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 낙관주의자 - 번영은 어떻게 진화하는가?
매트 리들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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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저자의 분노와 짜증 때문에 쓰여졋다.

“1970년대 나는 영국의 10대였다. 내가 읽는 모든 신문은 석유가 고갈되고 화학물질로 인한 암이 대규모로 퍼지고 식량은 부족해지고 빙하시대가 다시 도래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국 경제가 상대적으로 침체하는 것은 불가피하며 절대적인 침체에 빠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햇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 영국은 갑작스러운 호황과 경제성장을 누렷다. 건강, 수명, 환경이 좋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모든 현상은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스물한 살 때 나는 깨달았다. 인류의 미래에 대해 뭔가 낙관적인 것을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나는 화가 났다. 세상이 훨씬 나아질 수 있다고 가르치거나 말해준 사람은 어째서 아무도 없었는가. 웬일인지 나는 낙담하라는 충고만 들었다.” 그런데 더 화가 나는 것은 “오늘날 내 아이들도 그렇다”는 것이다.

저자를 화나게 하고 짜증나게 하는 허튼 소리들은 죽지도 않고 오고 또 온다. 한가지가 헛소리로 들통나면 또 다른 헛소리가 옷만 바꿔 또 나타난다. 그 많은 헛소리 중에 저자를 정말 화나게 한 것은 ‘바이오 디젤’이다.

“만일 미국이 모든 수송기관의 연료를 바이오연료로 대체하려 든다면? 현재 식량생산에 사용되는 농경지의 1.3배에 해당하는 땅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면 식량은 어디서 생산한단 말인가?

재생가능 에너지 시설은 엄청난 면적의 땅을 훼손하는 괴물이다. 여기에 ‘그린’이니 ‘청정’이니 하는 라벨을 붙이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 기괴하게 비친다.

‘그릇된 잡신을 신성시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자.’ 에너지 전문가 제시 오서벨의 말이다. ‘그,리고 이단의 성가를 부르자. 재생 가능 에너지는 청정하지 않다.’”

바이오 디젤로 대체한다고 탄소배출이 줄어드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바이오 연료를 재배하기 위해 드는 비료와 경작에 쓰는 에너지, 수송에 들어가는 에너지 때문에 더 많은 탄소가 배출된다. 문제는 그것 뿐이 아니다. 바이오 연료를 만들자고 하는 바람에 식량가격이 폭등하여 멕시코와 인도네시아에선 폭동이 일어났었다.

저자가 보기에 그린피스를 비롯한 ‘직업적’ 환경운동가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그들의 근거없는 헛짓은 그것 뿐만이 아니다. GMO를 반대한다고 지구촌을 들었다 놨다 했지만 아무 근거도 찾을 수 없으니 이제 새로운 이슈를 찾아 바이오 연료다!

그 이전엔 원전 반대를 외쳤다. 그럼 원전 말고 뭘로 전기를 만들지? 독일의 녹색당은 전기를 수입하면 된다고 했다. 그럼 어디서? 프랑스에서. 프랑스에선 원자력발전으로 전기를 만든다.

저자가 보기에 이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지구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밥벌이에 불과한 헛짓들이다.

저자가 예로 드는 환경론자들의 배부른 소리는 이외에도 여러가지이다. 저자는 그 모든 헛짓들의 근거가 되는 문명비관론을 뿌리 뽑기 위해 이책을 썼다. 그렇다고 도대체 어떻게?

저자의 논리는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19세기 풍의 진보론이니까. 저자가 이 두꺼운 책으로 보여주려는 것은 19세기식의 진보론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며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겁주고 피곤하게 만들며 피해를 주는 헛소리들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파워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궁극적인 논지는 인간의 미래는 밝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아무리 이야기해봤자 믿어줄 사람은 없다. 저자도 자신이 점쟁이라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미래가 어떠할 것이라는 어떤 구체적인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저자는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지금 현재의 문명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를 보면 인간의 미래는 밝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낙관론의 근거를 애덤 스미스의 이론, 그중에서도 노동분업이란 개념에 올려놓는다. 인간이란 종의 역사는 번영을 향한 역사였으며 번영의 기초는 노동분업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인간이란 종은 번영을 누릴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시간, 그것이 핵심이다. 달러나 금은 잊어버리자. 어떤 것의 가치를 재는 진정한 척도는 그것을 얻기 위해 소비해야 하는 시간이다. 동일한 양의 노동을 통해 번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재화와 용역이 늘어나는 것이 바로 번영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부유함의 척도는 시간이라 말한다.

