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수수께끼 - 마빈 해리스 문화 인류학 3부작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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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 암각화의 그림은 총 290여 점이 넘는다.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있어왔을 암석에는 고래, 호랑이, 사슴, 돼지, 소, 사람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바다짐승과 뭍짐승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그 모형은 언뜻 보면 마치 만화의 밑그림 같기도 하고 또는 무슨 조립식 모형 장남감의 도면 같기도 하다. 1971년에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대략 3천년 전에서 1천5백년 전의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이 연대 추정을 두고 누군가는 상상력의 부족을 들었다. 라스코 동굴의 벽화를 1만 7천여 년 전의 것으로 얘기하는 유럽인들에 비해서 3천년은 너무 소박하다는 말일 터이다. 이 바위그림들은 언제 그려진 것일까? 왜 우리의 선조들은 바위에다 이런 그림들을 새겨 넣었을까?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고 그 시간의 거리가 감추고 있는 비밀에 한 뼘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손과 눈으로 감각하면서 체험하는 것은 시간과 무관한 무언가를 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이것은 아쉽게도 물이 마르는 가뭄 때가 되어야 가능할 것 같다. 반구대 암각화는 근처의 댐 때문에 거의 일년 내내 물에 잠겨있다.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이긴 하지만 나는 거의 박물관에 가지 않는다. 흐르는 시간을 애써 붙잡아 두려는 시도 같아 마음이 영 불편하기도 하고, 생활이라는 실체가 박물관이라는 유형의 공간 속에서 아무리 애써봤자 그 원래의 진실을 구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여기는 축에 내가 속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연출된 생활이고 해석된 문화일 뿐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결벽증이려나. 시간 속에서 저절로 마모되거나 스러진다한들 모든 유한한 존재의 당연한 운명, 애써 지킨다거나 보존한다는 것은 어쩌면 시간을 거스르려는 인간 욕망의 고상한 변명일 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몰역사적인 편견이라고 비웃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반구대 암각화에서는 좀 다른 의미에서 기분이 상한다. 라스코 동굴의 발견보다 덜 극적인 발견 일화 때문도 아니고 상상력의 부족에서 오는 민족적 콤플렉스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물속에 잠겨서 마모되고 스러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지형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인위적인 댐때문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조금은 서글픈 그 어떤 것 때문이라고만 해두자.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는 이즈음에 집어든 책이다. 책은 1975년에 쓰여졌고 우리나라에선 1982년에 번역되어 나왔으니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읽었을 법하다.

원제 ‘암소, 돼지, 전쟁 그리고 마녀:문화의 수수께끼’에서 알 수 있듯 책은 우리에게 생소한 암소숭배와 돼지숭배 및 혐오 그리고 부족간 전쟁의 원인과 결과, 메시아니즘과 마녀사냥이 함축하고 있는 생태학적, 역사적 제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각각의 문화가 표면에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진실을 그 속에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삶의 진실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사회단위가 신성시하는 것과 금기시하는 것, 전설과 신화 등의 문화 현상을 문화생태학적인 측면에서부터 경제, 사회, 정치적 맥락에서 통합적으로 고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중세 때 휘몰아쳤던 마녀사냥을 예로 들어보자. 마녀가 실제 존재했든 안했든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의 타락과 지배에 저항하는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그것은 유효적절한 방패 구실을 했다. 가뭄이 들거나 병이 들거나 빵값이 올라도 마녀가 술수를 부린 것으로 하면 되었다. 공포와 고립을 통해 교회와 지배자들은 위협적인 메시아니즘의 발흥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힌두교도들의 암소 숭배는 어떤가? 인도 농부들이 굶주리면서도 암소를 잡아먹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자연환경뿐 아니라 경제구조, 인구분포 등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저자는 암소숭배가 인간의 잠재능력을 개발하여 낭비나 나태가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는 저에너지 생태계 속에서 인간이 지속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에너지 소비량과 에너지 산출량을 연구한 결과 인도는 미국보다 더 효과적으로 소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용하면서 산업화된 국가에서 누리고 있는 높은 생활수준은 높은 생산효율성의 결과가 아니고 1인당 사용가능한 에너지량이 급격히 증가된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진보’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단순한 수치의 장난이거나 유한한 자원을 축으로 벌이는 제로섬 게임의 일측면일 수 있다는 생각에 직면하게 된다.

