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음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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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이사갈 아파트를 단장하다가 가구 모서리에 옆구리를 부딪쳤다. 약간의 통증이 있었지만 별 대수롭잖게 생각했다. 하루하루의 생활은 느긋하고 유쾌하며 고상했고 하는 일은 만족스러웠다. 아이들과 아내 역시 좋았고 그런대로 지낼 만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옆구리 통증이 심해졌다. 의사는 맹장을 의심했다. 처방전대로 약을 복용하고 안정을 취하려고 노력했지만 조금씩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왜 하필 나지?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우연하게도 나지?

우연한 사고가 사건의 핵심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가구 모서리에 옆구리를 부딪치지만 않았더라면, 이반 일리치(톨스토이 작 ‘이반 일리치의 죽음’)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토마스의 상급자가 좌골신경통이 도지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대신 토마스가 테레사가 있는 시골로 검진을 가지 않았더라면 토마스와 테레사의 사랑은 결코 싹트지 않았을 것이다(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우연에 의해 우리 인생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 논한다는 것은 쓸데없어 보인다. 우리 인생에 만약 두갈래 길이 있다고 해서 둘 중 하나를 미리 탐색해 보고 더 나은 것을 선택할 수는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 선택의 순간에 우연의 힘이 끼여든다고 해도 막을 도리가 없다. 어쩌면 매 순간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앞선 우연한 신경통의 재발, 우연한 부딪침, 우연히 발견한 책 한권, 심지어 우연히 후각을 자극한 마들레느 냄새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연의 값을 측정할 수는 있을까? 우연이 사건들의 공시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A가 일어날 때 B가 일어날 수 있는 수적인 값을 과연 측정할 수 있을까? 다시 헛되고 쓸데없어 보이는 질문을 해보자, 우리 삶의 몇 퍼센트가 과연 이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또 얼마나 되는가?




풀 오스터는 미국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에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작가다. 나 역시 그의 ‘달의 궁전’을 읽었고 영화 ‘스모크’를 보았다. 달의 궁전은 처음 시작이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인공의 비관습적이고 비자본주의적인 인생관이 처음 얼마동안 책에서 손을 놓기 어렵게 만들었다. 물론 줄거리를 섬세하게 다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꼭 400쪽이 넘는 책의 분량 탓으로 돌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 기억력의 한계일수도 있고 갈수록 흥미를 떨어뜨리는 내용 탓일 수도 있으니까.

‘우연의 음악’이 내 수중에 떨어진 것은 2004년 4월 말이었다. 바하에 대한 책이 어디 없나 하고 신문을 검색하고 있던 차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내 눈에 띄었다.“…음악을 전공하는 두 남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 책의 전개가 바하의 푸가형식을 그대로 따랐다”  2000년 4월 7일자 일간지에서였다. 순전히 바하 때문에 이 책을 선택한 셈이 된 것이다. 푸가라, 푸가의 기법이라......

서른 중반의 소방관 짐 나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차만 몰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게 된 것은 뜻하지 않게 2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길에서 우연히 ‘마치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바람에 부러진 잔가지가 별안간 발치에 떨어진 것처럼’ 자칭 도박의 명수라는 잭 포지를 만난다. 나쉬는 이 만남을 ‘마구잡이 식의 우발적인 만남’이라고 표현했지만 이후 이 우연한 만남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그는 이 도박의 명수라는 잭 포지에게 노름 돈을 대주기로 결심하고 그와 함께 사상 최고금액의 복권에 당첨된 두명의 억만장자 스톤과 플라워와 대적하러 간다. 1만달러의 판돈을 걸고 시작한 노름에서 처음 예상과는 달리 잭 포지는 졌을 뿐 아니라 나쉬가 아끼던 사브 차까지 잃게하고 급기야 마지막에 가서는 카드떼기로 1만 달러를 더 빚지게 만든다. 물론 이것은 나쉬가 자초한 일이었다. 나쉬는 이미 1년을 넘게 길위에서 차을 몰고 달리기만 하고 있었다. 아내는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 떠났고 딸아이는 누나 집에 맡겼으며 인생에서 기대할 만한 어떤 것도 더 생각할 것이 없었다. 그는 이미 포기상태였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낯선 잭 포지를 일종의 패자부활전, 더 늦기 전에 자신을 위해서 뭔가 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1만달러의 빚, 그리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두 명의 백만 장자의 집에서 벽돌쌓기라는 강제노역을 해야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강제노역에 매달리면서 나쉬는 자신의 삶을 발견하고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성취감과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물론 몇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도저히 갇혀있을 수 없는 젊은 잭 포지가 도망가려다 거의 반죽음 상태가 되어 병원으로 실려간다. 또 자신을 감시하는 머스크의 손자에게 증오와 살의를 느끼기도 한다. 어쨌든 나쉬는 노예같은 강제노역 계약이 끝나는 날까지 쉬지 않고 하루 10시간씩 일했다. 마침내 일은 끝났고 자유의 몸이 곧 될 터이다. 이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갇혀 있으면서 발견한 책임감과 타인에 대한 유대감이 저 멀리 두고 왔던 생활에서도 다시 제 값을 할 것인가.

