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 대가와 친구들 3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1년 7월
평점 :
품절


이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뒤샹과 그의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제목에서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과 책의 내용은 미묘하게 어그러진다.

저자가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폴락과 워홀을 다룬 저자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책의 느낌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생고기를 씹는 것같다'이다.

내용

이책의 주인공은 분명 뒤샹이다. 이책은 뒤샹의 탄생에서부터 그의 사망까지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뒤샹과 그의 주변사람들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미술가인 뒤샹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그 이야기들에는 당연히 뒤샹의 작품들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생각으로 만들어졌으며 뒤샹은 어떻게 생각했고 주변에선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면 당연히 포함될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 이야기들엔 뒤샹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유행했고 뒤샹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큐비즘과 미래주의, 다다, 초현실주의와 같은 유럽중심의 모더니즘 미술가들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파리와 뉴욕을 오간 뒤샹의 행적을 따라 대서양 서쪽으로 모더니즘 미술이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도 조명된다.

이렇게 보면 이책은 뒤샹에 포커스를 맞추어 본 20세기 초 모더니즘 미술의 풍속사라 정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책에선 뒤샹과 주변 인물들의 작품을 통해 모더니즘 미술 자체를 조명하기는 하지만 당시 미술 자체에 대한 설명이 목적은 아니다. 이책의 소재는 그런 공적인 모습보다는 뒤샹과 그 주변인물들의 사적인  생활들이다.

파리나 뉴욕의 어느 거리에서 누가 누구와 자주 어울렸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고 체스를 두었으며 누가 누구에게 얼마를 빌렸다든가 누구의 마누라와 눈이 맞았다든가 어떤 여자와 잤다든가 누구 누구와 동거를 했다든가 누구의 초대로 뉴욕에 갔는가 그리고 돈을 댄 것은 누구인가 누가 누구의 영향을 받아 어떤 그림을 또는 조각을 하게 되었는가 등 시시콜콜한 사생활이 이책의 소재이다.

그러한 사생활을 중심으로 놓았다는 점에서 이책은 다른 수많은 미술사 서적과는 차별성을 가지며 바로 그 차별성이 이책의 뛰어난 점이다. 미술사 책에서 뒤샹에 대해 다룬다면 인간으로서 뒤샹은 반페이지도 안되게 다루어질 것이고 대부분은 그가 어떤 작품을 만들었고 그 작품들은 또는 그가 제안한 개념들은 미술사적으로 어떤 영향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텍스트 계보학이 우선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계보학에선 텍스트를 우선하기에 그 텍스트를 만든 작가도 텍스트가 되어 버린다. 단지 미술사의 영향관계에서 파악될 뿐 그가 어떤 삶을 살았기에 그런 작품을 만들었는가는 파악되지 않는다. 이책과 같은 류의 미술사는 그런 빈틈을 메워준다.

평가

그러나 이책의 성격은 애매하다. 날고기를 씹는 느낌이란 평은 이책이 시시콜콜한 신변잡기를 나열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 신변잡기적 사실들을 넘어 저자가 뒤샹에서 무엇을 읽으려는 것인지 감이 안잡히게 쓰여졌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인간으로서 뒤샹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뒤샹의 내면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한 인터뷰들이 인용되고 있고 그가 한 말들이 여러군데 인용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잘 알수가 없다. 이책의 뒤샹은 어디까지나 몰래카메라로 잡힌 무표정한 뒤샹이다.

