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울프 홀 1 - 2009년 맨부커상 수상작
힐러리 맨틀 지음, 하윤숙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영국왕하면 떠오르는 이름은 거의 여왕일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 빅토리아 영왕 그리고 현재의 여왕. 영국 국가에 '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외의 남자 왕으로는 누구를 기억할까? 다른 왕들은 전혀 모르더라도 헨리8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나 황당한 왕이니까.
남자 아이를 갖고 싶다고 이혼하기 위해 온 유럽을 뒤흔들고 종교개혁까지 한 왕. 그렇게 이혼하고 결혼해 놓고는 마누라를 처형한 왕. 황당하다는 말로는 부족할지도 모르는 왕이다.
황당의 극의를 보여준 왕인 만큼 영화와 소설, 역사의 사랑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얘기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책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책은 '천일의 앤'과 같은 영화와 달리 왕과 왕의 여자들 주변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다. 종교개혁을 주도하고 왕의 이혼을 성사시켜 앤 불린과 결혼할 수 있게 했으며 앤 불린의 몰락을 지휘하고 그 후처와의 결혼을 지휘했지만 못 생긴 외국 공녀와 결혼시켰다고 왕의 미움을 사 처형된 사람, 헨리 8세의 수석장관이었던 토머스 크롬웰이 이책의 주인공이다. 이책은 황당했던 헨리 8세 시절을 크롬웰의 눈으로 그려나간다.
이책의 1권은 수석장관이 되기 이전 크롬웰이 상관으로 모시던 울지 추기경이 어떻게 몰락해 죽게 되는가를 다룬다.
이책을 읽으면서 중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시조들이 생각난다. 겉보기에는 연애시인 그 시조를 쓴 사람들은 수염이 멀쩡하게 난 할아버지들이었다. 남자가 그것도 나이도 지긋한 양반 사대부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무정한 남자를 원망하고 그리워하는 시조들. 도대체 이게 무슨 변태시냐. 그 시조들을 배울 때 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책을 보다보면 딱 그 심정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변덕스러운 왕의 속을 누가 알랴?
"그는 헨리가 추기경에게서 배운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늘 유동적인 절충적 수완과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 불명료함의 과학이었다. 국왕은 자신의 대신을 천천히 흔적없이, 애매하게 파멸시키는 데 이 과학을 이용했다. 친절을 한 번 베풀 때마다 거기에는 더 심한 죄목과 재산 몰수라는 냉혹한 처사가 뒤따랐고 이런 일이 계속된 결과 추기경의 입에서는 '그만 떠나고 싶네'라는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20년 동안 성실하게 헨리 8세의 총신으로 영국을 다스렸던 추기경의 몰락은 한가지 죄 때문이었다. 앤 불린의 미움을 샀다는 것.
"그는 생각했다. 추기경님이라면 훌륭한 왕이 되었을거야. 아주 인자하고 일처리는 자신 있게 하면서도 부드러운 왕. 아주 공정하고 기민하며 대단한 분별력을 지닌 그런 왕이 되었을거야. 추기경님이라면 최고의 통치를 펼쳤겠지."
주인공의 추기경에 대한 평가이다. 이책에서 그려지는 울지 추기경은 유능한 사람이었다. 20년 동안 2인자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그의 능력과 처세술 때문이엇다. 그러나 그런 추기경도 왕의 애인의 눈 밖에 났다는 이유로 무너져야 햇다.
주인공은 대장장이의 아들에 불과했지만 용병과 상인으로 유럽을 떠돌면서 불어, 이태리어, 스페인어는 그리스어, 라틴어를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고 국제무역과 금융의 실무능력은 물론 법률에도 능통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대법관 울지 추기경은 그를 오른팔로 기용했고 자기 후임으로 추천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능력이 있더라도 출신이 보잘 것 없는 주인공을 알아준 추기경에게 주인공은 끝까지 충성을 바친다. 주인공이 몰락한 주인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치는 것은 애정과 존경심 때문이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생각해봐. 노인네를 버리는 게 어르신에게는 아무 이득이 안 돼. 배신자라는 딱지가 붙는 것 말고 뭘 얻겠어?"
1권은 추기경이 권력의 절정에서 몰락하고 몰락한 주인의 복권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주인공을 다룬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의 눈에 비친 궁정 사람들은 그리 좋은 모습이 아니다.
"왕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왜 가지면 안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왕의 이야기가 어디로 흐르겠는가? 사랑 이야기로, 앤 이야기로,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것으로 흐를 것이다."
"추기경은 국왕이 직접 편지를 쓰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늘 말했다. 다른 국왕에게 편지를 쓸 때에도, 김지어는 교황에게 편지를 쓸 때에도 그랫다. 직접 편지를 쓰면 많은 게 달라질 경우라도 국왕은 절대로 직접 편지를 쓰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앤 불린은 왕이 직접 쓴 편지를 받았다.