‘우연의 음악‘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삶이란 우연과 선택의 결합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주인공이 우연히 굴러 들어온 돈 때문에 일상에서 일탈하고 우연히 만난 젊은이로 인해 삶이 완전히 뒤바뀌었지만 결국 이 우연의 매순간마다 자신의 의지와 선택이 운명을 결정지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풀 오스터 자신의 원래 주제의식과 스타일을 조금 벗어난 이 책을 덮는 순간이 이 물음에 적절한 답을 찾는 순간이라고 기대하지는 말라. 늘 그렇듯 책은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던지는 역할만을 할 따름이다. 나머지는 늘 우리 몫이다. 왜 여기 길 위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혹은 저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더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 모든 결정을 우연에 맡기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래야만 한다’의 세계에서 벗어나 ‘그럴 수 밖에’의 세계로 넘어오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밝혀 둘 것이 하나 있다. 나는 ‘바하의 푸가 기법을 따랐다.’고 운운한 그 신문기사를 착각한 모양이다. 이 책의 주인공이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지만 바하의 푸가는 아니었다. 전혀 다른 책을 소개한 기사를 읽었던 것인데 다시 확인해 보니 그 책은 ‘언 이콜 뮤직(문이당) ’이었다. 이 이상한 우연 덕에 나는 ‘우연의 음악’을 읽게 되었다. 후회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필히 제목과 어울리는 상황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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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이야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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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시 이야기를 해야겠다.

101개의 섬과 365개의 다리에 의해 묶여진 물위의 도시-북구의 베니스로 불리는 그곳, 쭉뻗은 대로와 아름다운 운하로 이어진 인공의 도시, 세 번이나 이름이 바뀌어 불린 우여곡절의 도시, 6월이면 밤이 달아나 버리는 백야의 도시 그리고 우리에게는 현재보다 과거로 더 알려진 도시!

그 도시 뻬쩨르부르그는 지금부터 약 300년 전인 1700년 경 표트르대제가 스웨덴 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습지에 건설한 도시다. 이후 로마노프 왕조가 혁명으로 막을 내리기까지 근 200여년 간 러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러시아는 이 도시를 통해 서구와 의사소통하고 정신의 꽃을 피웠으며 혁명의 꿈을 완성했다.

도시가 게르만의 자유결사체 Genossenschaften에 기원하고 이는 ‘대등한 지위를 가진 개인들간의 자유로운 결사체'’를 의미한다면 뻬쩨르부르그는 의식적이고 인공적인 도시다. 그렇다고 이 도시가 분업과 교역의 발달로 인구가 밀집하고 새로운 규율이 형성되어 자연스럽게 생겨난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 얘깃거리가 덜하다거나 도시 생활이 덜 활기있다고 상상해선 안된다. 이 도시도 다른 모든 도시들이 그러했듯이 스스로 숨을 쉬며 욕망하고 그 속의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고 진화했다. 러시아 속의 유럽, 도스토옙스키가 ‘세상에서 가장 인위적이고 추상적인 도시’라고 했던 곳, 물리적으로는 우리로부터 5000여km 이상 떨어진 도시-그래서 너무 멀고 아득한 도시, 이제 그 도시 뻬쩨르부르그로 여행을 떠나기로 하자. 단, 지금보다 100여 년 전에 살았으므로 그만큼 더 행복에 가까웠을 지도 모를 사람들에게로 떠나는 시간여행을.

