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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보이 SF 걸작선 2
필립 K. 딕 외 지음, 앨리스 터너 엮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다나이드는 그리스 신화에서 소재를 취한 로뎅의 조각이다. 물론 다른 미술가들도 이 다나이드를 소재로 작품을 만들었을 터이지만 내가 아는 다나이드는 오직 이 로뎅의 다나이드 뿐이다. 도대체 어떤 연유로 이 아름다운 여인은 이토록 절망적으로 온 몸을 내던지고 엎드려 있는 것일까? 울고 있는 것일까? 숨이 끊어진 것일까? 한편으로 관능적이면서 한편으로 얼마나 철저하게 무방비인가? 여인이 저렇게 머리채를 내던지고 희고 긴 목덜미를 저토록 무방비로 드러내 보일 때만큼 절망적인 때는 도대체 언제인가?
다나이드는 다나오스의 딸들이란 뜻으로 아르고스의 왕이었던 다나오스는 자신의 사위들에 의해 멸망한다는 신탁을 받는다. 이에 자신의 50명의 딸들을 이집트의 왕 아이굽터스의 아들들 50명과 결혼하게 해서 딸들에게 첫날밤에 남편들의 생명을 빼앗도록 명령한다. 그 중에 단 한 명은 살육을 행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49명의 딸들은 남편을 살해한 죄로 저승에서 항아리에 물을 담아 구멍 뚫린 독에 물을 붇는 영겁의 벌을 받는다. 이 영겁의 벌에서 헤어날 수 없는 여인의 고통을 로뎅은 자신의 손으로 재생시킨다. 다시 예술이라는 영원속으로 그 가엾은 여인의 고통을 묶어 버린 것이다.
나는 이 영원 속에 묶여 버린 다나이드 때문에 울적하다. 그 소재를 어디서 취했든 사람이 괴로움 속에 ‘영원히’ 붙박힌다는 사실만큼 끔찍하고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이란 주제는 그것이 고통과 슬픔의 영역일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 많은 낙관론자들(?)의 욕망을 자극해 왔다. 질병없이 평생을 아니 영생한다는 것만큼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에게 달콤한 말은 없을 터이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틀림없이 인생은 아름답다라는 전제하에 제기되는 말이거나 아니면 ‘이 죽음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데서 오는 두려움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플레이보이’와 ‘SF'-이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낱말의 조합을 제목으로 삼은 책은 최근에 나왔다. 그러나 책에 실린 글들은 지금보다 족히 20년은 더 먼 시기에 쓰인 것들이 태반이다. ’해저2만리‘의 작가 프랑스의 질․베른이 그 창시자로 인정을 받고 있는 공상과학소설은 흔히 영원한 생명과 시간 여행, 현재와는 확연히 다른 방식의 삶을 그 주제로 삼는다.
노먼 스핀래드의 ‘어떤 임종’은 무한히 연장된 생명으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의 죽음이 물리적 시간상 뒤바뀌는데 이는 무한한 생명연장에의 욕구에 대한 경종일 뿐 아니라 근원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 것으로 보인다. J. G. 발라드의 「죽은 우주 비행사」는 우주 공간에 떠도는 죽은 연인의 시신을 거두려는 두 남녀가 회귀한 비행선에서 방출된 핵 방사능에 오염되어 비극적이 최후를 맞는다는 다소 우수어린 이야기다. 그보다 먼저 소개되는 레이․브래들버리의 ’화성의 죽은 도시‘는, 일단의 남녀가 화성의 미탐사 지역을 탐험하다가 각각 잠재된 욕망이 마술처럼 유감없이 현현하는 것을 보다가 파멸하게 되는 얘기다. 인간의 가없는 욕망은 파멸의 또다른 얼굴이라는 섬뜩한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이 세상의 마지막 밤‘이라는 짧은 글이 좋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서는 만날 수 없다. 세상의 종말이 바로 내일이란 걸 알아버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어제처럼 혹은 그 전전날처럼 설거지를 하고 아이를 어르고 깜빡 잊은 수돗물을 잠그는 일일 뿐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은 무한한 시간 속에 혼자 던져져 있다는 존재론적 문제에 기인할 지도 모른다는 어슐러 K 르귄의 ‘아홉생명’ 은 놓칠 수 없는 수작이다. 인간이 효율성을 내세워 창조한 복제인간의 인간성에 대한 질문이면서 더 나아가 인간의 유일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열명의 복제인간이 서로 하나의 팀을 이뤄 완벽하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지만 사고로 모두 죽고 하나만 남는다. 그 남은 하나는 전체인가, 일부인가? 혹은 인간인가, 아닌가?
12편의 글들은 각각 나름대로 독자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다. 책은 읽는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효용에 모두 충실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복제인간의 탄생이 SF의 몫만이 아닌 현재의 시점에서 과학의 발달과 인간의 욕망이 결합했을 때 어떤 일들이 가능할 지 상상해 보는데 길잡이는 될 만하다, 단 그것이 꼭 장미빛일 수만은 없다는 데 이 수십년 전의 작가들은 모두 일치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