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보이 SF 걸작선 2
필립 K. 딕 외 지음, 앨리스 터너 엮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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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이드는 그리스 신화에서 소재를 취한 로뎅의 조각이다. 물론 다른 미술가들도 이 다나이드를 소재로 작품을 만들었을 터이지만 내가 아는 다나이드는 오직 이 로뎅의 다나이드 뿐이다. 도대체 어떤 연유로 이 아름다운 여인은 이토록 절망적으로 온 몸을 내던지고 엎드려 있는 것일까? 울고 있는 것일까? 숨이 끊어진 것일까? 한편으로 관능적이면서 한편으로 얼마나 철저하게 무방비인가? 여인이 저렇게 머리채를 내던지고 희고 긴 목덜미를 저토록 무방비로 드러내 보일 때만큼 절망적인 때는 도대체 언제인가?

다나이드는 다나오스의 딸들이란 뜻으로 아르고스의 왕이었던 다나오스는 자신의 사위들에 의해 멸망한다는 신탁을 받는다. 이에 자신의 50명의 딸들을 이집트의 왕 아이굽터스의 아들들 50명과 결혼하게 해서 딸들에게 첫날밤에 남편들의 생명을 빼앗도록 명령한다. 그 중에 단 한 명은 살육을 행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49명의 딸들은 남편을 살해한 죄로 저승에서 항아리에 물을 담아 구멍 뚫린 독에 물을 붇는 영겁의 벌을 받는다. 이 영겁의 벌에서 헤어날 수 없는 여인의 고통을 로뎅은 자신의 손으로 재생시킨다. 다시 예술이라는 영원속으로 그 가엾은 여인의 고통을 묶어 버린 것이다.

나는 이 영원 속에 묶여 버린 다나이드 때문에 울적하다. 그 소재를 어디서 취했든 사람이 괴로움 속에 ‘영원히’ 붙박힌다는 사실만큼 끔찍하고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이란 주제는 그것이 고통과 슬픔의 영역일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 많은 낙관론자들(?)의 욕망을 자극해 왔다. 질병없이 평생을 아니 영생한다는 것만큼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에게 달콤한 말은 없을 터이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틀림없이 인생은 아름답다라는 전제하에 제기되는 말이거나 아니면 ‘이 죽음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데서 오는 두려움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플레이보이’와 ‘SF'-이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낱말의 조합을 제목으로 삼은 책은 최근에 나왔다. 그러나 책에 실린 글들은 지금보다 족히 20년은 더 먼 시기에 쓰인 것들이 태반이다. ’해저2만리‘의 작가 프랑스의 질․베른이 그 창시자로 인정을 받고 있는 공상과학소설은 흔히 영원한 생명과 시간 여행, 현재와는 확연히 다른 방식의 삶을 그 주제로 삼는다.

노먼 스핀래드의 ‘어떤 임종’은  무한히 연장된 생명으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의 죽음이 물리적 시간상 뒤바뀌는데 이는 무한한 생명연장에의 욕구에 대한 경종일 뿐 아니라 근원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 것으로 보인다. J. G. 발라드의 「죽은 우주 비행사」는 우주 공간에 떠도는 죽은 연인의 시신을 거두려는 두 남녀가 회귀한 비행선에서 방출된 핵 방사능에 오염되어 비극적이 최후를 맞는다는 다소 우수어린 이야기다. 그보다 먼저 소개되는 레이․브래들버리의 ’화성의 죽은 도시‘는, 일단의 남녀가 화성의 미탐사 지역을 탐험하다가 각각 잠재된 욕망이 마술처럼 유감없이 현현하는 것을 보다가 파멸하게 되는 얘기다. 인간의 가없는 욕망은 파멸의 또다른 얼굴이라는 섬뜩한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이 세상의 마지막 밤‘이라는 짧은 글이 좋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서는 만날 수 없다. 세상의 종말이 바로 내일이란 걸 알아버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어제처럼 혹은 그 전전날처럼 설거지를 하고 아이를 어르고 깜빡 잊은 수돗물을 잠그는 일일 뿐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은 무한한 시간 속에 혼자 던져져 있다는 존재론적 문제에 기인할 지도 모른다는 어슐러 K 르귄의 ‘아홉생명’ 은 놓칠 수 없는 수작이다. 인간이 효율성을 내세워 창조한 복제인간의 인간성에 대한 질문이면서 더 나아가 인간의 유일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열명의 복제인간이 서로 하나의 팀을 이뤄 완벽하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지만 사고로 모두 죽고 하나만 남는다. 그 남은 하나는 전체인가, 일부인가? 혹은 인간인가, 아닌가?