고골은 뻬쩨르부르그 태생은 아니다. 그는 19세 되던 때에 관리가 되기 위해 이 도시로 왔다. 이후 뻬쩨르부르그는 그가 43세에 정신의 일탈로 죽기까지 그의 작품의 배경이자 주인공이 된다. 그가 본 당시의 수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때도 지금처럼 '책의 집'이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을까? 18세기 후반에 건설된 시내 최대의 상가 건물 고스찌느이 드보르와 20세기 초에 세워진 시내 최고의 식료품 가게 엘리세예프 상점은 고골의 시대에는 아직 없었을 것이다. 이 식료품점 바로 옆 폰탄카강을 가로지르는 아니치코프 다리의 네 모서리에는 1841년에 시작해서 그가 모스크바에서 죽어가고 있던 1850년 대 거의 10년에 걸쳐 조각가 클로트가 완성한, 젊은 청년이 말을 길들이는 생명력 넘치는 조각품이 서 있다. 아무래도 고골은 이런 도시의 외형적 모습에는 관심이 없었던 듯 싶다. 오히려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 동감하고 숨을 쉬는 도시의 내면에 눈길을 주고 있다.




승진 청탁을 하기 위해 상경한 장교가 어느날 아침 문득 잠을 깨고 거울을 보았을 때 얼굴의 코가 사라져버렸다. 귀나 다리나 팔이 아니라 하필 얼굴의 정중앙에 위치한 코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래가지고는 출세를 하기는커녕 낮에 신문에서 본 아름다운 여성과도 만날 수 없고 점찍어 둔 고관부인의 딸과도 만날 수 없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그의 코가 자신보다 높은 5등 문관의 복장을 하고 성당이며 연회에 참석하는 것이 아닌가.

9등관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평생 관청에서 문서를 정서하는 일만 하는 하급관리였다. 그는 그저 사람들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기만 하면 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친구도 없었고 다른 일을 하고자 하는 욕심도 특별히 없었다. 다만, 뻬쩨르부르그 최대의 적이자 위협적인 유일한 존재인 추위에 맞서기 위해 외투를 장만하기만 하면 되었다. 최극빈 생활을 통해 틈틈이 모아 둔 돈과 월급을 가불하고 재봉사에게 사정하여 그럴듯한 외투를 장만한 날 난생처음으로 파티에 초대까지 받게 된다.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길에 등불이 휘황찬란한 상점 진열장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모르는 여자의 뒤를 이유없이 따라가기도 한다. 그런 그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강도들이 외투를 빼앗고 그 후 그는 병에 걸려 죽어 버린다.

또 한 명의 하급 관리 뽀쁘리친은 비록 말단직이긴 하지만 자신이 귀족 출신이며 일반 장사치나 마부들과는 다르다고 강하게 인식하다 급기야 자신을 스페인 왕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연필을 깎아주기 위해 들르는 국장 집 딸과 사회적 신분 상승을 꿈꾸지만별 볼일이 없음을 그 집의 애완견이 쓴 편지를 훔쳐보면서 알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조금씩 광인이 되어간다.

황당하고 비현실적이 일이 벌어지고 신분상승을 꿈꾸지만 광인이 되어가는 곳, 가난한 하급관리가 살기에는 너무나 추운 곳이 바로 고골의 눈에 비친 수도의 진면목이었던 것일까?

이 뻬쩨르부르그의 한 쪽 바실리에프섬에 살고 있는 가난한 화가 차르뜨코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골의 눈에 비친 수도가 어떤 것이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차르뜨꼬프는 그런대로 재능있고 선량한 화가였지만 우연히 발견한 초상화에서 떨어진 금화가 그의 인생을 바꾼다. 이 금화를 밑천으로 신문에 광고를 싣고 집을 옮기고 상류사회 흉내를 내면서 세속적인 명예와 부를 좇아 자신의 재능과 청춘을 팔아버린다. 한편 소심하고 몽상적인 화가 삐스까료프는 이상적인 여인인 줄 알고 뒤쫓아간 여인이 술집 여자인 것으로 알고 상심하다 자살한다. 세속적이고 허영심 많은 그의 친구 삐고로프가 금발여인의 집까지 따라가 겪은 해프닝과는 대조적이다.

