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은 퇴계 이황의 어록이다. 이책에 수록된 것은 퇴계 자신의 말은 맞지만 퇴계 자신이 기록한 것은 아니다. 논어와 마찬가지로 퇴계의 사후 제자들의 기억을 모은 것이다. 이책이 공자의 어록이랄 수 있는 논어와 다른 점은 제자들의 편집을 주제별로 역자가 재편집했다는 것이다. 역자의 의도는 논어와 마찬가지로 퇴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퇴계의 말과 행적을 보면서 느끼도록 하는데 있다. 그러면 이책이 보여주고자 하는 퇴계의 생각은 무엇인가? “중국 송대 사대부 사회가 성립하면서 동시에 신유학이 그들의 이념으로 등장하였다. 사대부들은 새로운 이념에 맞는 새로운 예법을 필요로 햇다. 그들은 당시의 풍속과 법제에 맞고 누구나 쉽게 따를 수 있는 간결한 형식의 예법을 갖추어 나갔다. 사대부들의 예법은 신분에 따라 예법의 차별이 검격하게 지켜지던 이전 왕조의 예법과는 달리 신분과 지위에 따른 한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보편적인 예를 추구하였다. 퇴계 또한 주자와 같은 고민을 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성리학을 사회의 지배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주자가례’로 대표되는 성리학의 예법은 16세기 조선과 시대도 지역도 풍습도 다른 현실에 기반한 형식이엇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것이 퇴계의 질문이엇다. 시대도 나라도 고민도 다른 주자학을 어떻게 조선에 맞게 할 것인가? 그러나 문제는 ‘스승’이 없다는 것이엇다. 퇴계 자신 성리학을 독학으로 마스터햇다. 이책은 그가 책만 붙잡고 성리학을 알기 위해 얼마나 고투를 해야 했는지 보여준다. “내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나를 깨우쳐줄 스승이나 벗이 없었다. 갈팡질팡 헤맨지가 수십 년이건만 어디로 돌아가서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부질없이 마음과 생각만 허비하고 말았다. 그래도 찾아 헤매는 일을 그치지 않고 밤새도록 고요히 앉아 있으면서 잠을 자지 않다가 결국 마음의 병을 얻어 아예 공부를 못한 것이 여러 해엿다. 만약 스승이나 벗이 있어 미로를 빠져나갈 길을 가리켜주었다면 어찌 이처럼 헛되이 애만 쓰고 늙도록 얻는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겸사의 말이다. 퇴계는 혼자의 노력으로 한계를 극복했고 그 노력은 범상하지 않았다. “선생의 집에 주자의 문집 사본 한 질이 있었는데 책장이 몹시 낡아 글자의 획이 거의 깎여나갈 지경이엇다. 너무 많이 읽서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것을 보면 선생이 그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 뒤 사람들이 주자의 문집을 많이 간행했는데 새책을 얻을 때마다 반드시 대조하여 표시하고 고쳤다. 그런 식으로 한 번 지나가며 다시 익히니 장마다 서로 통하고 구절마다 환하게 익숙해져서 손으로 잡고 발로 디딘듯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듯이 받아들여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상의 말이나 행동 및 주고받고 들고나는 모든 의리가 이 책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누가 혹시 어렵고 의심나는 것을 물으면 반드시 이 책을 끌어다 대답하엿는데 또한 그 상황과 맞지 않거나 도리에 마땅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것은 곧 몸소 깨달은 견해가 확실하게 마음과 정신을 하나로 통달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얻을 수 잇는 것이 책에 기대어 그저 입으로 읊고 귀로 들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선생과 같은 분은 글을 잘 읽었다고 이를 만하다.” 퇴계의 위대함은 자신은 책으로만 이해해야 했던 성리학을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도록 스승이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이해하지 못할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는 어렵게 익혔지만 그 어렵게 익혔기에 문자가 아닌 본질을 요점을 알 수 있었고 쉽게 가르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스승이 있었다는 것이 남인의 장점이엇다. 책에서 무엇이 요점인지 무엇을 봐야 하는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틀을 잡아줄 스승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스승이 없었다는 점이 서인의 문제엿다. 스승이 없으니 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서인들의 공리공론이 시작된 이유 중 하나엿다. 퇴계가 조광조를 비판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조광조는 타고난 자질이 정말로 아름다웠으나 학문의 힘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시행한 바가 너무 지나쳤다. 그렇기 때문에 사업이 끝내 실패하고야 말았다. 만약 학문의 힘이 이미 갖추어지고 덕성의 도량이 완성된 뒤에 벼슬길에 나와 세상일을 맡았더라면 이룩한 바를 쉽게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 조광조의 문제가 뭐였는지 에두르는 이 말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퇴계가 지적한 것은 책상머리 관념론이었을 것이다. 조광조는 실제 그런 사람이엇다. “중종 13년 '오랑캐의 수장인 속고내가 국경에서 가까운 곳으로 나와서 사냥중.' 