최근의 반문화운동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 근저에서 과학문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오히려 과학기술이 불평등과 착취를 심화시키지 않고 완화시키려면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지를 대중들이 더욱 알 수 없게 만들 뿐이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흔히 우리가 ‘원시적이다’ 혹은 ‘야만적이다’라고 하는 전쟁, 남녀차별, 고문, 억압 등이 실은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다만 좀더 고도로 은폐되고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하지 않는다. 마빈 해리스가 간파하는 진실이란, 전역사에 걸쳐 혹은 전 인류에 걸쳐 존재하는 문화양식이란 더 낫고 덜한 것이라는 이분법적이고 단순한 도식으로가 아니라 다양한 영역의 과학적인 객관성에 기초하여 설명하고 이해해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궁극으로 바라는 것은 일상의 의식을 ‘비신화하려 애씀으로써 평화와 정치, 경제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전망을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 대해 건강한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야노마모족 부락에서 끊이지 않는 분열과 전쟁을 단순히 그들이 호전적인 부족이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고 만다면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은 여전히 불가항력적이고 통제불능한 것이라는 절망적 인식에 도달하고 말 것이며 더 나은 세상이란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은 그래서 더욱 울림이 크다.

흔히 서구인들에 의해 기술된 역사가 서구인들의 관점에서 씌어진 것이라 기술 대상인 문화 향유자들의 본질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그 점에서는 다행이 이 책은 최대한 객관적인(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시각을 유지하려고 애썼다고 생각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 문화적 불가지론에 빠질 위험을 과학적 객관성으로 방어할 것을 역설하고 있기까지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과학적 객관성이란, 과학 기술이라는 물질적 측면에 과도하게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것쯤은 현명한 독자들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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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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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이 좋다. 왜냐고 묻는다면, 글쎄 뚜렷한 대답을 찾기가 어렵다. 마냥 좋을 뿐이다. 그래서 나의 독서의 대부분은 소설읽기에 치중되어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소설이면 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책에는 어쩐지 심술이 난다. 그래서 두어 달 정도 사람들의 열광이 바닥에 이를 때까지 일부러 모른체 제쳐 둔다. 좋은 책은 대개 늦게라도 만나게 되는 법이므로. 그렇다면 당신은 물을 것이다. 좋은 책이란 무엇인가? 또 글쎄라고 대답할 밖에.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므로 이 또한 취향의 영역이라고 답한다면 너무 궁색하려나.

로알드 달의 ‘맛’에 대해 좋고 싫음을 따진다면, 역시 취향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열 편의 이야기들 역시 기발한 상상력과 엉뚱한 아이디어라는 공통의 분모를 가지면서 나름대로 독특하다. 때론 유쾌하기도 하고 공포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이야기들은 또한 매번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다. 그러나 독특하긴 하지만 그리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라고 되받아 칠 사람도 있을 법하다. 나 역시 읽으면서 레몽 장의 ‘오페라 택시(세계사,1998.)’가 떠올랐으니까. 그러나 굳이 비교하자면, 레몽 장의 ‘오페라 택시’에서 프랑스식 상상력과 유머 또는 기지를 느낄 수 있었다면 로알드 달의 ‘맛’은 영국인다운 어떤 것을 맛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외에 달리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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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지음 / 시와사회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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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우연한 방문, 두 번의 잊음 그리고 두 번의 해후가 있었다. 어쩐지 그 일련의 우연이 나에게 어떤 암시를 준다는 생각이 들 즈음 아니나 다를까 이중섭을 닮은,더 정확히 말해 이중섭의 서정을 일깨우는 동시대의 시인 백석의 시집을 읽는다. 역시 평안도가 고향인 시인 백석의 시는 화가 이중섭의 그림에서 흠씬 풍기는 서정의 한 부분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가난하고 어리숙했던 그러나 명백히 천재 화가라고 평가받는 이중섭이 고단한 피난살이를 서귀포의 작은 단칸방에서 이어갈 때조차 사물들은, 생물들은 다정하고 서글픈 그러나 아름다운 삶의 한 부분이었다. 그가 살았던 1.3평 정도의 단칸방에 마치 물리적인 시간의 축적과는 무관한 듯 지금은 홀로 방을 지키고 있는 그의 소박한 자작시는, 그래서 더욱 가슴을 에이고 그래서 더욱 그를 그리웁게 하는 것인가.

