 공간을 눈여겨보았다.”

강남은 주류로 성장해가는 베이비부머들과 함께 신도심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강남의 얼굴을 도배한 아파트의 요새는 그 주류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규정했다. 저자는 아파트가 정의한 것은 단순히 수세식 화장실과 중앙난방시설 같은 것만이 아니라 말한다.

아파트는 “감각의 생산양식을 구축해 거주자들이 특정한 시각성의 논리를 체화하도록 독려했고 일상성의 프로그램을 제공해 독특한 구별짓기의 인지적 알고리즘을 내면화하도록 만들었다. 아파트는 그들 내면의 윤곽을 주조하는 거푸집이엇다. 독특한 감각과 인지의 공간적 매트릭스로 인간 거주자들의 습속을 분절하면서 그 결과로 ‘신중산층’의 독특한 정체성을 생산해냈다. 비판자들의 생ㄱ각처럼 신중산층이 아파트를 쌓아올린 것이 아니다.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아파트가 그들을 빚어냇다. 그들의 욕망은 아파트의 피조물이엇다. 바로 이것이 아파트의 콘크리트 육신에 적재된 매혹의 실체다.”

거창하게 들린다. 그러나 저자의 말은 거창하지 않다. 저자는 욕망의 구체적인 대상들을 나열하면서 전혀 그말이 거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아파트 평형으로 사람의 신분이 결정되는 것, 아파트 거실에 놓이는 가구들과 인테리어의 변천사를 살펴보며 농업사회의 ‘촌스런’ 취향이 어떻게 아파트라는 모더니티의 공간에 맞춰 재조형되는가, 예를 들어 자개장이 사라지고 원목이 뜨는 미시사, 꽃무늬나 에이프릴과 같은 장식이 어떻게 아파트라는 공간에 의해 사라지고 재등장하게 되는가, TV의 외장이 원목장에서 검정 플라스틱으로 왜 바뀌게 되는가, 아파트 대단지가 소매유통망을 제조직하면서 어떻게 소비사회를 만들어가는가 등을 자세히 분석한다.

이책의 주제는 그리 특별한 것은 없다. 앞에서 인용한 발레리 줄레조의 책만 하더라도 마찬가지 질문에서 시작해 비슷한 답을 내린다. 그러나 다른 책들과 달리 이책은 아파트가 우리의 욕망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란 재미있는 주제를 건드리고 있고 그 주제를 구체적이면서 재미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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