이 모든 것이 수도 뻬쩨르부르그에서 일어난 일이다. 삶의 천태만상을 보여주는 전람회장이기도 한 수도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라고 고골은 말한다. 그러나 또 그는, 이 수도의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믿지 마라, 모든 것이 기만이고 꿈이며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충고를 잊지 않는다.




모든 도시는 서로 닮았다. 이것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건축물이나 도시를 감싸고 있는 풍경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욕망과 물질이 동질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시대까지도 초월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의 사람들을 찬찬히 뜯어보라. 고골의 시대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는가. 역사는 길어지고 우리를 담아내는 거리의 풍경은 바뀌었지만 삶은 반복되고 변한 것은 여전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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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 마리안느 - 그린북스 52 ㅣ 그린북스 52
멘델스존 지음 / 청목(청목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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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중년을 넘긴, 그러나 노인이라고 하기엔 아직 이른 나이의 신사였을 것이다. 은색의 머리칼이 반듯한 이마 위로 몇가닥 흘러내린 것을 제외하곤 귀뒤로 가지런히 넘겨져 있었을 것이며 얇은 입술 주위로 연륜을 드러내주는 가느다란 주름들이 보일락 말락 조금씩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눈은 아직 젊은이다운 이상을 담고 있었을 것이고 동시에 중년을 갓넘긴 사람들에게서는 드물게 발견할 수 있는 내면의 깊이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끔 미소를 지을 때는 얇은 입술이 조금 옆으로 삐뚤어져 보였을 것이며 여럿이 모여 대화를 나눌 때에도 큰소리로 성큼 성큼 말을 던지기보다는 말의 무게를 깊이 저울질 할 줄 아는 듯 필요한 말을 제때에 고를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젊은 시절을 통틀어 아니 지금까지 전 생애를 가로질러 가장 마음 속에 사무치고 아련하게 남아 있는 영화로 ‘내 청춘 마리안느’를 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마리안느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프랑스식이다. 그리고 내 기억 속의 한 여자가 흐릿한 안개 속을 뛰어가며 외치던 ‘뱅상, 뱅상’이라는 이름도 역시 프랑스식이다. 이 기억은 아주 오래 되었기 때문에 제나름의 색을 지녀버린 바위와 같이 굳건하다. 시간의 풍화작용에도 오랫동안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킨다. 근원을 캐어묻기엔 이미 너무 세월이 흘러 버린 것일까? 지금의 기억이 처음의 그것이었고 아마도 이후에도 그것은 변하지 않으리라. 시간의 어느 한 지점에서 굳건히 뿌리 박힌 기억은 전후의 사실관계를 따지는 변별의 시도를 무로 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청춘 마리안느’는 독일인이 쓴 독일 소설이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줄리앙 뒤비비에가 같은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고 내 최초의 마리안느에 대한 기억을 독일이 아닌 프랑스로 묶어버렸다고 해서 그를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어차피 인간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대로 기억하고 그 시기에 가장 또렷한 개인적 체험을 그 기억 속에 녹여두는 법이 아니던가. 중년을 넘긴 그 신사의 기억 속에 포진해 있는 마리안느는 또 어떤 모습일런가? 그와 내가 제각기 다른 마리안느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그 마리안느가 마리안느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내청춘 마리안느’는 아르헨티나에서 하이리겐슈타트 성에 갓 도착한 ‘빈센트’가 친구들을 만나고 이러저러한 호의와 애정을 통해 조금씩 성장해 간다는 내용의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소년들 사이의 모험심과 영웅심 그리고 그 작은 세계조차 피해갈 수 없는 존재의 불안과 불투명한 생의 일면이 빈센트와 빈센트 주변의 ‘게릴라 부대’라 일컬어지는 아이들, 그리고 빈센트의 선망의 대상인 만프레드 등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

멘델스존은 아마 이 글을 통해 청춘의 빛과 인생의 아련한 흥분 같은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봄에서 막 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에 드러나는 푸른 자연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야릇한 기대-그 기대의 절정이 곧 빈센트가 호수 건너 하얀집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마리안느이다. 단 한번의 만남을 통해 빈센트가 사랑하게 되는 여인 마리안느는 사실은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존재다. 안개낀 호수를 가로질러 우연히 마주치게 된 미녀이자, 갇혀있다고 말하는 알쏭달쏭한 존재이며 곧 여든이 가까운 기사라고 불리우는 사람과 결혼하게 될 것인유령의 성에 살고 있는 그야말로 유령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이 몽롱한 사랑의 기운은 비밀이기에 더욱 신비롭고 절실하게 빈센트를 버겁게 한다. 빈센트가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것이 곧 마리안느와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러나 그 사랑은 얼마나 아련하고 희미하며 몽롱하던지.

