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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춤 - 시몬느 드 보부아르
시몬느 드 보부아르 지음, 성유보 옮김 / 한빛문화사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이책의 내용은 별 거없다. 누구나 겪었거나 겪게 마련인 부모의 죽음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이름도 유명한 보부아르 역시 죽어가는 엄마 앞에서 그리고 죽은 엄마 앞에서 갑남을녀와 다를 것 없다.
이책을 처음 열었을 때 느낀 것은 노골적인 솔직함이엇다. 주방에서 넘어져 뼈가 부러진 어머니는 몇 시간을 기어 겨우 구급차를 불렀다. 78살이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급히 병원으로 달려간 저자에게 어머니는 여전했다. 저자의 눈에 비친 어머니는 사소한 것에 별 것 아닌 것에 흔들리는 가벼운 여인이었다. 의연함, 품위가 없는 어머니. 저자는 그런 어머니를 냉정하게 그린다.
가벼움은, 줏대 없이 흔들리는 것은 어머니의 천성이었다. "평생, 엄마의 자아는 늘 외부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주변에 맞춰 행동도 자신의 생각도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어머니. "엄마는 상당한 독서를 하셨고 기억력이 좋았음에도 거의 모든 것을 금방 잊어버렸다. 상황에 따라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데 확실한 지식이나 명료한 의견은 어쩌면 자신의 입장을 바꿀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었던 것같다."
어머니의 그런 성격은 어머니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외할머니는 더 예쁜 동생을 노골적으로 편애했고 그런 편애 때문에 어머니는 자존감을 키울 수 없었다. 소녀에게 사람들이 사랑 대신 준 것은 빅토리아 식의 숨막히는 족쇄였다. "어린 시절 사람들은 엄마의 육체, 엄마의 마음, 엄마의 정신을 규율과 금기라고 하는 재갈을 물려 억압했다. 엄마는 허리띠를 단정히 꽉 졸라매도록 배웠다. 하지만 엄마의 내부에는 피가 끓고 불타오르는 여인이 숨쉬고 있었다. 뒤틀리고 여기저기 잘려나간, 스스로에게 조차 낯설게 되어 버린 한 여인이 말이다."
자존감을 가질 수 없엇던 소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키워졌다. 자신의 색을 모르기에 어머니는 자기 주변의 색을 자신의 색으로 삼는데 능숙하게 되었다.
그런 그녀도 결혼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자의 일생에서 절정인 30대 중반이 넘어 여자로 시들어 가면서 그녀의 남편은 바람기가 되살아났다. 그녀가 뺐긴 것은 남편의 애정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남편도 부유햇던 그녀에게 가난은 낯선 것이었다. 남편은 집구석은 나몰라라 했고 과부 아닌 과부가 된 그녀는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그 누구도 씁쓸한 기분을 느끼지 않으면서 '내가 희생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엄마가 가진 모순의 하나는 분명 엄마는 헌신의 위대함을 믿으면서도 너무나 오만한 자존심과 고상한 욕망, 그리고 그런 식의 삶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잇어서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그런 생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강인하고 열정적인 성품을 타고났던 엄마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많아지자 마음이 비뚤어지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남은 것은 두 딸 밖에 없었고 그녀는 딸들을 사랑햇다. 그러나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사랑을 어떻게 주어야 하는지 몰랐던 어머니. 그런 "엄마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고 엄마 자신도 불행해졌다. '적어도 나는 이기적이지는 않았어. 나는 줄곧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 왔으니까.' 나중에 엄마는 내게 말햇다. 그렇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오기도 햇지만 또한 다른 사람들 덕에 살아온 것이기도 햇다. 우리를 소유하고 지배하려 들던 엄마는 우리들의 존재를 몽땅 당신 손아귀에 넣어두고 싶어햇다."
어머니의 품을 떠난 후 수십년이 지나 병실에 누운 어머니를 보는 시선이 냉정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왜일까. “나는 평소 엄마에게 무심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는 일은 드물었던 데 비해 엄마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꿈속에서 엄마는 사르트르와 잘 어울렸고, 우리는 서로 행복했다. 그리고 그꿈은 악몽으로 바뀌곤 했다." 그런 어머니였는데 왜 그런 것이었을까?