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속고내는 원래 조선에 투항을 하였던 여진족 추장인데 그 뒤에 변심하여 갑산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당시 혼란을 틈타 다른 여진족 역시 공격에 가담해 변방이 어지러웠다. 보고를 들은 조정은 소수의 정예 병력으로 속고내를 잡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당시 부제학이었던 조광조는 중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왕의 움직임은 신중해야 합니다. 반드시 이치에 맞은 뒤에 행동해야 합니다. 지금 속고내가 공격하려는 마음이 없고 다만 사냥하러 왔을 뿐인데, 기습하여 사로잡는단 말입니까? 도적처럼 행동하여 기습한다면 의리에 맞겠습니까? 속고내가 죄가 있다면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영의정 정광필이 조광조의 말은 유학의 도리에는 맞지만 변방의 일은 해결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조광조는 “군주가 오랑캐를 대하는 데는 변경을 충실하게 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여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고, 저들이 먼저 변경을 소란하게 하여 적이 우리에게 침범하면 부득이 대응하되, 서서히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본디 사리에 마땅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의 병력을 살피고 헤아려야 하며 가벼이 움직여서는 불가한데, 하물며 명분 없는 일까지 해야 합니까? 신은 변방의 일만 일으키고 국가의 체면만 크게 상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병조판서 유담년이 화가 나 중종에게 말했다. “ 밭을 가는 일은 남자 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를 짜는 일은 여자 종에게 물으라는 옛 말처럼 이번 일에는 소신의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중종은 훈구파를 무시하고 조광조의 사림파 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중종 때 조선의 변방은 편할 날이 없어서 조정에서는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국경을 지키는 조선군은 번번이 패배하였고 중종 18년 여진정벌전을 계획하였으나 허공교전투에서 조선토벌군이 패배하였다.” “뭐 좀 안다는 놈들이 세상을 위한다며 나서지 못하게 하라.” 노자의 말이다. 그 학문은 뛰어날지 모르지만 조광조는 전략적 식견이 모자랐다. 그리고 그가 주장한 이상주의적인 왕도정치도 그러했다. 조광조를 변법을 주장한 송나라의 개혁가 왕안석에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왕안석은 무리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고 현실감각이 있는 합리주의자였다. 그가 내놓은 개혁안(신법)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얻어 시행한 것이었기에 실제로 그의 신법은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조광조가 내놓은 개혁안들은 말은 좋지만 실현성은 전무한 것이었다. 속고내 문제에서 그가 한 말과 다를 것이 없었다. 조광조가 발군의 실력을 보인 것은 구체적인 개혁안이 아니라 말로 하는 정치투쟁뿐이었다. 조광조는 스승이 없이 혼자 책만 보다 망한 예이다. 이책은 조광조 같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스승이 되어준 퇴계를 실생활과 관련된 예법의 해석을 통해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그리고 일상의 실천이어야 하는 유학의 이론가로서 퇴계가 실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춘다. 우선 스승으로서의 퇴계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엇다. “그의 행동은 고상하지도 기괴하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선생의 평범한 일상을 소개하는 제자의 글에는 어떤 떨림이 잇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감동과 자부심의 떨림이다. 평범한 교사는 말만 하고 좋은 교사는 설명을 하며 훌륭한 교사는 모범을 보이고 위대한 교사는 제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 소개된 퇴계 선생에 대한 묘사를 보면 제자들이 선생이 보여주는 덕성의 경지를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자신들이 받은 삼동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어쩔 줄 몰라 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퇴계는 성리학을 말로만 글로만 배운 것이 아니라 유학이 성리학이 요구하는 그대로 삶에 실천했고 제자들의 감동은 그런 몸으로 보여주는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의 학문은 일상의 행동거지나 말투에 적용해도 쉽고 분명하였으니 지나치게 고상하거나 어려운 것이 없었다. 하지만 겉모습이나 행동거지가 모두 예에 맞으니 참으로 남들이 따를 수 없는 오묘함이 있었다.” 이책은 성리학을 조선의 땅에 맞게 그리고 자신의 삶에 맞게 이해했던 퇴계가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스승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그의 말과 행적을 통해 보여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