왕이 원하는 것에는 많은 것이 걸려 있었다. "이번 이혼이 인정되는 경우, 또는 우리 입장에서 말할 때 교황에게서 어느 정도 강제로 승인을 받게 되는 경우 온갖 혼란스러운 파멸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당신은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요. 황제가 이모(캐서린 왕비)를 지키겠다고 잉글랜드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어요. 그러면 당신의 상인 친구들은 생업을 잃게 되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겠지요. 튜더 왕이 몰락하고 옛 귀족이 다시 세력을 회복할 거고요." 스페인 대사의 말이다.
왕이 이혼하려는, 형의 부인과 부도덕하게 살아왔다고 주장하는 여인은 스페인의 공주였고 그녀의 조카는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과부가 된 그녀와 결혼한 것은 캐서린을 처음 보았을 때 반했기 때문이었고 그의 의지였다. 형수와 결혼하는 것은 교회법에 위배되는 것이었지만 왕이 원하면 교황도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왕이 원하면 교황도 이혼에 동의할 것이었다. 그러나 사정이 복잡했다. 월급을 받지 못한 황제의 용병들이 로마를 약탁했고 교황은 황제의 포로가 되었다. 왕의 이혼은 유럽의 정치가 된 것이다.
백방으로 뛰며 전 유럽에 깔린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왕의 소원을 풀어주려던 추기경의 노력은 좌절되었다. 그리고 앤의 원한을 사고 있던 추기경은 딱 몰락하기 좋은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면 사랑에 눈이 먼 왕이 그렇게 원한 여자는 어떤 여자였는가?
"잉글랜드의 왕비는 화형을 당할 거라는 예언이 있지요. 하지만 난 예언 따위에 겁먹지 않아요. 설령 예언이 사실이더라도 나는 위험을 감수할 거에요. 어차피 일은 일어나는 법. 난 국왕을 손에 넣고야 말테니까." 왕은 그녀 자체를 원했지만 그녀는 개인으로서의 왕이 아니라 그의 자리를 원했다. 그녀 집안 사람이 다른 사람을 모두 그렇게 대하듯이 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불린 집안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존재는 두 가지뿐이었다. 이용할 사람과 버릴 사람. 남의 마음이나 평판이나 가문의 이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가 아는 앤은 아름다움 같은 덧없는 것에 마음이 움직였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덧없는 아름다움같은 것이니라 권력과 영광이었고 왕은 그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랑의 불장난에, 덧없이 사라질 감정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왕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삼켰다. 당신은 이제 마흔이고 (왕의 꿈에 나타난) 형은 당신에게 어른이 되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당신은 아서 왕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연극으로 상연했나요? 가면극은 얼마나 많았고 가장행렬은 또 얼마나 많았나요? 종이 방패와 나무칼을 들고 등장했던 배우는 또 얼마나 많았나요?" 주인공이 생각하는 왕이다.
"국왕은 혹시 재채기라도 하면 국사를 내려놓고 스스로 쉬는 날이라고 정하고는 음악을 연주하거나 비가 잦아들면 정원에서 가벼운 산책을 즐겼다."
"국왕이 잠을 설친 건 사냥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이렇게 땅이 꽁꽁 얼어붙었으니 사냥개가 움직이기 어럽지. 사냥개들이 나갈 수 없었을 거야. 양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게 아니야."
"자네가 인내심을 갖고 우리 군주를 모실 수 있을까? 군주가 낮에 올린 서류에는 서명도 않는 채 자정이 다 되도록 브랜든하고 술을 마시고 킬킬대면서 노래나 부르고 있을 때 자네가 인내심을 보일 수 있을까? 자네가 국왕을 채근할 때 국왕이 이제 잠이나 자야겠다고, 내일은 사냥을 갈 거라고 말한다면 인내심을 보일 수 있을까? 국왕을 모실 기회가 온다면 국왕을 있는 그대로 쾌락을 추구하는 군주로 받아들여야 할 거야." 추기경의 말이다.
영국의 정상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 나라는 그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그의 소유물일 뿐이니 그 나라는 자신의 욕망에 봉사해야 하는 도구일 뿐이며 그는 그 소유물에 대해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었다.
그런 왕에게 사랑은 사냥이나 마찬가지로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한때의 유희였다. 전쟁 역시 더 거창할 뿐 그에게는 마찬가지였다.
"그대는 세금때문에 이 나라가 쓰러질 거라는 이유를 들어 내가 전쟁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지. 전쟁에 나가는 군주를 지원하지 않을거라면 나라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말을 한 루이 14세가 어떤 생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전쟁을 벌여 프랑스의 재정을 파멸로 이끌었고 결국 그 재정상태 때문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만든 루이 14세. 그에게 전쟁은 자신의 영광을 위한 놀이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헨리8세에겐 전쟁도 사랑도 사냥과 마찬가지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