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살겠다 갈아보자’는 1956년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던 민주당이 내세운 표어다. 당시 표어는 민중의 호응을 얻었고 집권당의 제지를 뚫고 수십만 인파가 구름처럼 한강 백사장에 모였다. 그 후 60년도 더 흐른 2019년 그 시절의 모습이 재현되고 있었다.” “대형 방음기에 막혀 군중이 외치는 소리도 넘어오지 못햇다. 빈부, 남북, 좌우, 내국인과 외국인, 선과 악… 이분법은 컴퓨터 뿐만 아니라 세상을 가르는 기준이다.”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대한민국 영토가 보였다. 하늘에서 보기에도 부자동네와 가난한 동네는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부자동네가 산뜻한 파스텔 톤이라면 달동네는 황사가 덮여 우중충한 똥색으로 갈아앉아 있었다. 부자들은 발달한 보안기술을 이용해 자신들만의 견곻란 성을 쌓았고 그들이 만들어 배부한 표식이 없으면 누구도 그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인공지능이 발달하자 사람이 하던 일이 손쉽게 기계로 대체됐다. 유휴인력이 남아돌아 먼지처럼 떠돌아 다녔지만 그들을 채용하려는 기업이 없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학력 인플레가 본격화됐다. 이제 대졸자가 회사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려웠다. 박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낙엽만큼 많았다.” 가난뱅이는 언제나 살기 힘들다. 그러나 그 도가 지나친 세상이 되었다. “환경오염과 그로 인해 이어진 물 부족은 세계적인 문제였다. 물 부족으로 식량 부족으로 이어졌고 빈민들은 오염된 물로 키운 유전자식품을 먹었다. 부자들은 위생적으로 처리된 유기농식품을 먹었다. 부자들의 한 끼 식사비용이 가난한 자들의 한 달 식사비용보다 많았다.” 이 소설이 배경으로 하는 얼마 남지 않은 미래의 한국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포보스라는 테러집단이다. 모든 테러집단들이 그렇듯이 이들은 현실을 부정하는 이상을 꿈꾼다. 포보스란 집단이 꾸는 꿈은 ‘사람들이 원하는 국가를 만들어 그 국가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이 자신의 고향을 조국을 선택할 수는 없다. 그저 우연히 거기에 태어날 뿐이다. “이 땅이 싫으면 그 사람이 떠나면 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 땅에 살 권리가 있어. 문제는 땅이 아니라 국민을 만족시키지도 못하면서 다른 선택도 못하게 하는 정치체제야.” 포보스는 그것을 불합리라 부르며 사람들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려 한다. 사람이 만든 다른 모든 것처럼 국가 역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제 그 국가가 오히려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 포보스는 말한다. “작년에 한국에서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하거나 굶어 죽은 사람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테러로 죽은 사람의 백 배가 넘습니다. 이런 법질서를 지켜야 합니까? 왜요? 전 세계의 11억 인구가 비만인데 이와 비슷한 숫자의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 잘못된 세계, 잘못된 국가, 잘못된 정책은 바로 잡으려 하지 않고 그런 부조리를 뜯어 고치려는 조직을 없애려 합니까?” “인터넷의 발달로 직접 선거가 가능한 세상이 됐고 정보의 공유로 권력의 독점도 막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기업이 만든 물건을 일방적으로 구입하던 소비자들이 지금은 자신에게 맞는 맞춤형 제품을 요구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런데 왜 국가는 그러면 안되는가? 이들의 질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선택의 자유를 줄 것인가? 세계를 도시국가로 나누면 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앞으로 국민이 국가를 선택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국가로 몰려갈 것입니다. 왜 그 나라에 태어났다는 한 가지 이유로 온갖 부조리를 감수하며 그 나라 국민으로 죽어야 합니까? 포보스연합이 아니더라도 굳이 국가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국가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자유도시가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지금은 이민이 쉽게 허용되지 않지만 국가가 많아지면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이민도 원활해져. 최종목표는 마을 단위의 국가를 만들어 노자의 소국과민을 실현하는 거야. 백만 개 정도의 국가를 만들면 과거의 국가개념은 사라지게 될거야.” 그러나 지금의 국가제도가 만들어진 것은 다른 국가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한 최저의 규모를 만든 결과이다. 이들의 비전은 신선하면서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적일까? 이 소설의 설정에 따르면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다. 이들은 다국적기업을 장악해 재력을 갖추고 그 재력을 기반으로 첨단군사기술과 핵으로 무장한다.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전략을 짜고 그 전략에 따라 일어나는 사건이 이 소설의 내용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과연 그들의 꿈이 현실적일까? 작가도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같다. 이들의 꿈은 결국 실현되지 않는다. 저자는 그 이유를 사랑으로 제시한다. 사랑 앞에 무력해지면서 그들의 꿈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란 은유는 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왜 아이를 낳으려 하지? 어차피 그 아이는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될텐데” “그럼 너는 왜 도시국가를 만들려고 하는 거야?” “지금 국가체제보다는 나으니까. 도시국가가 세워진다고 인간의 고통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아. 환경은 갈수록 나빠지고 자원도 고갈돼 갈 거야.” 너무 이성적이다. 그들의 이상은 그렇게 차가운 논리의 구축물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렇게 작가는 암시한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만들고 지켜야 할 게 있어.” “그게 뭔데?” “가족” 가족을 만들고 지키는 것처럼 국가 역시 손익계산만으로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저자가 이 소설에서 내리지 못하는 결론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