“그것은 교환과 전문화, 그리고 그 결과인 노동의 분업에서 온다. 사슴은 먹을거리를 스스로 구해야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다른 사람에게 먹을거리를 구하게 하고 자신은 그 사람을 위해 무언가 다른 일을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두 사람 다 시간을 절약한다.” 번영이란 부란 여가시간의 증대를 말한다. 그리고 빈곤이란 교환 또는 분업을 하지 않는 것 즉 자급자족이다.

“스스로에게 기초적으로 필요한 서비스를 살 수 있을 만큼의 가격에 자신의 시간을 팔 수 없다면 바로 그만큼 당신은 빈곤한 것이다. 번영 즉 성장이라는 말은 자급자족에서 상호의존으로 이행하는 것과 동의어이다.”

교환, 분업은 단순히 쓸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가 많아진다는 것만 의미하는게 아니다. “당신은 타인의 노동과 자원만 소비하고 있는게 아니다. 타인의 발명도 소비하고 잇다. 루이 14세에게는 없었던 수많은 하인이 당신에게는 있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전화), 존 로지 베어드(TV), 팀 버너스-리 경(웹), 토머스 크래퍼(수세식 변기), 조너스 소크(소아마비 백신)를 비롯한 수많은 발명가가 당신을 위해 일하고 있다.”

교환이 가능하게 하는 시간의 ‘창조’ 그리고 시간의 창조에 의해 가능해지는 이노베이션 달리 말해 지식이 인류의 핵심 내력이며 인간이 다른 사촌 경쟁자들을 제칠 수 있었던 이유라 저자는 말한다.

“20만년전 이후 인류의 기술은 빠르게 진보해왔다.” 그 이유에 대해 인류학자들은 기후나 유전으로 설명하려 하지만 저자는 ‘핵심은 경제학에 있다’고 주장한다. 교역을 통해 분업이 가능해지고 지식을 축적할 수 있게 되면서 “집단지능을 이루게 되는 무언가를 서로에게 그리고 함께 하기 시작햇다.” 노동분업을 하는 동물은 사람 뿐만이 아니다. 개미도 벌도 늑대도 사회적 동물은 모두 분업을 한다. 그러나 “부부도 아니고 혈연관계도 없는 사람들 간에 사상 처음으로” 분업이 이루어졌다. 그 분업은 교환의 네트웤을 만들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눠갖고 맞바꾸고 물물교환하고 거래한 것이다. 이 때문에 나사리우스 고둥 껍데기가 지중해에서 (아프리카) 내륙까지 이동한 것이다. 교환은 전문화를 촉진했고 전문화는 기술 혁신을 기술 혁신은 더 많은 전문화를 초래햇으며 이것이 또다시 더 많은 교환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하이에크를 따라 카탈락시(catallaxy, 노동의 분업이 진전됨에 따라 탄생한 가능성의 무한한 확장)라고 부른다.

“교환은 발명되어야 햇다. 대부분의 동물에게 이것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애덤 스미스는 ‘개가 다른 개와 공평하고도 의도적으로 뼈다귀를 교환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한 교환은 성별 분업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라 저자는 추측한다. ‘남자는 사냥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채집한다’는 철칙은 교환을 전제로 한 분업이다. “남녀 사이에 하나의 진화적 계약이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잇다. 남성은 여성을 성적으로 독점하는 대신 고기를 구해오고 도둑이나 불량배로부터 불을 보호한다. 여성은 자녀 양육에 남성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채소를 구해오고 요리를 대부분 담당한다. 인간이 대형 유인원 중 ‘부부 한 쌍’관계가 오래가는 윺일한 종인 이유를 이로써 설명할 수 잇을지 모른다.’

남녀의 분업이 성립되면서 같은 원리가 다른 사람에게도 확장되었다고 저자는 추측한다. 첫번째 확장은 집단 내의 노동분업이었다. 그리고 그 분업은 교역을 통해 집단 밖으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그 확장 덕분에 우리의 조상들은 ‘먼 친척을 쓸어없애는데 매우 능”할 수 있었다. “사람과에 속하는 그 전의 종들은 하지 못햇던 일이다.”