‘…삶은/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내가 하필 백석의 시에서 이중섭을 보았다는 것은 지극히 사적인 정서에 기인할 뿐이다. 그 두사람이 공교롭게도 동시대인이었고 똑같이 평안도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저 기록을 통해  나중에 발견한 우연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이중섭이 즐겨 그림의 소재로 삼았던 게와 물고기, 어린아이가 있던 곳, 그가 그림을 구상했을 섶섬과 문득 내 눈을 끈 골방의 자작시를 두 번이나 보고 온 뒤, 내 속에 무언가가 남아있었고 그것이 결국 백석의 시로 이끌었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런 것이다. 우리 인간의 삶이란 꼭 논리적으로 설명가능한 것만으로 채워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니다. 어쩌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바대로 어떤 향토적인 것, 아련한 고향의 내음  혹은 삶의 서글픔 그러나 그 속의 아름다운 것들을 이중섭과 백석에게서 공통으로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백석은 참 아름다운 시인이다. 그의 시도 역시 아름답다.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타고 산골로 가서 나타샤와’ 사랑하기를 꿈꾸는 이 준수한 외모의 시인은, 주로 ꡐ노루를 닮은ꡑ 고향사람들과 소나 오리, 자그마한 벌레에서 갈대나 단풍, 석양 등에 이르기까지 삶을 그 자체만으로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자연을 시의 소재로 다루었다. 물론 먼 타향ꡐ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ꡑ에서ꡐ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ꡑ하거나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같은 건 더러워버리는’ 역사적 존재로서 시인의 고뇌도 마다하지 않는다.

야심차게 백석 시의 대중화를 표방하고 원시(原詩)의 의도를 해치지 않는 한에서 최대한 현대어로 시어를 옮겨 책을 펴냈지만 여전히 어렵다는 출판사의 고백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의 언어는 현대인인 나로서는 한번에 읽어내기 쉽지 않다. 그것은 영어사범과를 졸업한 이력이라면 짐작해 볼 수 있음직한 서양의 시풍이나 외래어의 남용 때문이 결코 아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로지 순수 토속어로 시를 썼다는 데서 오는 낯설음 때문이다.

그러나 낯익지 않은 어휘의 생소함을 감수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이 책에는 있다.  어릴 적 외가에서 ‘아배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겨울밤의 반가운 국수맛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다면, 혹은 명절날 ꡐ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ꡑ,ꡐ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릇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ꡑ한 기억이 어슴푸레하게라도 남아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미 시속으로 반쯤은 걸어 들어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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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 사랑하기
빌헬름 게나찌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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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이 살면서 가장 곤혹스러운 순간은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때이다.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비극이다. 짧은 여름휴가 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동시에 산에 있을 수 없으며, 자동차를 타는 동시에 기차를 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황은 점심메뉴로 김치찌개냐 스파게티를 먹느냐 하는 것만큼 절실하지만 선택의 뒤에는 늘 후회와 갈망이 남는다. 버려진 나머지 것의 가치를 어떻게 보상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동일한 순간에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다면 세상 근심의 절반은 해결될 터이다.

이야기는 양다리 걸친 남자로부터 시작한다. 세상의 종말론을 강의하는 것으로 밥벌어 먹고 사는 주인공은 이제 살만큼 살았고 연애의 감미로움과 외도의 아슬아슬한 짜릿함을 추구할 나이도 지났다. 이제 좀 질서있는 인생을 살아야 할 때인 것이다. 잔드라와 유디트! 둘 중 어느 누구를 선택하느냐를 결정해야 하는데, 주인공은 도무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자상하고 세심하게 보살펴주고 생활력도 강한 잔드라. 그러나 그녀는 예술적 감수성과 교양이 부족하다. 반면 지적이고 예술 감각이 뛰어난 유디트, 불행하게도 그녀는 자주 우울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혼자 있기를 선호한다. 주인공은 엄마와 아빠 중 한사람만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변명한다. 그냥 이대로 잔드라와 유디트를 오가며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빌헤름 게나지노의 ‘두여자 사랑하기’의 원제는 ‘사랑의 미혹’이다. 선택의 기로에 선 양다리 걸친 남자가 겪는 심리적 윤리적 갈등기이도 하면서 동시에 지나치게 조직화되고 질서 정연한 세상에 대한 힐난이다. 늘 ‘세일’이라는 미끼로 소비자의 주머니를 노리고, 도처에 사회 부적응자만을 길러내는 이 세계 자체가 부조화이고 부조리인데, 두 여자를 오간다고 해서 무어 그리 잘못일까. 소재는 자극적이지만 내용은 철학적이다. 가벼운 읽을거리를 찾는 독자나 사변적인 읽을거리를 원하는 독자 모두를 다 만족시키기엔 아쉬운 감이 없진 않지만, 독서의 계절을 시작하는 첫 스타트로는 괜찮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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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세상의 아름다움 태학산문선 105
정약용 지음, 박무영 옮김 / 태학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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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코피에프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를 들으면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한의 공간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반주 없이 첼로 독주로 시작되는 첫 도입부는 처음부터 감정의 긴장을 극대화하여 마치 슬픔의 극한까지 이르는 듯하다가 지극히 정서적인 멜로디로 마음의 어떤 곳을 사정없이 건드린다. 그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일종의 감정적 액스터시다.

