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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최후의 20년 - 유랑하는 군자에 대하여
왕건문 지음, 이재훈.은미영 옮김, 김갑수 감수 / 글항아리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코뿔소도 호랑이도 아닌데 왜 광야를 떠돌아야 합니까?"
광 땅에 포위되어 굶주릴 때 자로의 울부짓음이었다.
학이시습지로 시작하는 논어의 첫장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으니 우리는 군자다!'라는 구절로 끝난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천하에 도가 있기를 바랐다. 그들이 바랐던 도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왕은 왕다울 수 있고 신하는 신하다울 수 있으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울 수 있고 아들은 아들다울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이 무엇이 특별하며 그런 세상을 바라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상식이 통하는 세상. 공자의 '소박한' 꿈이었다. 그리고 공자의 꿈은 과거에 있었던 현실이었다. 공자가 述而不作이라 한 것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 주공이 다스리던 천하를 다시 세우려는 것일 뿐이기에 새로운 무엇을 말하는 것이 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자의 시절은 그에게 가혹했다. 그의 소박한 꿈은 꿈일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하려는 것은 세상을 대단한 유토피아로 바꾸려는 것도 아니고 우리 자신의 영달을 위한 것도 아닌 그저 누구나 상식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세상으로 만들려는 뿐인데 왜 우리는 이렇게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이 천하를 떠돌아야 되는가라고 자로는 울부짓은 것이다.
자로의 울부짓음은 이책의 저자가 그리는 말년의 공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공자는 오십에 자신의 사명을 알았다(知天命). 비천하게 태어나 내세울 것 하나없던 공자가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그의 학식 때문이었다. 비천한 자신이 그런 배움을 얻고 천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자신에게 시킬 일이 있기에 그러했을 것이라 공자는 생각했을 것이다. 50대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치가로 활동할 때 공자는 자신의 사명을 느꼈고 그 사명을 실천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그 이후 그의 삶은 비참한 패배자의 삶일 뿐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천명을 실현하기 위해 '상가집 개'같이 천하를 떠돌면서 뭐같지도 않은 한심한 작자들에게 벼슬을 구걸했지만 공자에게 다시는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바란 것은 옳은 것이었고 그들은 스스로 그 꿈을 실현할 능력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천하의 누구도 그들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럴 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세상은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군자다. 우리는 분명히 군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점점 한심한 자위에 불과하게 된다.
저자는 14년 동안 천하를 상가집 개처럼 떠돌면서 공자의 심경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가를 보여준다. 노나라에서 3년간 사실상 수상으로 지낼 때 그리고 그 자리를 박차고 다른 기회를 찾아 세상을 떠돌던 처음 몇년간 공자는 하늘이 자신에게 준 사명을 믿으며 확신에 차있었고 자신감에 차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자신을 알아줘도 세상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았다. 공자는 점점 지쳐갔다. 그의 확신은 닳아갔다. 자로가 울부짓을 때 공자 역시 같이 울부짓고 싶었을 것이다.
현실에 부딪혀 철저하게 패배하고 좌절한 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가지였다.
자로가 울부짓은 다음 자공은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의 도는 너무도 커서 천하에 담을 수 없습니다. 왜 천하에 받아들여 질 수 있도록 도를 조금이라도 낮추지 않으십니까?"
이후 제자들의 노선이 그러했다. 그리고 제자백가의 노선이 그러햇다. 이상은 현실과 만나야만 한다. 현실과 떨어진 이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이상이 현실과 만나려면 현실에 이상을 맞춰야 하지 않겠는가?
노나라에 돌아간 이후 공자의 제자들은 현실정치에 뛰어들었고 요직을 차지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공자의 도를 현실정치에서 말하지 않게 되엇다. 공자의 도와 현실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던 것이다. 제자들을 보면서 공자는 다시 한번 좌절한다.
현실과 꿈이 같아질 수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자로와 자공에 이어 안연은 이렇게 말한다. "도가 받아들여 지지 않는다고 걱정할 것이 무엇입니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군자의 참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군자는 도를 연마할 뿐. 도를 갖춘 인재를 쓰이지 않는 것은 군자의 치욕이 아니라 받아들이지 않는 위정자의 치욕입니다."
안연은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안연과 같이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기다리고 초조해하고 희망하며 좌절했다.
그리고 도를 실현할 기회를 잡은 제자들까지 현실의 무게에 눌려 그의 꿈을 저버렸을 때 공자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공자는 마지막 선택을 한다. 지금 그의 꿈이 실현될 수 없다면 미래에 기대를 거는 것이었다. 노나라에 돌아온 마지막 4년동안 공자는 다시 제자들을 키운다.
그리고 저자는 그 어린 제자들이 미래로 가져간 것이 공자의 꿈이 현실이 되도록 했다고 말한다.
"춘추는 천자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가 나를 알아주는 자도 춘추뿐이고 내게 벌을 내리는 자도 춘추뿐이다고 말했다" 맹자의 말이다. 공자는 춘추를 쓰면서 천자의 일을 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도와 현실이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을 때 공자는 역사를 쓰면서 상상의 왕국을 세웠고 그 안에서 도를 행했다는 것이다. 현실의 불의를 역사라는 법정에서 바로잡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공자는 책이란 상상의 왕국에서 현실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도를 기록하고 제자들은 그 도를 전하면서 공자의 꿈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미래로 가져갔다.
평점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