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문명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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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은 마블 코믹스의 스탠 리와 스티브 딕토에 의해 처음 창조되었다. 1962년 8월 어메이징 판타지(Amasing Fantasy) 마지막 호에 최초로 등장한 이래 단행본으로, TV시리즈물 등으로 만들어져 전세계 수많은 소년과 소녀들의 꿈과 환상을 자극해 왔다. 이쯤되면 헐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데 그간 저작권 문제 때문에 2000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극장용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여름 극장가를 한창 달구고 있는 2편은 전편의 흥행 성적을 가볍게 뛰어넘었을 뿐 아니라 작품성 면에서도 평론가들의 호평 일색이다. 흔히 1편보다 더 성공한 2편은 흔치 않다고 하는 영화계의 관례를 깼을 뿐 아니라 더 깊어지고 철학적이라는 평이다.

그랬거나 말거나 영화가 일단 사각의 스크린에서 제 역할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 체험이 된다. 중력을 이기려는 인간의 욕망이 스파이더맨이라는 상상의 인물을 자극했을 것이라고 믿는 관객은 스파이더맨이 공중을 곡예하듯 거침없이 내달리거나 벽과 천장을 내키는 대로 달려가는 모습에서 더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다소 교훈적인 사실에 경도된 관객이라면 피터가 매번 집세도 못내고 쩔쩔매거나 번번이 일터에서 해고되다가 위기의 순간에 선량한 시민을 구하는 영웅으로 변신하는 모습에서 결정적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다. 혹은 비밀을 간직한 존재의 고독을 동정하는 관객이라면 진실을 모르는 타인들과 스파이더맨과 피터라는 인물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에서 스릴을 맛볼 수도 있다. 그야말로 처지와 경험에 따라 각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다양한 감상이 있을 법하다. 그런데 영화를 보든 또는 그 밖에 다른 것을 하든 이 개인적 체험은 과연 순수하게 개인에게만 귀착될 수 있는 문제인가.




「이슬람문명」은 2년 전 흔히 9.11테러로 말해지는 그 사건 이후, 이슬람문명에 대한 관심과 우려가 높아진 덕에 세상에 나오게 된 책들 중의 하나다. 지은이 정수일 역시 이력이 만만치 않은 사람이고 보니 책을 읽기도 전에 어떤 선입관이 작용할 것 같다. 아무려나 북경대학과 카이로대학 동방학부에서 이슬람을 공부했고 <이븐 바투타 여행기> 등 이미 여러 권의 역서와 저서를 낸 바 있으므로 이 쪽 계통의 전문가라 할 만하다.

세계의 13억 인구와 50여 개국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고 소위 ‘이슬람 공동체’라고 하는 동질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지만 우리가 이 문화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일련의 불행한 사건들이 있고 나서인 것 같다. 물론 지리적인 거리감과 문화의 이질성이 큰 몫을 했을 것에 틀림없지만 그것 역시 서구 중심적인 학문 풍토와 사회 지향의 결과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파리와 카이로를 비교했을 때 당연히 파리가 거리로는 더 멀다. 그러나 문화적 측면에서는 그 반대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정수일도 서구 역사에서 중세 문화를 꽃피워 고대와 근대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담당했던 이슬람문명이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은 순전히 서구 중심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가한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는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오해와 왜곡, 심지어 능멸를 당하는 종교라고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이슬람교에 대한 오해가 ‘한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검’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말은 13세기 중엽 십자군이 이슬람 원정에서 최후의 패배를 당하던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은 꾸르안(코란의 아랍식 표현)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지은이 설명이다. 이슬람이란 아랍어도 원래 ‘순종’과 ‘평화’의 뜻을 담고 있다. 또한 이슬람교는 관용성과 융통성의 종교다. 이슬람의 가장 근본적인 법원인 경전 <꾸르안>과 교조 무함마드의 언행을 수록한 준경전 격의 <하디스>에는 이를 증명하는 구절이 곳곳에 있다.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거나 여성에게 운전 면허를 허용할 것인가 말것인가가 중요한 사회문제이고 종교를 위해 자살테러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이슬람의 본질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슬람에 대한 앎이 없고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한 말에 전적으로 기대어 이슬람을 볼 수밖에 없을 터이므로 이슬람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야말로 이슬람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판단을 세울 수 있는 기본일 것이라는 지은이의 말은 그래서 손을 들어 줄 만하다. 13장에 달하는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마치 사회 교과서 같이 목적에 충실하다. 이슬람을 왜 알아야 하는가에서부터 이슬람의 출현과 종교관, 경제관, 정치관, 사회 및 예술 등을 아우르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한국과 이슬람의 바람직한 관계에 이르기까지 성실하게 고찰하고 있으니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슬람문명이 생각보다 우리와 생판 이질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우리 역사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을 만큼 이슬람문명과는 인연이 깊다. 경주의 괘릉에 버티고 서 있는 서역인은 페르시아인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고려 속요 ‘쌍화점’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탁주, 청주와 더불어 한국의 3대 토주의 하나로 꼽히는 소주는 그 연원이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서아시아 무슬림들의 양주법에서 온 것이다. 지은이는 우리 훈민정음에도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위구르어의 언어적 요소가 참입되었을 개연성을 넌지시 비치기도 한다.