12편의 글들은 각각 나름대로 독자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다. 책은 읽는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효용에 모두 충실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복제인간의 탄생이 SF의 몫만이 아닌 현재의 시점에서 과학의 발달과 인간의 욕망이 결합했을 때 어떤 일들이 가능할 지 상상해 보는데 길잡이는 될 만하다, 단 그것이 꼭 장미빛일 수만은 없다는 데 이 수십년 전의 작가들은 모두 일치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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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정원
미셸 깽 지음, 이인숙 옮김 / 문학세계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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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처절한 정원에서/석류는 얼마나 애처로운가’-아폴리네르

  일부 성서학자들은 에덴 동산의 금단의 열매는 사과가 아니라 석류였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 진실여부를 우리가 직접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석류라는 식물은 아주 오래전부터 약용으로나 관상용으로나 인간에게 꽤나 효용가치가 높았던 모양이다.

  수분이 많고 신맛이 나는 석류열매는 날것으로 먹거나 즙을 만들어 먹으면 갈증을 없애준다. 어린시절 어긋난 이처럼 촘촘하게 박힌 못생긴 석류알을 입에 넣고 그 신맛에 진저리를 친 기억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석류는 안에 씨가 많아 다산의 상징이기도 해서 혼례복인 활옷이나 원삼에 문양으로 쓰이기도 한단다.

5~6월 경에는 노란색과 붉은색을 절묘하게 섞어놓은 듯한 오렌지 빛 붉은색의 꽃이 핀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오렌지빛이라고 하기엔 좀더 도발적이고 그렇다고 붉은색이라고 하기엔 좀 순진한 색이다. 사실 장미나 튤립처럼 꽃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노력없이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 수 있는 꽃이 있지만 석류는 그런 종류의 꽃은 아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고궁에서 우연히 시선에 부딪히는, 혹은 비바람에 흩어져 발길에 부딪쳐서야 비로소 그 꽃잎의 존재를 확인하는, 그런 종류의 꽃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류꽃은 참 예쁘다. 바람에 흔들리는 6월의 꽃잎은 차라리 여리고 가냘파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여름의 폭풍을 견딘 가을의 그 열매는 얼마나 단단하고 강인해 보이는지...




미셸 깽의 「처절한 정원」은 물론 이 석류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석류를 노래한 아폴리네르의 짧은 시를 제사(題詞)로 달고 죽음의 상황에 처한 작가의 아버지가 동생에게 그 시를 읊어주었다는 정도.

이야기는 2차 대전 당시 많은 유태인에게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모리스 파퐁의 재판에 한 어릿광대가 출입을 저지당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다시 모리스 파퐁의 재판에 참석하려는 그 어릿광대의 독백으로 끝이 난다. 흔히 2차세계대전을 그린 전쟁 소설이 그렇듯 이 책을 나치에 대한 선악일변도의 글로 지레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짧고 순진한 글은 나치의 만행에 대해서, 전쟁 속의 비참함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침묵의 무게가 오히려 사람의 정서를 자극하고 상상할 수 있는 한 최고로 전쟁의 비인간성을, 마침내 인간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주는 지도 모를 일이다.

책은 작가의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을 중심으로 씌어졌다. 초등학교 시절 자신을 몹시도 부끄럽게 했던 아버지 덕분에 작가는 세상에서 어릿광대를 가장 증오했다고 고백한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라는 ‘품위’있는 본업에도 불구하고 주말이면 어릿광대로 분장하고 사람들이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서 웃기는 일을 자처하는 것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때인지라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너무도 부끄러워 어떤 고아라도 원한다면 기꺼이 아버지를 주어버리겠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버지에게는 속죄할 만큼의 잘못이 있고 그래서 평생 어릿광대 노릇을 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학대한다고 짐작한다. 도대체 아버지는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이 비밀을 밝혀가는 것이 이 책의 중심 줄거리다. 책의 말미에 가서야 밝혀지는 진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다고 감추인 비밀이 꼭 잔인할 것이라고 짐작할 필요는 없다.

글은 짧고 문체는 명랑하다. 짧은 글은 부담이 적다. 그러나 글이 짧다고 해서 쉽게 생각할 만큼 녹록한 주제가 아님은 책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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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음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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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이사갈 아파트를 단장하다가 가구 모서리에 옆구리를 부딪쳤다. 약간의 통증이 있었지만 별 대수롭잖게 생각했다. 하루하루의 생활은 느긋하고 유쾌하며 고상했고 하는 일은 만족스러웠다. 아이들과 아내 역시 좋았고 그런대로 지낼 만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옆구리 통증이 심해졌다. 의사는 맹장을 의심했다. 처방전대로 약을 복용하고 안정을 취하려고 노력했지만 조금씩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왜 하필 나지?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우연하게도 나지?

