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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사람 - 다시 쓰는 경제위기의 역사
애미티 슐래스, 위선주 / 리더스북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정치사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낸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는 루즈벨트는 혁명을 막아낸 것이 아니라 혁명을 일으키려 했다고 말한다.
1차대전 이전의 세계는 지금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세계화가 진행되었었다. 철도와 증기선, 전신, 전화로 세계가 연결되면서 교통과 통신의 비용은 획기적으로 낮아졌고 빨라졌다.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묶이면서 지난 한세대동안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그 시절의 세계화도 상상할 수 없었던 부를 낳았고 세계는 번영했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화가 그렇듯이 그 시절의 세계화 역시 양극화라는 문제를 키웠고 우리가 느끼고 있듯이 사회의 대다수가 ‘잊혀진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1차대전 직전 독일과 영국에서 사민당과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복지국가 모델을 실험하는 체제내 개혁이 있었고 1차대전 후에는 소련이 성립되고 헝가리를 비롯한 중유럽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독일에선 스파르타쿠스 반란이 일어났다.
광란의 20년대로 불리게 된 1920년대의 번영은 그러한 계급갈등을 잊혀지게 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다시 계급갈등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보통 우리가 뉴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계급갈등이 혁명으로 바뀌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루즈벨트가 생각한 뉴딜은 계급투쟁을 막기 위한 양보가 아니라 바로 계급투쟁이었다고 말한다.
대공황 이전에 대다수이면서 발언권이 없었던 노동자와 농민이 잊혀진 사람이었다면 루즈벨트가 집권한 1930년대에 잊혀진 사람은 자본가였고 부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루즈벨트는 돈이 많다는 것 자체가 죄라는 식으로 부자들을 공격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뉴딜은 구호에 불과했다. 뉴딜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는 애매모호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상식은 뉴딜을 케인즈주의의 실행이었다고 알고 잇지만 실제 역사를 보면 르즈벨트는 적자재정을 혐오하는 사람이엇다. 적자재정은 정부의 책임과 신뢰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불황이 장기화된다는 것은 케인즈가 말하지 않아도 당시 이해되고잇던 논리엿다. 루즈벨트의 전임자인 후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어디서 수요를 만들 것인가? 소비자의 주머니를 채우면 된다. 월급을 많이 주면 된다고 생각한 후버는 불황인데도 기업들이 노동자에게 임금을 인상해주도록 강제했다. 그러나 불황에 월급을 많이 주면 회사의 이익이 줄어든다. 그리고 경쟁을 할 수 없게 되고 가격을 내릴 수도 없게 된다. 소비자는 높은 가격을 지불하게 되면서 소비는 늘지 않는다. 간단한 논리이다. 그리고 그 단순한 논리에 따라 많은 회사들이 파산했다. 그러나 후버와 루즈벨트는 그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저자는 루즈벨트의 뉴딜의 본질은 유효수요을 늘린다는 케인즈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루즈벨트가 하려고 했던 것은 정부와 민간부문이 경쟁하는 것이었고 민간부문을 정부가 대신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루즈벨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델은 당시 소련에서 실험되고 잇었던 집산주의 모델, 정부가 생산을 계획, 통제하는 모델이었다. 루즈벨트의 브레인들은 20년대에 소련시찰단에 참가했던 좌파지식인들이었고 그 브레인들과 루즈벨트의 생각은 비슷했다고 저자는 암시한다.
그 예로 저자는 불황에서도 성장세를 이어가면서 경기회복을 주도할 수 있었던 전력산업(유틸리티)과 루즈벨트의 전쟁을 예로 든다. 널리 알려진 TVA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댐은 수력발전으로 전기를 생산했다. TVA는 민간전력회사와 경쟁관계에 뛰어들었고 결국 민간업체를 공격해 그들을 흡수한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반시장적인 규제가 쏟아져 나왔다. 가령 이책에 소개된 가금류 시장에 대한 규제를 예로 들면 디플레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가격경쟁을 제한하면서 중소상인들이 경쟁력을 잃어 파산하도록 몰아갔고 임금을 인상하도록 압박하면서 고용을 줄이도록 몰아갔다.
결국 그러한 반시장적인 정책은 기업의 활동을 제약하면서 불황을 장기화했다.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세수가 줄 수 밖에 없었다. 부족한 세수를 늘리기 위해 세율이 올라가 회사 수익의 3/4을 가져갔다. 기업의 이익은 리스크에 대한 보상이다. 그런데 실패하면 손해는 자기 몫이고 성공하면 자기 몫은 1/4 밖에 안된다면 누가 의욕이 나겠는가?
당연히 투자가 줄었다. 자본의 파업이 시작된 것이다. 루즈벨트는 더 황당한 조치를 내놓는다. 기업의 내부유보금에 대해 78%의 세금을 거두어 세수를 늘리기로 한 것이다. 기업이 가지고 있는 돈을 빼앗으면 직원 월급은 어떻게 줄것이며 투자는 어떻게 하는가? 당연히 기업활동은 위축되엇고 고용은 늘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되었다.
1930년대 미국인들은 20년대의 번영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버렸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리고 그 책임은 루즈벨트가 부자들에 대해 벌인 내전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을 구한 것은 나라 밖의 전쟁인 2차대전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라 밖에 전쟁을 하면서 나라 안에서 전쟁을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10년가까이 불황을 장기화하면서 뉴딜에 대한 지지는 바닥을 기고 있었기 때문에 루즈벨트로서도 자신의 전쟁을 끝낼 때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상이 이책의 논지를 요약해본 것이다. 사실 저자의 논지는 엉뚱한 것은 아니다. 케인즈주의가 정당성을 상실한 70년대부터 뉴딜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저자의 논지와 같은 주장이 제기되어 왔었다. 뉴딜은 대공황에서 미국을 구한 것이 아니라 대공황을 더 장기화하고 악화시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뉴딜의 반시장적인 개입주의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책은 그러한 주장을 이어받고 있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책의 가치는 왜 그런 반시장적인 개입주의가 나오게 되었는가?란 질문에 대한 답에 있다. 저자는 20년대 미국에서 별종으로 취급되며 소외되었던 좌파지식인들의 계보를 추적하면서 그들이 루즈벨트의 브레인트러스트로 들어가 어떻게 정책을 생각했고 어떻게 정책을 내놓았는가를 추적한다.
그들은 소련이란 선례를 따라 하려 했다고 이책은 말한다. 집단농장과 같은 실험을 한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소련에서 공산주의 실험 자체가 그렇듯이 선례가 없는 일이었기에 좌충우돌할 수 밖에 없었고 몽상가들의 어설픈 장난에 불과하게 된 과정과 결과들은 이책은 보여준다.
모든 혁명이 그렇듯이 뉴딜 역시 어설픈 이상에서 시작했기에 현실과 충돌해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고 이책의 저자는 말하는 것이다.
평점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