무시와 폄하가 모르기 때문에 저질러졌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핑계가 될 수 없다. 문명의 충돌이니 어쩌고 하는 서구식 개념을 앞질러 다양성에 대한 관용, 낯선 것에 대한 배려, 나아가 선에 대한 공동의 희망을 가지려 하는 노력이야말로 소위 문명인이 가져야 할 첫 번째 미덕이다. 그렇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대미문의 살인 전쟁에서 우리가 편들어야 할 대상은 자명해진다.

내가 받은 교육, 경험, 사람과의 관계 더 나아가 내가 속한 공동체의 통념이 결과적으로 나라는 개인의 사고와 생활에 족적을 그어 놓은 바, 한편의 영화를 보는 행위에서부터 전혀 다른 문화권의 사람에 대한 이해에 이르기까지 개인적 체험이란 이런 것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체험이 개인적이라 하더라도 그 근저에는 사회적인 것을 뛰어넘을 수 없는 어떤 경계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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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여자 - 2004 노벨문학상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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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년 피렌체의 악기제작자 B.크리스토포리가 처음 피아노를 제작했을 때만 해도 이 악기가 오늘날과 같이 가장 대중적인 악기로 사랑받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18세기 사람들에게 피아노의 발명은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피아노 발명이전에 존재하고 있던  하프시코드는 건반에 연결된 격철로 현을 뜯어서 소리를 내기 때문에 음량조절이 안되고 큰소리를 얻을 수 없었다. 클라비코드는 현을 뜯는 것이 아니라 건반에 연결된 탄젠트로 현을 바로 때리도록 되어 있지만 역시 큰 음량을 얻을 수 없었다. 이에 비해 <강약을 줄 수 있는 하프시코(Gravicembalocolpianoeforte)-이에서 피아노포르테 또는 포르테피아노란 이름이 생겨났고 다시 피아노라 줄여서 오늘에 이름->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피아노는 강약을 자유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이 움직임이 해머에 전달되고 이 해머가 현을 때려 소리를 내게 되는데 강약의 폭은 오르간을 제외하면 가장 크다. 피아노가 점차 하프시코드와 클라비코드의 자리를 밀어내고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 데는, 음악의 표현이 자유로운 강약 변화를 중요시하고 음악의 장(場)이 한정된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 폭넓은 대중으로, 따라서 큰 음량을 요구하는 대회장으로 이행하기 시작한 18세기 시대 정신의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피아노가 처음부터 대중의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평균율 24곡을 작곡한 바흐도 1726년 질버만이 제작한 피아노를 처음 보았을 때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고 하니 말이다. 1786년에 이르러서야 런던에서 최초로 피아노 공개 독주회가 열린다.




‘피아노 치는 여자’는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다. 짐작대로 작가는 음악을 공부했고 자신을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키우려는 어머니에 반발해 연극과 문학의 길을 갔다. 이 작가에게서처럼 억압의 결과가 뛰어난 작품으로 이어진다고 한다면 작가에게 억압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의 전제조건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작가 개인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일 테지만.