소년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흐릿한 안개낀 호수를 건너 마리안느를 만나고 곧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가 사라진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술이 몇 순배쯤 돌고 네모난 탁자를 둘러싼 대여섯의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은색의 머리칼은 이마 위에서 땀에 젖었고 그의 눈은 희미한 기억 속에 바위처럼 굳건한 마리안느를 추억하듯 들고 있던 술잔 속을 응시한다-내청춘 마리안느!-그것은 청춘의 다리를 건너온 수많은 빈센트들의 가슴속에 안개처럼 희미하게 남아있는 아련한 내면의 비밀같은 그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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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수수께끼 - 마빈 해리스 문화 인류학 3부작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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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반구대 암각화의 그림은 총 290여 점이 넘는다.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있어왔을 암석에는 고래, 호랑이, 사슴, 돼지, 소, 사람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바다짐승과 뭍짐승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그 모형은 언뜻 보면 마치 만화의 밑그림 같기도 하고 또는 무슨 조립식 모형 장남감의 도면 같기도 하다. 1971년에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대략 3천년 전에서 1천5백년 전의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이 연대 추정을 두고 누군가는 상상력의 부족을 들었다. 라스코 동굴의 벽화를 1만 7천여 년 전의 것으로 얘기하는 유럽인들에 비해서 3천년은 너무 소박하다는 말일 터이다. 이 바위그림들은 언제 그려진 것일까? 왜 우리의 선조들은 바위에다 이런 그림들을 새겨 넣었을까?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고 그 시간의 거리가 감추고 있는 비밀에 한 뼘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손과 눈으로 감각하면서 체험하는 것은 시간과 무관한 무언가를 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이것은 아쉽게도 물이 마르는 가뭄 때가 되어야 가능할 것 같다. 반구대 암각화는 근처의 댐 때문에 거의 일년 내내 물에 잠겨있다.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이긴 하지만 나는 거의 박물관에 가지 않는다. 흐르는 시간을 애써 붙잡아 두려는 시도 같아 마음이 영 불편하기도 하고, 생활이라는 실체가 박물관이라는 유형의 공간 속에서 아무리 애써봤자 그 원래의 진실을 구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여기는 축에 내가 속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연출된 생활이고 해석된 문화일 뿐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결벽증이려나. 시간 속에서 저절로 마모되거나 스러진다한들 모든 유한한 존재의 당연한 운명, 애써 지킨다거나 보존한다는 것은 어쩌면 시간을 거스르려는 인간 욕망의 고상한 변명일 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몰역사적인 편견이라고 비웃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반구대 암각화에서는 좀 다른 의미에서 기분이 상한다. 라스코 동굴의 발견보다 덜 극적인 발견 일화 때문도 아니고 상상력의 부족에서 오는 민족적 콤플렉스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물속에 잠겨서 마모되고 스러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지형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인위적인 댐때문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조금은 서글픈 그 어떤 것 때문이라고만 해두자.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는 이즈음에 집어든 책이다. 책은 1975년에 쓰여졌고 우리나라에선 1982년에 번역되어 나왔으니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읽었을 법하다.