“우크라이나 메체리히 지역의 18,000년 전 유적에서는 흑해산 조가비와 발트 해 연안산 호박으로 만든 장신구가 발견되었다. 이들 재료가 수백 킬로미터 밖에서부터 이곳까지 교역을 통해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네안데르탈인의 행태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이들의 석기는 사용장소에서 걸어서 한 시간 이내에 있는 곳의 돌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핵심적인 단서다. 아프리카 출신의 경쟁자들이 훨씬 많은 종류의 도구를 만드는 동안 네안데르탈인들은 여전히 (백만년전과 똑 같은 모양, 똑 같은 기술로) 주먹도끼를 만들어 쓴 사실을 설명할 단서 말이다. 교역이 없으면 이노베이션은 정말 일어나지 않는다.

8만-2만년전에 발명된 것이 그 전 100만년 동안의 발명품보다 많다. 당시 이노베이션의 속도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느리지만 직립원인의 기준으로 보면 번개처럼 빨랐다.”

그러면 조상들은 어떻게 왜 교역을 했을까? 저자는 이런 상상을 해본다. “예컨데 풀이 무성한 초원지대에 사는 아담을 상상해보라. 이곳에는 겨울에 순록이 많다. 그런데 여기서 걸어서 며칠 걸리는 곳의 해안에는 여름에 고기가 많다. 그는 겨울에는 사냥을 하고 여름에는 해안으로 이주해 고기를 잡을 수 잇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이동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뿐 아니라 다른 부족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또한 두가지 다른 기술에 모두 익숙해져야 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아담이 사냥을 계속 하면서 해안의 어부인 오즈와 교역을 하면 어떨까?”

교역은 성공적이었다. 아담은 물고기 대신 말린 순록을 주어 위험도 덜고 힘도 덜면서 다양한 식단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다 아담은 깨닫는다. 순록뿔을 그냥 주는 것보다 바늘을 만들면 물고기를 더 많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오즈는 바늘을 받다 나중에 미늘이 있는 낚시 바늘을 요구한다. 아담은 훈제된 물고기를 요구한다. 그러다 가죽도 무두질해 바꾸게 된다. “이제 아담은 자신이 바늘보다 가죽을 만드는데 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가죽에 전문화한다. 순록 뿔은 자기 부족 내의 누군가에 주고 대신 가죽을 받는 것이다.”

교역은 전문화를 낳았고 전문화는 혁신을 낳았다. 그러면 교역을 하면서도 왜 수만년동안 경제적 진보가 느렸는가? 저자는 인간의 고립주의 또는 집단주의 성향 때문이라 생각한다. 개미가 다른 무리의 개미를 만나면 죽이려 들듯이 조상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집단 내에서 서로 협동을 잘하는 종일수록 집단 간에는 더 심하게 적대한다. 인류는 고도로 집단적인 종으로서 집단 내에서는 서로 돕고 집단 간에는 서로 폭력을 행사하는 버릇을 여전히 가지고 잇다.”

그런 이유로 “뉴기니에는 800개 이상의 언어가 있다. 하지만 이웃 집단의 언어는 영어와 프랑스어만큼이나 서로 알아듣기 어렵다. 지구상에는 여전히 7000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각각의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은 이웃 집단으로부터 용어, 전통, 의례, 취향을 도입하는데 뚜렷한 저항을 보인다. 그럼으로써 전문화와 분업의 효과를 제한해버린다.” 교역이 전문화와 분업의 효과를 보이려면 시장의 규모가 커야 한다.

“당신이 고기잡이 작살을 한 개 만들어야 한다면 작살 만드는 교묘한 도구부터 제작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나 어부 다섯 명이 쓸 작살을 만들어야 한다면 작살 제작 도구를 먼저 만드는 것이 합리적으로 시간을 절약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집단주의의 장벽은 시장의 규모를 제한했고 혁신을 제한했다. 시장의 규모를 키우는네트웤이 제한될 때 결과는 정체나 퇴보이다. “현대 수렵채집인들의 경우 인구가 많은 교역 상태게 접근할 기회를 차단당한 지역이 많다. 예컨데 인구밀도가 낮은 호주 그중에서도 태즈메니아 섬과 안다만 제도가 그렇다. 이 경우 이들의 기술적 기교는 정체되어 있으며 네안데르탈인 수준 이상으로 발전한 경우가 거의 없다.” 우리 조상들의 우위를 “만들어낸 것은 그들의 교역 네트워크, 즉 집단지능이다.”

그러나 교역은 인간의 본능에 각인되어 잇다고 저자는 본다. “모든 탐험가는 새로운 부족을 만난 지 몇 시간 또는 며칠 내에 교역을 시작했다. 1834년 티에라 델 푸에[고에서 다윈이라는 젊은 박물학자가가 어떤 수렵채집인들과 얼굴을 맞대게 되었다. ‘일부 원주민은 자신들이 물물교환의 개념을 확실히 알고 잇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나는 한 원주민에게 대가를 바란다는 어떤 몸짓도 없이 큰 못(가장 귀중한 선물)을 주었다. 그는 즉시 물고기 두 마리를 들더니 창에 꿰어서 나에게 건넸다.’”