‘피아노 치는 여자’ 에리카는 서른 후반의 음악원 선생이다. 그녀는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유럽의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되는 목표로 키워졌지만 지금은 그저 음악원 피아노 선생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아버지가 쓰던 면도칼로 자신의 육체를 찢거나, 남자들만이 가는 핍쇼에 가서 남자들처럼 지켜보면서 또는 밤늦은 시간 공원에서 낯선 남녀의 정사 장면을 몰래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감정적 결핍의 존재이다. 그렇다면 천재 음악가들을 자기 식대로 조롱하고 평생 가난과 고독 속에 살았던 슈베르트에 대한 연민을 표함으로써 스스로 해방을 누릴 뿐 아니라 가끔씩 미숙한 남자 학생들에게 질타를 가하고, 남자들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는 음악 계보를 해체하며 즐거워하는 에리카에게서 페미니스트를 엿볼 수 있는 것일까.

이런 딸에게 병적일만큼 집착하는 어머니는 에리카의 귀가 시간과 의상까지 통제한다. 얼핏 보아서도 에리카와 어머니의 관계는 통상의 모녀관계 이상으로 보인다. 에리카는 아버지가 정신병원으로 가버리자 그 자리를 대신했으며 어머니는 이런 딸에게 퇴장한 남편의 역할까지 요구하고 있다. 어머니는 에리카를 자신의 둥지에 영원히 종속시키기 위해 다른 어떤 사회적 관계도 허용할 수 없다. 친구 하나 없는 에리카 역시 이런 관계에 잘 길들여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타인과의 거리두기와 부정하기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존재로 키워진 것이다. 이런 어머니와 에리카에게 클레머가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흔들린다. 음악원 제자인 이 연하의 남자는 도도한 에리카를 굴복시켜서 이후 자신의 여성 편력의 시범연습 정도로 삼으려는 생각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클레머의 기대와는 달리 에리카는 통상의 남녀관계를 거부하고 급기야 사랑에 있어서 남성의 지배를 거부하기 위해 편지로 자신의 성적 요구를 전달한다. 평생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통상의 관계를 거부할 줄 알았지만 결국 부드럽게 사랑해 줄 것을 기대한 에리카에게 돌아온 것은 클레머의 폭력이었다. 복수하기 위해 칼을 가방 속에 숨겨들고 가지만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찌르는 것과 다시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 ‘피아노 치는 여자’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에 위해 2001년 ‘La Pianiste'란 제목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슈베르트의 피아노3중주가 몹시 인상적이었던 영화는 원작을 아주 짜임새 있게 잘 표현했다. 영화의 인상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원작을 읽어보고 싶다는 바램이 생겼다. 그러나 책을 구하는 것 만큼이나 읽기가 쉽지 않았다. 문장을 읽어내는 내 능력의 한계를 느낄 만큼 작가의 문체(물론 번역된 문체이긴 하지만)가 어려웠다. 어쩌면 이것은 문체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가 워낙 논쟁적인 탓도 있으리라. 어머니와 딸과의 관계, 남성과 여성의 관계 혹은 지배와 복종의 관계,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음악과 삶과의 관계 -이 모든 것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가지는 무게로 본다면 말이다. 옐리네크가 의식적으로 사회에서 규정하는 여성의 성을 끝없이 조롱하고 관계의 폭력성을 가차없이 폭로하는 방식으로 이와 같은 쉽지 않은 문장을 택한 것이라고 섣불리 단정해 본다.

피아노 연주자는 220개를 전후한 검고 흰 건반들과 검은 벽 앞에 청중을 등지고 앉는다. 이 경우 청중은 기껏해야 후면이나 측면의 배경이 될 뿐이다. 그래서 피아노 치는 사람은 고독하다. 자신의 손가락과 악보, 희고 검은 건반과 검은 벽만이 존재한다. 연주회는 외면에 치중하는ꡐ광대놀음ꡑ이며 ,ꡒ예술가는 오직 고독 속에서만 일할 수 있다ꡓ는 믿음으로 32세의 나이에 완전히 무대를 떠나버린 글렌 굴드에게 가장 잘 어울렸던 악기 피아노- 이제 이 피아노 악기 자체가 갖는 고립성이 피아노 치는 여자 에리카 코후트라는 인물의 그것과 어떻게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지 감상하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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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싱의 빅뱅 - 갈릴레오 총서 11 갈릴레오 총서 17
사이먼 싱 지음, 곽영직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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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