원제 ‘암소, 돼지, 전쟁 그리고 마녀:문화의 수수께끼’에서 알 수 있듯 책은 우리에게 생소한 암소숭배와 돼지숭배 및 혐오 그리고 부족간 전쟁의 원인과 결과, 메시아니즘과 마녀사냥이 함축하고 있는 생태학적, 역사적 제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각각의 문화가 표면에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진실을 그 속에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삶의 진실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사회단위가 신성시하는 것과 금기시하는 것, 전설과 신화 등의 문화 현상을 문화생태학적인 측면에서부터 경제, 사회, 정치적 맥락에서 통합적으로 고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중세 때 휘몰아쳤던 마녀사냥을 예로 들어보자. 마녀가 실제 존재했든 안했든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의 타락과 지배에 저항하는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그것은 유효적절한 방패 구실을 했다. 가뭄이 들거나 병이 들거나 빵값이 올라도 마녀가 술수를 부린 것으로 하면 되었다. 공포와 고립을 통해 교회와 지배자들은 위협적인 메시아니즘의 발흥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힌두교도들의 암소 숭배는 어떤가? 인도 농부들이 굶주리면서도 암소를 잡아먹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자연환경뿐 아니라 경제구조, 인구분포 등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저자는 암소숭배가 인간의 잠재능력을 개발하여 낭비나 나태가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는 저에너지 생태계 속에서 인간이 지속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에너지 소비량과 에너지 산출량을 연구한 결과 인도는 미국보다 더 효과적으로 소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용하면서 산업화된 국가에서 누리고 있는 높은 생활수준은 높은 생산효율성의 결과가 아니고 1인당 사용가능한 에너지량이 급격히 증가된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진보’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단순한 수치의 장난이거나 유한한 자원을 축으로 벌이는 제로섬 게임의 일측면일 수 있다는 생각에 직면하게 된다.

최근의 반문화운동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 근저에서 과학문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오히려 과학기술이 불평등과 착취를 심화시키지 않고 완화시키려면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지를 대중들이 더욱 알 수 없게 만들 뿐이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흔히 우리가 ‘원시적이다’ 혹은 ‘야만적이다’라고 하는 전쟁, 남녀차별, 고문, 억압 등이 실은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다만 좀더 고도로 은폐되고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하지 않는다. 마빈 해리스가 간파하는 진실이란, 전역사에 걸쳐 혹은 전 인류에 걸쳐 존재하는 문화양식이란 더 낫고 덜한 것이라는 이분법적이고 단순한 도식으로가 아니라 다양한 영역의 과학적인 객관성에 기초하여 설명하고 이해해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궁극으로 바라는 것은 일상의 의식을 ‘비신화하려 애씀으로써 평화와 정치, 경제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전망을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 대해 건강한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야노마모족 부락에서 끊이지 않는 분열과 전쟁을 단순히 그들이 호전적인 부족이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고 만다면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은 여전히 불가항력적이고 통제불능한 것이라는 절망적 인식에 도달하고 말 것이며 더 나은 세상이란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은 그래서 더욱 울림이 크다.

흔히 서구인들에 의해 기술된 역사가 서구인들의 관점에서 씌어진 것이라 기술 대상인 문화 향유자들의 본질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그 점에서는 다행이 이 책은 최대한 객관적인(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시각을 유지하려고 애썼다고 생각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 문화적 불가지론에 빠질 위험을 과학적 객관성으로 방어할 것을 역설하고 있기까지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과학적 객관성이란, 과학 기술이라는 물질적 측면에 과도하게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것쯤은 현명한 독자들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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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소설이 좋다. 왜냐고 묻는다면, 글쎄 뚜렷한 대답을 찾기가 어렵다. 마냥 좋을 뿐이다. 그래서 나의 독서의 대부분은 소설읽기에 치중되어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소설이면 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책에는 어쩐지 심술이 난다. 그래서 두어 달 정도 사람들의 열광이 바닥에 이를 때까지 일부러 모른체 제쳐 둔다. 좋은 책은 대개 늦게라도 만나게 되는 법이므로. 그렇다면 당신은 물을 것이다. 좋은 책이란 무엇인가? 또 글쎄라고 대답할 밖에.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므로 이 또한 취향의 영역이라고 답한다면 너무 궁색하려나.

로알드 달의 ‘맛’에 대해 좋고 싫음을 따진다면, 역시 취향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열 편의 이야기들 역시 기발한 상상력과 엉뚱한 아이디어라는 공통의 분모를 가지면서 나름대로 독특하다. 때론 유쾌하기도 하고 공포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이야기들은 또한 매번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다. 그러나 독특하긴 하지만 그리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라고 되받아 칠 사람도 있을 법하다. 나 역시 읽으면서 레몽 장의 ‘오페라 택시(세계사,1998.)’가 떠올랐으니까. 그러나 굳이 비교하자면, 레몽 장의 ‘오페라 택시’에서 프랑스식 상상력과 유머 또는 기지를 느낄 수 있었다면 로알드 달의 ‘맛’은 영국인다운 어떤 것을 맛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외에 달리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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