우리의 사촌들과 달리 조상들이 집단주의의 장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은 낯선 사람을 ‘명예 친구’로 받아들이는 능력 덕분이었다. 처음 보는 ‘타인을 신뢰할 줄 아는 인간의 재능 덕분이다. 모르는 사람을 처음 대할 때 당신이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아마도 미소를 짓는 경우가 제일 흔할 것이다. 신뢰를 나타내는 작고 본능적인 제스처 말이다. 현대 사회에서 놀라운 점은 당신과 서로 모르는 가게 주인이 서로를 믿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신뢰는 후퇴하는 일도 자주 있었지만 대체로 점진적이고 발전적으로 성장하고 넓어지고 깊어졋다. 이는 교환 덕분이다. 교환은 신뢰를 낳으며 그 역도 똑 같은 정도로 진이다. 당신은 의심스럽고 부정직한 사회에 살고 잇다고 스스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막대한 신뢰의 수혜자다. 신뢰가 없었다면 사람들을 잘살게 만드는 노동의 작은 조각들의 교환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수렵채집과 같은 단순한 경제에서 사용하는 기술조차도 교역을 통한 전문화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류학자들은 교환할 잉여를 생산할 수 있는 농업이 상업을 낳았을 것이라 추정하지만 저자는 그 이전 구석기 시대부터 교역이 있었고 교역 없이는 수렵채집 경제의 단순한 생활방식조차 유지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농업 자체가 가능했던 이유를 교역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농업에 전문화하고 잉여 식량을 생산할 인센티브가” 교역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최초의 농업 정착지들과 관련해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이들 지역이 교역 타운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농업을 발명하게 만든 압력 중 하나는 부유한 상인들에게 식량을 대고 취할 수 있는 이익으로부터 나왔다고 추측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 목적은 흑요석이나 조개껍데기 혹은 기타 좀 더 잘 부서지거나 썩기 쉬운 물건으로 교환할 수 있는 잉여물을 창출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교역이 농업보다 먼저 있었다. 농업은 교역의 또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농업이 작동하는 것은 교역망 속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복잡한 경제인 농업 자체가 저자에 따르면 인간 이외의 “다른 종을 포함시키기 위해 전문화와 교환을 확장한 것이다.” 그리고 농업으로 자본의 축적을 가능해졌고 “자본이 등장하자 혁신의 속도가 곧바로 빨라졌다. 초기 수익이 전혀 없는 프로젝트에 시간과 자산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농업의 등장으로 변한 또 다른 것은 인구밀도의 폭증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구밀도가 높아지면 교역 네트웤의 밀도도 높아지고 네트웤의 밀도가 높아지면 축적된 자본과 함께 혁신의 속도도 높아진다.

저자는 교역의 확장은 인간의 도덕도 혁신햇다고 말한다. “상업화 이전의 세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일이 통상 일어나는 곳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전후해 “비로소 노예제도, 아동노동, 여우튕기기나 투계 같은 여흥이 용납되지 않게 되엇다. 지난 20세기는 생활이 더욱 많이 상업화된 시대였다.” 그러므로 “시장 시스템은 악덕이기는커녕 이기주의를 완전히 고결한 어떤 것으로 바꾸어놓는 무엇이다. 사람이 살해될 확률은 17세기 이후 모든 유럽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떨어졋다. 이 또한 교역에 몰두한 네델란드와 잉글랜드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엇다.” 그러므로 환경운동가들의 낭만주의와 같이 “경제적 변화는 포용하면서 그 사회적 결과는 혐오하는 보수주의 운동, 사회적 결과는 사랑함녀서 이를 발생시킨 경제적 원천은 미워하는 자유주의 운동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는 노예제를 끝장냈고 자본주의와 함께 빈곤도 감소했다. 17세기 영국인의 “절반이 비참한 가난 속에서 살았다. 이들은 자선 구호를 받지 못하면 굶어죽곤 했다. 산업혁명기에도 가난한 사람은 많았지만 이런 규모는 아니었고 정도가 이렇게 심하지도 않았다.