사이먼 싱/영림카디날

사실 몇 백 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기란 쉽지 않는 법이다. 권하는 입장에서나 권함을 받는 입장에서나 선뜻 오우케이하기 어려운 것이, 실상 서로 체면치레의 인사말에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좋은 책이란 확신’이 있어야 하고 또 ‘꼭 읽을 것이란’ 다짐이 상호교환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바쁜 일상에 쫓기다가 잠깐이나마 위로받기 위해서, 또는 문자그대도 쉬어가기 위해서 또는 비업무적 자유 시간을 무언가 즐거운 것으로 메우기 위해서 책을 집어드는 사람에게 500쪽이 족히 넘는 책을 읽어보라고 권한다는 것은 어지간히 염치없는 짓이기도 하다. 기껏해야 주관적 확신 이외는 달리 추천의 뚜렷한 사유를 들이밀기 어려울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빅뱅이론이란, 지극히 짧은 순간의 대폭발에 의해 우주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우주는 진화를 거듭해 오늘에 이르렀다는 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빅뱅이란 용어는 이 이론에 반대하던 영국의 프레드 호일이 비아냥의 의미로 처음 사용한 말이었다. 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이론이 있기 훨씬 이전, 신화가 이 땅을 지배하던 아득히 먼 시절부터 우주의 근원에 대한 탐구는 있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늘상 신화의 몫이었다. 신화가 아닌 인간의 사유에 의존해 우주를 인식하고 그 존재의 비밀을 탐색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 경의 고대 그리스 시대였다. 이때부터 비로소 과학의 영역에서 우주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저자는 천동설에서 지동설, 은하의 발견과 우주의 팽창, 상대성이론 등 세기마다 거듭되는 인간사유의 발전과 함께 때로는 우연에 의해 때로는 집요한 관측과 실험에 의해 우리 인간의 물리적 존재는 한없이 작고 보잘 것 없어져 갔지만 그만큼 우주적 진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는 빅뱅이론이 우주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는 최종의 완벽한 이론이라고 고집하진 않는다. 빅뱅이론은 우주와 우리 자신의 본성에 대해 현재로선 가장 합리적인 대답을 주고 있지만 언제 이 빅뱅의 자리를 다른 이론이 대체할 지는 모를 일이라며 가능성을 열어둔다. 사이먼 싱은 과학저술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이 거대한 ‘우주적’ 문제를 한권의 책속에 집약시킴으로써 전문가의 영역이던 과학을 일반 독서의 대상으로 보편화시켰다. 서술은 쉽고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과학저술이란 선입견에 주춤하던 독자들도 틀림없이 환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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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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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땐 곧잘 믿곤 하였다, 사람과 이야기와 노래를.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믿음은 조금씩 사라졌다. 세계가 표리부동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이 세계가 ‘진부한 이미지들로 가득한’ 곳일 뿐이며 가치있는 것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절망적 인식에 도달했던 적도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지금도 유효한 인식일 것이다. 결정적 계기가 생겨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무덤까지 가지고 갈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이 절망적 인식을 안고 죽는다면 가엾은 노릇일까? 생각은 중학교 때 읽었던 ‘성채’의 마지막으로까지 이어진다. J.A.크로닌의 소설 막바지는, 한때 탄광촌에서 무료 의료봉사를 하며 부조리한 사회에 맞서기도 하였으나 상류사회의 부와 명예에 맛을 들여 사랑하는 아내까지 버렸던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다시 아내에게 돌아오고, 이 주인공의 아내가 기쁜 마음으로 남편이 좋아했던 버터를 사오다 트럭에 치여 죽는 것으로 끝난다. 나는 가끔 그녀의 죽음은 행복했을까 생각해 보곤 하였다.


