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 2010년 전면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제나라 경공이 하루는 산책을 하다 궁전과 산하를 내려다보면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어찌 이 광대한 나라를 두고 주겠는가"

그말을 들은 신하들은 경공을 따라 눈물로 옷소매를 적셨다. 그러나 애공 옆에 서 있던 안자만은 홀로 허허허 웃고 있었다. 경공이 의아해 물었다.

"현명한 군주가 죽지 않고 언제까지나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면 선왕인 태공과 환공께서 지금도 나라를 지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용감한 군주가 죽지 않고 언제까지나 지키고 있었다면 영공이안 장공께서 지금도 나라를 지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몇 분의 임금만이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면 지금 임금님께서는 그 자리에 오를 생각도 하지 못햇을 것입니다.

다른 임금들이 아무리 현명하고 용감했어도 다 죽었기 때문에 왕의 자리가 바뀌고 하여 임금님께서도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닙니까.

다 죽음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임금님도 그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명재상 안자의 말은 죽음의 효용에 대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해이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는 과연 그럴까? 묻는다.

(이하에서 유전자를 의인화해서 유전자의 의도나 욕구와 같은 표현을 쓸 것이다. 물론 유전자는 의도가 없다. 분자덩어리일 뿐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책에서 그렇게 하듯이 설명의 편의를 위해서는 진화의 결과를 유전자의 의도로 대치해 설명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저자는 묻는다. 누구를 위한 효용인가? 안자의 말대로 죽음이 없다면 사회가 유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진화의 관점에서 사회라는 집단은 허깨비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죽음은 진화의 결과이다. 그러나 집단은 진화의 결과를 결정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죽음은 누구에게 쓸모가 있기에 진화했는가? 보통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개체의 효용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개체의 입장에서는 영생을 바란다. 개체가 진화의 주체라면 개체의 이익에 맞도록 죽음이 아니라 영생이 진화되어야 했다. 그러나 결과는 영생이 아니라 죽음이다.

저자는 진화의 기본단위는 개체가 아니라 유전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유전자의 입장에서 죽음은 유전자의 이익과 대립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개체는 죽더라도 유전자는 불멸하기 때문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자연선택이란 한 단어로 요약된다. 유전자는 진화라는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고 그 게임에 걸린 상품은 영생이다.

왜 개체가 아니라 유전자가 진화의 주체인가? 그 이유는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생각하면 알기 쉽다.

유기체로 가득하던 원시바다는 천연 화학공장이었다.  그 바다에 번개가 치고 자외선이 내리쬐면 유기체가 랜덤하게 합성되었고 수억년 동안 그 공장에서 합성된 유기체 중에 자신을 복제하는 분자가 등장한다. DNA다. 처음 DNA가 등장한 바다에는 DNA가 자신을 복제할 재료가 널려 있었고 DNA는 무한히 자신의 복사본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자원이라도 유한하다. DNA를 복제하는 데 사용할 자원이 점점 희귀해졌다. 이제 진화라는 게임의 규칙이 바뀐다. 없으면 만들어라. 어떻게? 이미 복제된 DNA를 재료로 쓰면 되지 않는가? 자신을 복제하기 위해 다른 DNA를 먹어치우는 DNA가 출현해 자연선택되고 그럴 수 없는 DNA는 진화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진화라는 게임을 계속하려면 이제 공격에 맞서는 방어수단이 있어야 햇다. DNA는 살아남기 위해 방어벽을 두르게 된다. 일단 방어벽이란 무기가 등장한 이후 그 방어벽을 뚫는 공격수단도 등장한다. 그러면 방어벽도 진화한다. 군비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보는 생명현상은 바로 그렇게 DNA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방어벽이란 생존기계이다. 진화의 주체는 생존기계가 아니라 그 생존기계를 만들어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복사본을 만드는 데 이용하는 DNA라는 것이 저자의 요점이다.

생물학이 주대상으로 삼는 몸 즉 생존기계는 진화의 역사에서 DNA가 자신을 방어하고 자신의 복사본을 퍼트리기 위해 만들어온 수난에 불과하다. 즉 유전자를 담고 잇는 운반체인 개체는 유전자의 이익 즉 자신의 복사본을 만드는데 수단일뿐이다.

그러므로 개체의 죽음은 유전자의 이익과 배치되지 않는다. 유전자는 영생을 바란다. 자신의 복사본을 퍼트려 영생을 얻는데 개체의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저자는 노화 역시 유전자의 관점에서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유전자로서는 개체가 번식을 할 연령까지만 팔팔하게 움직여 자신의 복사본을 퍼트린다면 그 다음에야 어떻게 되건 알바가 아니다. 유전자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자신의 복사본을 퍼트려 영생을 얻는다는 이익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존기계가 번식을 하기 전에 늙어 죽는다면 그 유전자는 퍼질 수 없다. 살아남은 유전자는 번식을 할 때까지 생존기계가 팔팔하도록 했던 유전자들이고 그런 유전자만 자연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이 저자의 관점에 따라 죽음과 노화를 설명하면서 생명이란 현상의 주체는 누구인가를 살펴본 것이다.

그러나 설명에선 유전자가 의도가 있고 욕구가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유전자는 생각할 수 없다. 유전자가 의도가 있고 욕구가 있는 것처럼 말했더라도 실제 진화라는 게임에서 살아남았는가란 결과를 의도라는 원인으로 바꿔 이해하기 쉽도록 말한 것뿐이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로 글을 쓰고 잇다.

그러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단지 내 유전자가 번식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일시적 도구일뿐이라면 누군들 허무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존재이유가 그렇다면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이며 우리가 삶에서 지켜야 할 가치가 있을 이유가 있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저자의 전공을 넘어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우리는 유전자의 표현형일 뿐이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는 유전자가 지정한 프로그램 즉 본능에 따라 움직이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피임을 하는 것은 유전자의 입장에선 항명이며 반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전자의 독재에서 해방된 드문 종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만들 자유를 가진 유일한 종이란 의미이다. 우리 삶의 의미와 이유, 가치는 그 자유에 대한 질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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