어머니는 사는 것이 서툴렀다. 그러나 그 서툰 어머니의 사랑은 진짜였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하는 엄마의 사랑은 독점적이면서도 또 깊은 것이어서 우리가 엄마의 사랑과 함께 느끼는 아픔 속에는 바로 사랑의 갈등도 그대로 드리워져 있었다."
어머니가 입원해 암이 발견되고 수술을 한 후 병원에 있었던 기간은 6주였다. 길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나 집을 떠난 이후 어머니와 그렇게 오래 마주한 시간은 없었다. 긴 시간 동안 어머니를 보면서 어머니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기에는 충분했고 어머니를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평생, 엄마의 자아는 늘 외부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아온 엄마가 갑자기 내면의 무의식 속에서 헤매는 모습을 보니 애처롭게 느껴졌다." 죽음 앞에 선 어머니는 더 이상 주변에 맞춰 자신을 바꿀 필요가 없어졌다. "엄마는 삶에 대한 동물적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점이 엄마가 보여줄 숭 있는 용기의 원천이기도 했으며 자기 육신의 속박을 알았을 때 진실할 수 있게 해준 요인이기도 하다. 엄마는 비로소 내면의 진실되고 매력있는 면들을 가리고 있던 상투적인 말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엇다. 그렇게 되자 나는 엄마가 지닌 애정의 따스함, 질투심 때문에 흔히 왜곡되고 표현하는 데 그토록 서툴렀던 그 따스함을 느끼게 되었다."
"내 나이 열 살 때의 '사랑하는 엄마'와 사춘기시절을 억누르던 그 적대적인 여인은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엄마에게 우리는 많은 잘못을 범했다. 특히 지난 몇년 동안 우리는 엄마에게 지나치게 무관심했고 소홀했고 피해왔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엄마를 간호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가 곁에 있어서 엄마가 느끼게 되었던 평온함 그리고 공포와 고통과 싸워 얻은 승리를 통해 우리의 우리의 잘못에 대해 얼마간의 보상을 했다고 느꼈다." 그러나 언제나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그것은 너무 늦은 화해였다.
“엄마와 나의 두 장의 사진을 바라본다. 열여덟 살 소녀와 마흔 가까운 여인의 사진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엄마의 엄마, 그 슬픈 눈을 가진 이 어린 소녀의 할머니라도 되었을 나이가 되었다. 두 모습을 보니 애처로운 연민이 느껴졌다. 나는 너무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르는 모습이고 엄마는 그 막막한 미래에 대해 아무 것도 이해하지 않으려는 듯한 모습이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충고도 해줄 수가 없을 것이다.”
"엄마의 죽음은 태풍처럼 나를 흔들어놓았다. 왜일까? 집을 떠나 엄마와 따로 살기 시작한 뒤, 엄마로 인해 감정적으로 흔들린 적은 거의 없었다.
"엄마가 거기 계셔?"
"그래"
동생이 울면서 말했다.
"한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나도 엄마처럼 저 속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너무나 불공평할테니까 말이야."
그렇다. 우리는 우리들 모두의 장래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불행한 사실은 누구나 똑같이 겪게 될 이 일을 우리는 각자 혼자서 겪어야 한다는 점이다."
젊은 신부가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라는 이름을 말할 때마다 엄마는 다시 살아 돌아왔고, 어린 시절에서부터 결혼하고 혼자되고 관에 누울 때까지 엄마의 삶이 압축되어 펼쳐졌다.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적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초라한 여인이 하나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엄마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외할머니는 삶에 대해 별다른 정열을 보이지 않았다. 여든 네 사람이던 그 분은 우울하고 단조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터라 죽는다는게 그다지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괴롭지 않았다. 아버지도 그만한 용기를 보였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그렇듯 삶을 사랑햇고 인생을 사랑했으며 죽음에 대해서도 나와 같은 저항감을 느꼈다.
쉰살이 된 여자가 어머니가 죽었다고 괴로워할 때 나는 그 여자가 신경과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할 운명이고 80세면 죽어도 그다지 억울하지 않을만한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사람은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 게 아니었다. 다 살았기 때문에 죽는 게 아니었다. 늙었기 때문에 죽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은 그 '무엇인가'에 의해서 죽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