세 차례나 개작의 손길을 거친 이 쉽지 않은 첼로 소나타 곡은 음악이 어떤 의미에서든 마음의 영역임을 여지없이 증명해 준다. 왜 어떤 특별한 음악은 이토록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인가?

휴가 때면 으레 몇가지를 마음속에 품는다. 아마 내게는 이 물음이 화두가 된 듯하다. 시작은 마음으로부터였을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궁리출판사)’라는 궁금증이 이 오리무중 마음의 영역에서 점차 대뇌 속 논리 영역으로 공간 이동을 한 결과, 과학과 음악이라는 상이한 분야를 넘나들며 음악이라는 난해한 세계를 설명하고 있는 책에 멈춘다. 호기롭게 과학으로 이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뜻을 품으며 나의 이번 휴가를 셈한다. 처음 시작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한 100여 쪽은 제법 재미도 쏠쏠해서 해부학적인 용어까지 꼼꼼히 챙겨가며 흐름을 잘 따라간 것 같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족이 500쪽은 넘을 전체 분량에서 200여 쪽을 넘기면서부터 개념이 흔들리고 혼란스럽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더운 여름 기온이 주는 산만함과 휴가라는 정신적 이완이 집중성을 떨어뜨렸을 것임에 틀림없지만 내 마음의 문제는 결국 그 해결을 무한정 미룰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만난 것이 이 책이다.

이전에 나는 정약용을 읽은 적이 없다. 그가 조선 정조 때의 개혁가요 경세가며 실학자였고 긴 유배기간 동안 목민심서며 경세유표, 마과회통 등의 책을 저술하였다는 정도의 성급하게 소화한 교과서적 지식이 전부라면 전부였다. 게다가 옛 어른의 글들이란 도무지 제대로 풀어쓴 것을 만난 적이 없어서인지 대개는 처음에는 제법 뜻을 좇아가다가도 끝까지 간 적이 드물게 따분하거나 고리타분한 것이라는 고약한 선입견까지 있었다.

그런데 이 ‘뜬 세상의 아름다움’은 일단 읽기가 쉽고 정갈하다. 옮긴이 박무영의 공이 크다 하겠다. 책의 처음부터 정약용의 인간적 면모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옮긴이의 선언대로 경세가요 정치개혁가 이전에 그가 어떤 면모의 인간이었는지에 글 전체가 집중되어 있다. 지아비로서 혹은 어버이로서 그리고 아우로서, 친구로서 평범한 사람이었으되 평범을 뛰어넘는 위대한 범부로서의 그를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사람다운 방식으로 ‘성화’하려고 했던 사람이라고 단정할 만큼 정약용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폐족의 자식으로서 장차 입신할 기회를 잃어버린 두아들에게 이미 그들이 진사가 되었고 급제도 하였다고 여긴다며 오직 독서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일이며 ‘폐족의 처지에 잘 대처’할 수 있는 길임을 당부하는 아비의 심정!  ‘남의 아비되어 이처럼 누를 끼치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 쉴 새 없이 저술에 전념한다는 고백에서는 어버이로서 그의 안타까움이 애처로울 지경이다. 그의 진심이 전해진 것일까? 그의 큰아들은 당대의 이름있는 시인이요, 둘째 아들은 ‘농가월령가’의 저자로 아버지의 뜻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정약용은 소나기 쏟아지는 날 세검정의 폭포수 구경 맛을 아는 풍류객이기도 하다. 촛불에 비친 국화 그림자를 감상하는 호사가이며 뜰에 죽란 울타리를 갖춘 화단을 만들어 친구들과 갖가지 꽃나무를 완상할 만큼 여유가 있었던 사람이다. 형인 약전에게 건강을 염려하며 개 잡는 방법에서 양념하는 법까지 ‘개고기 요리법’을 상세히 적어보낸 서간에서는 툭하고 웃음이 나온다. 부인이 유배지로 보낸 다섯폭 치마에 하피첩이라 하여 서화를 남겨 답할 만큼 순정한 남편이기도 했던 그가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것도 회혼시였다.




육십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날아갔으니/복사꽃 무성한 봄빛은 신혼 때 같구려/살아 이별, 죽어 이별에 사람이 늙지만/.../옛날의 하피첩은 먹 흔적이 아직 남았소/.../




사람의 가장 내밀한 정서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부부간의 애틋한 사랑이 예순 해를 넘기면서 더욱 견실한 믿음과 고마움으로 그들의 자손에게 다시 순환되는 듯한 느낌은 나만의 유별난 감상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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