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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디자인 도시를 가다
김미리.최보윤 지음, 이덕훈 외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작년의 일이다.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가 부른 장소는 도심의 카페 같은 곳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 내의 공원으로 나를 불렀다. 왜 그런 곳으로 오라고 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사는 곳을 보여주고 싶어한 것같다. 자신은 이런 곳에 살고 이런 곳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가 그런 곳에 사는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말보다 몸으로 느끼라고 그렇게 약속장소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녀와의 만남은 그것이 끝이었다. 그녀도 나도 서로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그녀와 같이 만남에 사려깊게 의미를 만들었던 사람은 없었던 것같다.
그녀가 불렀던 인천의 공원은 대단한 곳이 아니었다. 아파트 단지 옆에 작은 숲을 만들어 주민들이 산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공원일 뿐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본다. 나는 그녀처럼 나는 이런 곳에 산다고 부를 수 있는 장소가 있는가?
유감이지만 없다. 내 나이 한자리일 때부터 살아온 서울의 이곳은 서울의 모든 곳이 그렇듯이 수없이 얼굴을 바꾸어왔다. 어릴 때 같이 놀았고 같은 학교를 다녔던 친구들은 모두 떠나갔고 친구들과 놀던 장소도 철거되어 무표정한 빌라들과 대학건물로 채워졌고 이웃은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비워지고 다시 채워졌다.
이 거리라는 곳은 어떤 곳인가? 일어나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가고 돌아와 잠을 자고 휴일에는 늘어지게 늦잠을 자는 떠났다 다시 돌아와 쉬는 집이 있는 곳이란 의미 이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일까?
공공디자인이다 도시디자인이다 구호가 떠돌기 시작한지도 꽤 되었다. 우리도 살만하게 되었으니 이제 역사도 찾고 문화도 즐기고 삶의 의미도 여유도 있어야 하지 않냐는 말이다. 그러나 개인의 역사도 개인의 의미도 담지 못하는 도시에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고 의미가 여유가 담겨있는가? 모르겟다.
이책의 페이지들을 넘겨간다. 바르셀로나에서 베를린, 요코하마, 뉴욕, 런던, 파리, 그리고 (아날학파의 도시) 스트라스부르. 이책이 보여주는 도시들을 보면서 부러웠다. 거기엔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의미를 만들고 지키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도시의 의미란 무엇일까? 아니 서울의 의미란 무엇일까? 의미란 시간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하루 하루의 작은 시간들이 쌓여 만들어진다. 목적지로 가는 데 보내는 시간들, 거기서 보내는 시간들이 쌓여 의미들이 만들어진다.
도시 디자인이란 그렇게 우리가 우리의 발과 눈으로 채워가는 시간들이 담기는 공간을 그리는 작업이다. 이책에 소개되는 도시들의 디자인은 외형적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그 디자인들이 아름다운 것은 외형 이상으로 그 디자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공간의 어떤 역할을 할지 그리고 그 역할이 어떤 의미를 만들지 배려하는 마음이 담겨 있기에 아름답다.
파리를 아름다운 도시라 한다. 물론 파리는 아름답게 디자인된 도시이고 관광지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는 도시이다. 그러나 파리의 아름다움은 루브르 박물관이나 샹제리제 거리 같은 곳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파리의 아름다움은 걷는 사람의 발과 눈에서 만들어진다.
오늘의 파리가 만들어진 것은 19세기였다. 자동차가 거리의 주인이 되기 이전에 재설계된 파리의 거리는 걷는 사람의 눈과 발에 맞춰져 있다. 회색과 갈색 톤으로 통일된 질감과 사람의 시선을 압도하지 않는 건물 높이에 맞춰져 있는 거리에는 가로수가 줄지어 잇고 쉴만할 때마다 벤치와 공원, 광장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왠만한 시설은 자동차가 아니라 사람의 걸음에 맞춰져 배치되어 있다. 잠만 자다 일터로 또는 놀이터로 가는 거리가 아니라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공간으로서 디자인된 것이다. 그리고 그 거리는 파리의 오랜 역사가 층층이 반영되어 개인과 역사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이책에 소개된 도시들의 디자인에는 파리의 디자인처럼 그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사람을 위한 배려가 읽힌다. 부러운 일이다.
물론 이책은 신문에 연재된 기획기사를 다시 책으로 묶어낸 것에 불과하다. 대개 그런 책들이 그렇듯이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책에는 위에서 언급한 디자인의 역할과 의미가 자세히 언급되는 것이 아니다. 신문에는 그런 논의를 위한 공간이 없다. 그러나 디자인의 그런 의미를 생각하면서 이책을 읽어나간다면 이책에 소개되는 도시들의 사진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