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인간학 - 셰익스피어, 인간의 본성을 그리다
오다시마 유시 지음, 장보은 옮김 / 말글빛냄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브레히트의 무대는 특이하다. 배우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다든가, 날카롭고 밝은 조명으로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든가 액션 중간 중간에 노래를 집어넣어 흐름을 끊는다든가 리허설 중에 대본의 말을 삼인칭이나 과거시제로 바꿔 쓴다든가 연출이 배우보다 더 큰 소리로 지시한다든가 등등



브레히트 무대의 이런 특이함은 의도적이다. 브레히트는 예술을 위한 예술에 반대했다. 그는예술은 정치적 행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이 정치적이 된다는 것은 현실을 보여주어 관객이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연극의 전통은 그런 생각하기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브레히트는 생각했다. 자신과 주인공을 동일시하면서 감정적이 된다. 그래서는 이성적으로 현실을 볼 수 없다.



브레히트는 무대와 관객을 띄워놓기 위해 기괴하달 수 있는 기법들을 개발해야 했다. 그래서 그의 기법을 거리두기 효과(소외효과로 잘못 번역되기도 하지만 거리두기가 맞다)라 한다.



“20세기 후반이 되면 브레히트는 그저 사실적 리얼리즘으로 남는다. 즉 일상생활을 2시간만 잘라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시점을 가진다. 이때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는다. 현대극은 바로 거기에서 오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모습을 전부 바라보려는 입장이었다. 인간을 전부 바라보고자 한 시점에서 이미 셰익스피어는 현대적이었다.”



그러면 저자는 셰익스피어의 무엇이 현대적이라는 것인가?



인간을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셰익스피어의 시선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시선은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눈, 당사자가 아니라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자유의 눈”이라 저자는 말한다.



샤일록의 말을 들어보자. “유대인은 눈이 없고 손이 없소? 오장육부가, 사지가 감각, 감정, 정열이 없단 말이오? 예수쟁이들하고 뭐가 다르오? 같은 음식을 먹고 칼로 찌르면 상처가 나고 같은 병에 걸리고 같은 약으로 치료하면 낫고 똑같이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데, 우리는 뭔가를 느끼지도 못한다고 하는 것이오? 찌르면 피 한 방울도 안나고 간질여도 웃지 않고 독약을 먹여도 우린 죽지도 않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아무리 심한 짓을 당해도 복수란 하면 안 된다는 것이오?”



샤일록이 자신의 정당성을 외치는 말이다. ‘베니스의 상인’ 공연을 보면 샤일록 역은 그 극단에서 가장 관록있고 연기력이 뛰어난 사람이 맡는다.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며 극중에서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렵고 비중이 커진 것은 셰익스피어가 극본을 그렇게 썼기 때문이다. 위의 대사처럼 유대인의 진실을 담았기 때문이다. 샤일록이 주인공이라면 ‘베니스의 상인’은 유대인 비극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시대는 반유대주의가 지배하던 시절이었고 셰익스피어 역시 유대인에게 동정적이지 않았다. 그러면 셰익스피어는 왜 그리고 어떻게 위와 같은 대사가 나올 수 있었고 샤일록 같은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는가?



“셰익스피어는 한 인물을 표현할 때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묘사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주인공은 자신의 의견을 대변하는 인물이고 악역은 그 반대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인간을 그려내는 방식은 샤일록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도 기독교인과 다를 바 없지 않느냐고 그의 내면에서 외치는 절규까지 묘사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무대에선 “그 어떤 조연이건 악역이건 간에 대사를 하고 있을 때는 주인공이라는 의식, 즉 나는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생각을 갖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극작가들은 주연에게만 초점을 맞추지 단역에게까지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는 왕이건 시민이건, 정원사이건 대사를 할 때는 세상의 중심에 잇다.”