5월의 어느날 밤 마리안네는 상공인협회가 주는 작가상 시상식에서 처음 만난 여인에게 ‘당신과 함께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한마디 말을 던진 남자를 따라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떠난다. 그녀는 어느 한곳에 고정되지 않고 자유로운 그래서 불안정한 작가 베르톨트와 어릴 적 이루지 못한 사랑의 완성을 꿈꾸고 현실의 공허와 존재의 불안을 감당할 힘을 얻고자 했다. 불쑥 찾아온 사랑의 기회에 용감히 생을 맡길 줄 알았던 마리안네는 그러나 역시 그런 위험한 사랑 역시 남편과의 지난 6 년간의 무료한 삶과 닮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더욱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만, 11월이 다가올수록 베르톨트가 마치 처음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찾아오리란 사실을 예감한다. 늦어도 11월에는, 베르톨트의 작품이 완성되고 작은 폭스바겐을 하나 사서, 어디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을 것이었다.


사랑의 종말은 죽음과 함께라야 납득이 된다. 그렇지 않은 사랑의 종말을 나는 상상할 수가 없다. 마리안네와 베르톨트는 다시 만나고 그들은 폭스바겐을 타고 떠난다. 그리곤 죽음! 사고였지만, 예정된 종말이었다. 마리안네의 죽음은 행복했을까? 아니 그녀는 행복하게 죽었을까? 나는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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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도둑을 쳐다보지 마세요
이사벨 코프만 지음, 박명숙 옮김 / 예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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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블로그가 무엇일까? 최근엔 홈페이지보다 블로그가 대세라는데,그걸 모르면, 요즘 살아남기 힘들다고까지 하던데. 하지만 인터넷에 글 따위나 남기는 그런, 자기과시형 인간이 되고 싶진 않다.....

그러나, 시대를 거스를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어느새 알라딘 서재에 나의 블로그-지금도 이게 뭔지 정확히 모르겠다. 일기장인지,낙서장인지, 독서감상문을 인터넷에 옮겨 놓은 것인지-를 가지고 가끔이지만 독후감을 쓰고 있다. 누가 이런 글을 읽기나 하겠는가? 무언가 쓰고 싶을 때가 있지만, 쓸 것도 없고, 쓸 재주도 없고, 그냥 읽은 책에 대해 한마디 평이나 해두자는 심산에서 시작하였다. 혹시 쓰다보면, 글실력이 좀 늘지나 않을까하는, 뻔뻔한 기대를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읽은 책을 다 쓰기에는, 내가 너무 게으르다. 생각의 속도를 손이 제대로 따라잡지도 못한다. 몸은 늘 뒤처진다. 길을 걷다가 내가 보기에도 그럴듯한 생각들이 솟구칠 때가 있지만, 그 때를 지나면,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한때는 보이스리코더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삐삐가 지배하던 시절, 우연히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내가 아는 나의 목소리와 너무 달라, 소스라치게 놀랐다.  참으로 좋은 책인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 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과 타인에게 어떻게 들리는가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읽지 않았다면, 나자신의 목소리를 혐오했을 것이다.

서재에 독후감을 남기면서, 생각한다. 나는 왜 자꾸 이런 짓을 하는가? 읽으면서 즐거우면 그만이지, 왜 기록으로 남겨두려 하는 것일까?

나 역시, 나 여기 있어요 하는 식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어렵게 인정해야 했다. 문장력을 높이고, 아름다운 것에 대해 기억하고 싶고, 좋은 글을 쓴 작가를 칭찬하고 싶고, 뭐 그런 이유들은, 사실 부차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정작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 최고의 목적아니었을까?

지나가는 도둑은 쳐다보면 아니 된다. 그는 나의 이런 마음조차도 다 훔쳐갈 것이다. 내가 읽은 책과, 내가 게을러서 미처 기록해 두지 않은 생각들을, 그는 순식간에 낚아 채 갈 것이다. 내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이 고스란히 사라지더라도, 나는 그 사실조차도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왜 이 도둑은,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의 기억을 훔쳐서 무얼 하려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책을 읽을 잠재적 독자를 위해 언급하지 않겠다.

새롭고 반짝이는 소재이긴 한데, 줄거리가 기대만큼 영글지는 못한 느낌이다. 한겨레21에서 광고를 보고 호기심이 가서 읽어보기로 한 책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왠일인지 토마스 만이 생각났다. 이럴수가!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해 평생 고민했던, 그가 생각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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