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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지음 / 시와사회 / 1997년 5월
평점 :
품절
두 번의 우연한 방문, 두 번의 잊음 그리고 두 번의 해후가 있었다. 어쩐지 그 일련의 우연이 나에게 어떤 암시를 준다는 생각이 들 즈음 아니나 다를까 이중섭을 닮은,더 정확히 말해 이중섭의 서정을 일깨우는 동시대의 시인 백석의 시집을 읽는다. 역시 평안도가 고향인 시인 백석의 시는 화가 이중섭의 그림에서 흠씬 풍기는 서정의 한 부분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가난하고 어리숙했던 그러나 명백히 천재 화가라고 평가받는 이중섭이 고단한 피난살이를 서귀포의 작은 단칸방에서 이어갈 때조차 사물들은, 생물들은 다정하고 서글픈 그러나 아름다운 삶의 한 부분이었다. 그가 살았던 1.3평 정도의 단칸방에 마치 물리적인 시간의 축적과는 무관한 듯 지금은 홀로 방을 지키고 있는 그의 소박한 자작시는, 그래서 더욱 가슴을 에이고 그래서 더욱 그를 그리웁게 하는 것인가.
‘…삶은/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내가 하필 백석의 시에서 이중섭을 보았다는 것은 지극히 사적인 정서에 기인할 뿐이다. 그 두사람이 공교롭게도 동시대인이었고 똑같이 평안도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저 기록을 통해 나중에 발견한 우연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이중섭이 즐겨 그림의 소재로 삼았던 게와 물고기, 어린아이가 있던 곳, 그가 그림을 구상했을 섶섬과 문득 내 눈을 끈 골방의 자작시를 두 번이나 보고 온 뒤, 내 속에 무언가가 남아있었고 그것이 결국 백석의 시로 이끌었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런 것이다. 우리 인간의 삶이란 꼭 논리적으로 설명가능한 것만으로 채워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니다. 어쩌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바대로 어떤 향토적인 것, 아련한 고향의 내음 혹은 삶의 서글픔 그러나 그 속의 아름다운 것들을 이중섭과 백석에게서 공통으로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백석은 참 아름다운 시인이다. 그의 시도 역시 아름답다.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타고 산골로 가서 나타샤와’ 사랑하기를 꿈꾸는 이 준수한 외모의 시인은, 주로 ꡐ노루를 닮은ꡑ 고향사람들과 소나 오리, 자그마한 벌레에서 갈대나 단풍, 석양 등에 이르기까지 삶을 그 자체만으로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자연을 시의 소재로 다루었다. 물론 먼 타향ꡐ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ꡑ에서ꡐ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ꡑ하거나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같은 건 더러워버리는’ 역사적 존재로서 시인의 고뇌도 마다하지 않는다.
야심차게 백석 시의 대중화를 표방하고 원시(原詩)의 의도를 해치지 않는 한에서 최대한 현대어로 시어를 옮겨 책을 펴냈지만 여전히 어렵다는 출판사의 고백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의 언어는 현대인인 나로서는 한번에 읽어내기 쉽지 않다. 그것은 영어사범과를 졸업한 이력이라면 짐작해 볼 수 있음직한 서양의 시풍이나 외래어의 남용 때문이 결코 아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로지 순수 토속어로 시를 썼다는 데서 오는 낯설음 때문이다.
그러나 낯익지 않은 어휘의 생소함을 감수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이 책에는 있다. 어릴 적 외가에서 ‘아배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겨울밤의 반가운 국수맛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다면, 혹은 명절날 ꡐ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ꡑ,ꡐ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릇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ꡑ한 기억이 어슴푸레하게라도 남아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미 시속으로 반쯤은 걸어 들어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