그런 셰익스피어의 시선을 저자는 한발 물러서서 보는 눈, “리얼리즘의 눈”이라 말한다. “그 반대는 이상주의이며 인간의 좋은 부분만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하며 “부정적인 면을 냉정하게 비판하고 없애려 하지 않는다. 그런 면도 포함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것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셰익스피어의 사실주의는 그의 작품에 “인간미가 넘치는 따듯함과 재치”를 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리얼리즘과 유머의 일체화는 셰익스피어가 가진 큰 특징 가운데 하나다.”



저자는 ‘헨리 4세’에 나오는 폴스타프를 예로 든다. 헨리 5세가 되기전의 왕자 할의 술친구이다. “나쁜 짓이라면 워든 좋아하는 주제에 한편으로는 겁쟁이다. 그는 반란군과 맞서 싸워야 할 때 ‘술자리에는 가장 먼저 달려가지만 전쟁터에는 가장 마지막에 가지.’라는 대사를 남긴다. 이것이 리얼리즘이다.”



“전쟁터에는 가장 마지막에, 술자리에는 가장 먼저,

이것이 겁쟁이 무사와 식충이를 유지하는 비결이지.”



셰익스피어 당대의 연극을 지배했던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기사에게는 전쟁터에 가장 먼저 달려가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다.” 그러나 리얼리즘으로 그려진 기사 폴스타프는 관객의 웃음을 유도한다. “그는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인물 중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많다. 왜일까. 바로 유머가 있기 때문이다. 하는 말만 들어서는 허황된 소리만 하는 것같지만 그의 전체적인 삶을 보면 바로 같은 면이 많아도 결국엔 사랑스러운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셰익스피어의 진면목이다. 인간은 이상적인 모습뿐 아니라 어두운 면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셰익스피어식의 유머이다. 한발 물러서서 그 모든 걸 바라보면 사람이 다 이런 거지 하고 느낄 수 잇는 따뜻함, 바로 거기에서 유머가 생겨난다.”



저자는 셰익스피어의 리얼리즘은 그의 삶과 그의 시대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아버지는 읍장을 지낸 부유한 상인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두었기에 부잣집 도련님으로 유년기를 보낸다. 그러나 소년기에는 아버지의 파산과 함께 모든 것이 달라진다.



“유년기의 셰익스피어가 마을을 걷고 있으면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웃음을 보였다. 사람은 다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소년기가 되어 집안이 몰락하자 갑자기 모든 이들이 외면하고 등을 돌린다. 겉으로는 웃고 잇지만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에 내재된 인생관과 인간관은 ‘인간에게는 행복이 있으면 불행도 있다. 인간에게는 겉모습이 잇으면 속마음도 있다’라는 것이다.” 학자들은 그런 셰익스피어의 인간관을 “겉보기와 진실의 문제’라고 부른다.”



소년기의 경험에서 셰익스피어가 배운 것은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교훈이 아니었을까 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교훈은 종교개혁으로 신앙이 흔들리던 시절,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흔들리더 시절의 분위기로 더 깊어졌을 것이다. 선과 악의 절대기준이란 없고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선과 악이 떠도는 셰익스피어의 무대는 그런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저자는 짐작한다.



그렇기에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등장인물은 자신이 놓인 구체적 상황 속에서만 생각한다.그것이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을 때의 철칙이다.” 셰익스피어의 무대에선 셰익스피어는 사라진다. 오직 대사를 가진 등장인물만 잇을 뿐이다. 그의 무대에서 작가는 등장인물의 대필자에 불과하다. “셰익스피어는 오피니언 리더도 아니며 새로운 철학을 설명하는 자도 아니다.” 그저 있을 법한 인간을 보여주면서 “공감하기 쉬운 내용으로 ‘나도 그렇다’라고 받아들이게 만든다. 나처럼 슬퍼하고 잇는 사람이 주변에도 많다고 위로를 해준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그런 시선을 가졋었기에 괴테는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면 그가 인간의 본성 전체를 모든 면에서 그리고 모든 깊이와 모든 높이에서 철저히 연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그 이후에 등장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 역시 “그렇게 생각해 극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셰익스피어의 세일즈맨’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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