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레베카 피죤(Rebecca Pidgeon)은 가수보다는 배우로서 더 기억된다. 재미있게도 가수로서나 배우로서나 그녀의 분위기는 유사하다. 우아하면서 자연스러운 외모처럼 가수로서 그녀는 거부감 없는 특유의 아름다운 멜로디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그녀의 미성은 고급 클럽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갖는다.
피죤의 대표곡처럼 되어버린 'Spanish Harlem'은 오디오파일용 테스트 음반에 단골로 등장하는 곡이다. 그러나 그곡은 그녀가 쓴 것이 아니라 Ben E. King이 처음 부른 곡으로 끊임없이 커버되는 곡이다.

이 곡의 주제는 거리에 핀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이다. 베니 킹이 부른 원곡은 삭막한 거리에서 장미를 발견한 순간의 놀라움과 기쁨에 초점을 맞추며 리듬은 정서에 맞게 밝고 동적이다.
그러나 피죤은 가사는 그대로 두고 곡의 정서의 시제를 현재에서 과거로 옮긴다. 피죤의 커버는 살아있는 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책갈피에 박제된 장미를 보고 그 꽃이 살아 있을 때를 회상하는 것 같이 느껴지며 그녀의 건조하고 사색적인 쿨 재즈적 리듬처럼 정서적으로 정적이고 차갑다.

두 곡 중 어느 것이 아름다운가 물으면 누구나 피죤의 곡이 월등히 아름답고 말한다. 왜일까? 정서의 승화 때문이다.

피죤은 장미의 아름다움을 가사가 아니라 우아하게 변형된 멜로디나 리듬과 같은 음악형식의 아름다움에 의해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주제의 간접화는 보컬 정서의 억제로 구현되면서 아름다움이란 주제는 현재가 과거로 옮겨진다.

탐 맥크래( Tom McRae)는 음악이란 나비를 박제하듯 살아 움직이는 삶을 순간에 고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회상적이며 슬플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상하게도 좋은 음악, 뛰어난 음악은 압도적으로 회상적이다. 시간이 박제된 음악. 그런 음악의 매력은 듣는 이를 끌어당기는, 깊은 내면에서 끌어올려진 정서이다. 그러나 기쁨은 깊이 가라앉지 않는다. 내면의 깊이에 잠긴 감정은 슬픔이 대부분이며 그렇게 끌어올려진 감정은 깊은 울림을 갖는다.

(요즘도 교과서에 실리는지 모르겠지만) 황순원의 소나기는 문학에서 그런 울림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그 단편을 아름답게 만들고 정서적 울림을 갖게 하는 힘이다.

이 단편집은 그런 울림을 갖는 기억을 이야기한다. “마음은 그 주인이 마음먹은 대로도, 마음먹고 싶은 대로도 움직여주지 않는다. 놓아버리고 싶어도 놓지 못하고(구멍), 버티려고 해도 무너지고(코요테), 잘하고 싶어도 잘되지 않고(아술), 잘하고 싶어도 잘되지 않고(아술), 곁에 남고 싶어도 떠나게 되고(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가 어렵고(강가의 개), 잡을 수 잇는데 잡아주지 못하고(외출), 입으로 말을 해도 귀로 듣지 못하고(머킨), 나아가고 싶은데 뒤돌아보게 되고(폭풍), 안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되고(피부), 보며 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코네티컷).”

이 단편집의 이야기들은 잃어버린 것들과 그 상실의 기억을 말한다. 그 이야기들은 특별하지 않다. 어릴 적 죽마고우의 죽음, 무능력한 아버지를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된 어머니의 결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결핍의 대리만족, 두 남자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햇던 여자의 상처, 용기가 없어 떠나보낸 어릴 적 사랑에 대한 후회, 어릴 때 죽은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의 방황.

있을 법한 왠만한 사람이면 하나쯤은 겪었을 법한 평범한 이야기들이다. 이 단편집에는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극적인 스토리가 없다. 죽으면서 관속에까지 가져가야할 아름다운 기억도 없다. 이 책의 이야기들은 평범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평범하면서도 특별할 것 없으면서도 깊은 울림을 갖는다. 피죤이 베니 킹의 드라마틱한 원곡을 평범하게 바꾸었기에 더 아름답게 되었고 더 깊은 울림을 갖게 된 것처럼. 이 단편집의 이야기들은 내면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진 것이기에 울림을 갖는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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