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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 마리안느 - 그린북스 52 ㅣ 그린북스 52
멘델스존 지음 / 청목(청목사) / 1989년 5월
평점 :
절판
그는 중년을 넘긴, 그러나 노인이라고 하기엔 아직 이른 나이의 신사였을 것이다. 은색의 머리칼이 반듯한 이마 위로 몇가닥 흘러내린 것을 제외하곤 귀뒤로 가지런히 넘겨져 있었을 것이며 얇은 입술 주위로 연륜을 드러내주는 가느다란 주름들이 보일락 말락 조금씩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눈은 아직 젊은이다운 이상을 담고 있었을 것이고 동시에 중년을 갓넘긴 사람들에게서는 드물게 발견할 수 있는 내면의 깊이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끔 미소를 지을 때는 얇은 입술이 조금 옆으로 삐뚤어져 보였을 것이며 여럿이 모여 대화를 나눌 때에도 큰소리로 성큼 성큼 말을 던지기보다는 말의 무게를 깊이 저울질 할 줄 아는 듯 필요한 말을 제때에 고를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젊은 시절을 통틀어 아니 지금까지 전 생애를 가로질러 가장 마음 속에 사무치고 아련하게 남아 있는 영화로 ‘내 청춘 마리안느’를 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마리안느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프랑스식이다. 그리고 내 기억 속의 한 여자가 흐릿한 안개 속을 뛰어가며 외치던 ‘뱅상, 뱅상’이라는 이름도 역시 프랑스식이다. 이 기억은 아주 오래 되었기 때문에 제나름의 색을 지녀버린 바위와 같이 굳건하다. 시간의 풍화작용에도 오랫동안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킨다. 근원을 캐어묻기엔 이미 너무 세월이 흘러 버린 것일까? 지금의 기억이 처음의 그것이었고 아마도 이후에도 그것은 변하지 않으리라. 시간의 어느 한 지점에서 굳건히 뿌리 박힌 기억은 전후의 사실관계를 따지는 변별의 시도를 무로 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청춘 마리안느’는 독일인이 쓴 독일 소설이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줄리앙 뒤비비에가 같은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고 내 최초의 마리안느에 대한 기억을 독일이 아닌 프랑스로 묶어버렸다고 해서 그를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어차피 인간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대로 기억하고 그 시기에 가장 또렷한 개인적 체험을 그 기억 속에 녹여두는 법이 아니던가. 중년을 넘긴 그 신사의 기억 속에 포진해 있는 마리안느는 또 어떤 모습일런가? 그와 내가 제각기 다른 마리안느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그 마리안느가 마리안느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내청춘 마리안느’는 아르헨티나에서 하이리겐슈타트 성에 갓 도착한 ‘빈센트’가 친구들을 만나고 이러저러한 호의와 애정을 통해 조금씩 성장해 간다는 내용의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소년들 사이의 모험심과 영웅심 그리고 그 작은 세계조차 피해갈 수 없는 존재의 불안과 불투명한 생의 일면이 빈센트와 빈센트 주변의 ‘게릴라 부대’라 일컬어지는 아이들, 그리고 빈센트의 선망의 대상인 만프레드 등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
멘델스존은 아마 이 글을 통해 청춘의 빛과 인생의 아련한 흥분 같은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봄에서 막 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에 드러나는 푸른 자연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야릇한 기대-그 기대의 절정이 곧 빈센트가 호수 건너 하얀집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마리안느이다. 단 한번의 만남을 통해 빈센트가 사랑하게 되는 여인 마리안느는 사실은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존재다. 안개낀 호수를 가로질러 우연히 마주치게 된 미녀이자, 갇혀있다고 말하는 알쏭달쏭한 존재이며 곧 여든이 가까운 기사라고 불리우는 사람과 결혼하게 될 것인유령의 성에 살고 있는 그야말로 유령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이 몽롱한 사랑의 기운은 비밀이기에 더욱 신비롭고 절실하게 빈센트를 버겁게 한다. 빈센트가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것이 곧 마리안느와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러나 그 사랑은 얼마나 아련하고 희미하며 몽롱하던지.
소년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흐릿한 안개낀 호수를 건너 마리안느를 만나고 곧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가 사라진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술이 몇 순배쯤 돌고 네모난 탁자를 둘러싼 대여섯의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은색의 머리칼은 이마 위에서 땀에 젖었고 그의 눈은 희미한 기억 속에 바위처럼 굳건한 마리안느를 추억하듯 들고 있던 술잔 속을 응시한다-내청춘 마리안느!-그것은 청춘의 다리를 건너온 수많은 빈센트들의 가슴속에 안개처럼 희미하게 남아있는 아련한 내면의 비밀같은 그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