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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의 현실부정
리차드 S. 테들로우 지음, 신상돈 옮김 / 아이비북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1985년 중반이었어요. 그 때는 목표도 없이 1년을 속절없이 보낸 후였지요. 고든 무어와 나는 내 사무실에서 우리 회사의 곤경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분위기는 침울했고…
나는 창밖으로 저 멀리 놀이공원에서 빙글빙글 도는 회전관람차를 바라봤어요. 그러고는 고든을 돌아보며 물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쫓겨나고 이사회가 새로운 CEO를 영입한다면 그는 뭘 할까요?” 고든은 주저없이 대답했어요. “메모리에서 손을 때라고 하겠지.”
나는 아득해지면서 그를 빤히 쳐다봤어요. 그러곤 말했죠. “그렇다면 당신과 내가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직접 그렇게 하면 안 될까요?””
우리가 아는 인텔이 태어난 순간이다. 1985년이면 IBM PC 덕분에 인텔은 CPU 시장의 강자가 되어 있었고 그 지위는 지금까지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호재에도 불구하고 인텔은 존폐의 위기에 있었다.
고품질 저가격을 내세운 일본업체들의 공세에 인텔의 메모리 부문은 벼랑 끝까지 몰려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밖에서 보기에는 인텔의 사정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떠오르는 CPU 시장의 지배자가 될 것이면서 왜 회사가 존폐 위기에 있는가? 그냥 메모리를 포기하면 되지 않는가?
그러나 안에서 본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인텔은 메모리로 시작햇고 메모리는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CPU는 어쩌다 팔리는 부수적인 제품일 뿐이었다. 회사의 핵심역량은 메모리 기술에서 나오기 때문에 메모리를 포기하면 회사의 미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무어와 글로브의 대화는 불교의 선문답과 같다. 화두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듣기에는 도대체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두를 주고 받는 사람 사이에선 말이 된다. 한 방울만 떨어지면 넘치는 물동이 같은 상태에 있는 제자에게 물 한 방울을 더해 물이 넘치도록 하는 스승의 한 마디가 화두이다. 제자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말이다.
무어와 글로브가 대화를 하던 순간이 그렇게 물이 넘치기 직전의 순간이엇다. 그들은 인텔이 메모리 회사라고 믿어왔지만 몇 년동안 일본회사와의 경쟁에 밀리면서 과연 그럴까? 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것이다. 지긋지긋한 시장을 떠나 떠오르는 시장에 전념하면 안되나? 그러나 10여년을 버텨온 고정관념이 그런 질문에 반박하는 수십가지 이유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글로브가 무어에게 무심코 질문을 던졌을 때 그 고정관념의 합리화가 무너지려는 순간이 왔고 새로운 관점을 회사를 보는 순간이 불교식으로 말하면 깨달음의 순간이 온 것이다.
이상은 이 책의 인텔 챕터의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무어와 글로브의 대화는 수많은 경영서적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책처럼 그 대화의 문맥과 그 대화가 나오게 된 심리적 역학을 자세하게 파고 드는 책은 없다. 바로 이런 디테일이 이책의 장점이다.
이책은 현실을 부정하는 자기기만, 특히 경영자들의 자기기만을 다룬다. 자기기만에 관한 책은 이책만이 아니다. 그리고 더 뛰어난 책도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어 작년에 번역된 짐 콜린스의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는 이책보다 더 뛰어나다.
이책의 저자는 경영사 학자이다. 그러나 경영사에서 대가로 불리는 챈들러와는 글쓰기의 스타일이 다르다. 챈들러는 경영교과서에 빠지지 않는 M형 조직 같은 개념들을 쏟아낸 학자이다. 그러나 그 개념들은 경영사의 풍부한 팩트와 함께 제시된다. 그의 책은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이야기를 읽는 재미와 그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개념을 이해하는 지적 즐거움을 모두 즐길 수 있는 드문 수작이다.
짐 콜린스의 책도 그러하다. 그는 자기기만으로 어떻게 위대한 기업이 무너지는가를 풍부한사례와 함께 제시하면서 구체적인 현실부정의 단계를 정식화해 보여준다.
이책이 다루는 내용은 짐 콜린스의 책과 그리 다르지 않다. 콜린스의 책처럼 성공한 기업이 어떻게 자기기만 (또는 콜린스 식으로는 오만)의 희생자가 되어 무너져 가는가 그리고 그런 자기기만 때문에 빠져든 위기에서 어떻게 정신을 차리고 빠져나오는가를 다룬다. 그러나 저자의 스타일은 팩트와 개념이 균형을 이루는 글쓰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위에서 요약한 인텔의 사례와 같이 이책의 장점은 풍부한 디테일과 그 디테일을 드러내는 저자의 깊이 있는 분석력에 있다.
이책이 다루는 사례들은 대개 다른 책에서도 볼 수 잇는 사례들이다. 포드가 어떻게 GM에게 무너졌는가, 미쉐린이 어떻게 타이어 시장을 장악하게 되엇는가, A&P와 시어즈의 몰락, 위기관리의 교과서로 불리는 타이레놀 사건 등 경영서적을 꽤 본 사람이라면 처음 보는 케이스는 별로 없다.
그러나 위에서 본 인텔의 케이스처럼 이책은 다른 책에서는 만나기 힘든 디테일과 디테일에 대한 분석이 돋보이는 책이다. 경영자의 자기기만이란 주제에 관심이 잇다면 짐 콜린스의 책과 함께 읽어볼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