이책을 보면 그는 상당한 인기가 있었던 호감가는 사람이었던 같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작품을 거의 만들지 않는데도 동료 예술가들에게 존중받고 대가로 존경받았으며 미술애호가들에게 사랑받았다. 그가 뉴욕 패러다임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레디 메이드와 같은 그의 미술에 대한 개념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호감을 사는 그의 성격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호감을 얻을 수 있었는지 이책에선 아무 설명이 없다. 이책이 그리는 뒤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속을 알고 없고 성격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뒤샹이다. 읽어가면서 도대체 저자가 왜 이책을 썼는가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저자가 아무 의미 없이 이책을 쓴 것같지는 않다. 생고기를 씹으면 위장에 들어가 소화가 되게 마련이다. 책을 덮으면서 머리에 그려지는 뒤샹은 자유인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삶을 즐기는 자유가 아니라 너무나 가볍게 부유하는 참을 수 없는 자유이다. 뒤샹은 30이 되기도 전에 절필했다. 뉴욕으로 간 것은 화가로서 살기 싫어 새로운 땅에서 자유롭기 위해서였다. 그는 미술과는 무관한 프랑스어 과외를 하면서 생계를 해결했고 주변 사람들의 호의를 거리낌 없이 받으며 한량으로 살았다. 그러면서 별 재능도 없는 체스에 마약중독자처럼 빠져산다.

그러면서도 그는 미술의 세계에서 떠나지 못한다. 평생 마땅한 직업도 없이 떠돌면서 그는 미술가들의 공동체에서 수집가들의 네트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언제나 미술로 다시 돌아간다.

결혼을 구속이라며 거부한 그는 뉴욕으로 도피하면서 미술이란 구속에서도 자유롭고 싶었지만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는 천상 미술가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절필을 한 것은 미술이 싫어서가 아니라 미술이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새로워야 하는 예술가로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붓을 꺽은 것은 아이디어가 고갈되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창의적이어야 하고 사람들을 놀라게 해야 하는 새로움의 창조자여야 하는 직업이 미술가여야 하게 된 것은 미술이 쓸모가 없는 '예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쓸모가 있다면 예술이라 부르지 않는다. 쓸모가 없어져 박물관과 상아탑에 모셔지면서 예술은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역사는 인상주의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인상주의는 사진기술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것이다. 사진이 생기면서 초상화로 생계를 해결하던 화가들이 밥줄을 잃게 되었다. 그때까지 미술은 예술이 아니었다. 초상화는 지금의 사진 대신이었고 궁정화가들이 그리는 역사화는 지금의 기록영화와 마찬가지였으며 미술가들은 건물을 장식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밥줄인 초상화가 사라지면서 화가들은 그림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을 찾게 되었고 결국 흑백인 사진이 할 수 없는 컬러라는 특성을 극대화하는 스타일인 인상주의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한 움직임은 결국 큐비즘에서 추상화로 가게 되는 노선을 상정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대상을 그리는 것으로서 미술의 쓸모가 사라지면서 미술은 쓸모가 없는 예술의 길을 걷게 되엇고 대중과 호흡하는 문화의 일부가 아니게 된 미술은 그들만의 그들만을 위한 그들의 자위행위가 되어갔다.

데생 연습에 등장하는 원뿔, 육면체, 원으로 형상을 분해하는 큐비즘은 시각의 느낌을 통해 구체화되는 감각의 예술인 미술을 개념을 구현하는 이성의 미술로 바꾸었다. 뒤샹이 따라갔고 뒤샹이 걸었던 노선은 바로 감각이 아니라 이성의 대상으로 미술을 바꾸는 것이었다.

큐비즘의 논리적 연장인 추상미술이란 노선에서 미술을 다시 감각의 미술로 바꾸어놓은 추상표현주의에 대해 뒤샹이 거부감을 보인 것은 당연하다. 추상표현주의자들도 뒤샹을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추상표현주의자들과 뒤샹은 같은 운명을 타고난 동료들이었다. 

이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뒤샹에 대한 인상은 '자유의 불안'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미술이 사회로부터 뿌리가 없어지면서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 때문에 존재이유가 불분명해진 것은 바로 뒤샹의 삶과 그대로 닮았다. 한번도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적도 없고 가족을 부양한다든가 하는 책임있는 역할을 해본 적이 없으며 재산을 쌓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았던 뿌리가 없는 삶을 살았던 뒤샹의 삶을 규정한 것은 자유이지만 뿌리가 없다는 불안감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