불평등 문제도 그렇다. 신장과 생존 자녀수를 보면 최상류층과 극빈층간의 차이는 산업혁명기에 줄어들었다. 산업혁명 초기의 빈곤이 우리에게 그렇게 심하게 느껴지는 것은 작가와 정치인들이 처음으로 눈길을 돌리고 문제로 삼았기 때문이지 전에 없던 빈곤이 새로 생겼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번영을 가져왔다. “자본가의 위업은 실크 스타킹을 여왕들에게 더 많이 공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공들도 어렵지 않게 구매할 수 있게 만드는데 있다. 자본가는 스타킹 살 돈을 벌기 위해 여공들이 해야 하는 일의 양을 꾸준히 줄여준다.” 슘페터의 말이다.

그러나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비관적으로 ‘성장의 종말’을 예보했다. 스미스의 ‘보이지 앙않는 손’이 완전한 정보를 가진 무한한 수의 시장 참가자들을 이윤 제로의 균형점과 수익 제로 상태로 이끌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완전경쟁 시장이라는 개념은 그저 추상화에 불과할 뿐이 아니다. 완전한 바보짓이다. 책에서 균형이라는 단어를 보면 앙 지워버려라.” 시장의 확대로 만들어지는 혁신, “신지식의 가능성이 정체상태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어딘가의 누군가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발명의 목적은 시장에 불완전성을 만들어내고 이를 이용하려는 것이다.” 경제학이 가정하듯 완전정보는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이에크가 주장햇듯, 지식은 사회전체에 퍼져 있으며 이는 각자가 나름의 특수한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은 결코 한 장소에 집결될 수 없다. 지식은 개인적이 아니라 집단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저자는 시장에 의해 가능한 집단지성을 이노베이션 영구기관이라 부른다. “현대 세계에서 혁신을 지속적으로 확대시키는 것은 아이디어 교환의 지속적인 확대이다. 지난 2세기 동안 경제가 급속히 성장한 것은 그 전의 어느 시대보다도 아이디어들이 서로 잘 섞였기 때문이다. 발견은 고속 증식하는 연쇄반응이고 혁신은 피드백 루프이며 발명은 자기 충족적 예언이다. 나라에서 나라로 산업에서 산업으로 쉽게 옮겨다닐 수 있다는 전제만 충족된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자유교환 경제 하에서 균형과 침체는 피할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애초에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들리는 것은 종말론자들의 북소리라고 저자는 한탄한다. “20세기 후반의 특징은 절망적 예언이 봇물을 이뤘다는 것이다. 그 규모는 전례 없는 것이었다. 파멸이 잇따라 예고됐다. 핵전쟁, 오염, 인구 과잉, 기근, 질병, 폭력, 기술의 복수…” 그러나 어느 것도 틀리지 않은 것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인류는 집단적인 문제 해결 기계가 되었으며 이 기계는 수단을 변경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이제 세상은 네트웤으로 연결되었고 아이디어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문란하게 서로 섹스를 나누고 잇다. 그러니 혁신솓도는 배가도리 것이다. 경제적 진화 덕분에 21세기의 생활수준은 과거 상상도 못했던 수준으로 높아질 것이고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조자 생존적 필요만이 아니라 욕구를 충족시킬 여윺를 갖게 될 것이다.

물론 고통받고 허덕이는 사람들의 수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바랄 수준보다 아직도 훨씬 많다. 활발한(‘행동하는’이 맞을 듯. active가 원어로 보이는데 오역으로 보임) 낙관주의를 갖는 것이 도덕적 의무인 것은 정확히 이 때문이다.”

빈곤의 미래는 밝을 것이고 밝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이다. 우리에겐 이미 의무를 행할 수단이 주어져 있다. 그리고 그 수단과 의무는 환경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환경 재앙이 어렴풋이 다가오고 있으니 절망하라고 충고하거나 성장을 늦추하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세상을 개선하기 위해 인류가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나 도덕적 관점에서나 잘못을 저지르고 있을지 모른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기술발전이 전혀 없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미래를 예측하고 그것이 끔찍하리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흔한 수법이다. 이것은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다. 만일 발명과 발견이 계속 이어지지 않는다면 미래는 정말 끔찍할 것이다.

인간이 교환과 전문화를 번창시킬 수 있는 지역이 어딘가에 있는 한, 지도자들이 이를 돕든 방해하든 문화는 진화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번영이 확산되고 기술이 진보하고 빈곤이 줄어들며 질병이 후퇴하고 출산율이 떨어지며 행복이 증가하고 폭력이 축소되며 환경이 개선되고 자연보전 지역이 확대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21세기는 살기에 아주 근사한 시대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 거리낌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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