우연한 사고가 사건의 핵심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가구 모서리에 옆구리를 부딪치지만 않았더라면, 이반 일리치(톨스토이 작 ‘이반 일리치의 죽음’)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토마스의 상급자가 좌골신경통이 도지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대신 토마스가 테레사가 있는 시골로 검진을 가지 않았더라면 토마스와 테레사의 사랑은 결코 싹트지 않았을 것이다(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우연에 의해 우리 인생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 논한다는 것은 쓸데없어 보인다. 우리 인생에 만약 두갈래 길이 있다고 해서 둘 중 하나를 미리 탐색해 보고 더 나은 것을 선택할 수는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 선택의 순간에 우연의 힘이 끼여든다고 해도 막을 도리가 없다. 어쩌면 매 순간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앞선 우연한 신경통의 재발, 우연한 부딪침, 우연히 발견한 책 한권, 심지어 우연히 후각을 자극한 마들레느 냄새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연의 값을 측정할 수는 있을까? 우연이 사건들의 공시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A가 일어날 때 B가 일어날 수 있는 수적인 값을 과연 측정할 수 있을까? 다시 헛되고 쓸데없어 보이는 질문을 해보자, 우리 삶의 몇 퍼센트가 과연 이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또 얼마나 되는가?




풀 오스터는 미국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에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작가다. 나 역시 그의 ‘달의 궁전’을 읽었고 영화 ‘스모크’를 보았다. 달의 궁전은 처음 시작이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인공의 비관습적이고 비자본주의적인 인생관이 처음 얼마동안 책에서 손을 놓기 어렵게 만들었다. 물론 줄거리를 섬세하게 다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꼭 400쪽이 넘는 책의 분량 탓으로 돌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 기억력의 한계일수도 있고 갈수록 흥미를 떨어뜨리는 내용 탓일 수도 있으니까.

‘우연의 음악’이 내 수중에 떨어진 것은 2004년 4월 말이었다. 바하에 대한 책이 어디 없나 하고 신문을 검색하고 있던 차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내 눈에 띄었다.“…음악을 전공하는 두 남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 책의 전개가 바하의 푸가형식을 그대로 따랐다”  2000년 4월 7일자 일간지에서였다. 순전히 바하 때문에 이 책을 선택한 셈이 된 것이다. 푸가라, 푸가의 기법이라......

서른 중반의 소방관 짐 나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차만 몰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게 된 것은 뜻하지 않게 2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길에서 우연히 ‘마치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바람에 부러진 잔가지가 별안간 발치에 떨어진 것처럼’ 자칭 도박의 명수라는 잭 포지를 만난다. 나쉬는 이 만남을 ‘마구잡이 식의 우발적인 만남’이라고 표현했지만 이후 이 우연한 만남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그는 이 도박의 명수라는 잭 포지에게 노름 돈을 대주기로 결심하고 그와 함께 사상 최고금액의 복권에 당첨된 두명의 억만장자 스톤과 플라워와 대적하러 간다. 1만달러의 판돈을 걸고 시작한 노름에서 처음 예상과는 달리 잭 포지는 졌을 뿐 아니라 나쉬가 아끼던 사브 차까지 잃게하고 급기야 마지막에 가서는 카드떼기로 1만 달러를 더 빚지게 만든다. 물론 이것은 나쉬가 자초한 일이었다. 나쉬는 이미 1년을 넘게 길위에서 차을 몰고 달리기만 하고 있었다. 아내는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 떠났고 딸아이는 누나 집에 맡겼으며 인생에서 기대할 만한 어떤 것도 더 생각할 것이 없었다. 그는 이미 포기상태였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낯선 잭 포지를 일종의 패자부활전, 더 늦기 전에 자신을 위해서 뭔가 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1만달러의 빚, 그리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두 명의 백만 장자의 집에서 벽돌쌓기라는 강제노역을 해야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강제노역에 매달리면서 나쉬는 자신의 삶을 발견하고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성취감과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물론 몇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도저히 갇혀있을 수 없는 젊은 잭 포지가 도망가려다 거의 반죽음 상태가 되어 병원으로 실려간다. 또 자신을 감시하는 머스크의 손자에게 증오와 살의를 느끼기도 한다. 어쨌든 나쉬는 노예같은 강제노역 계약이 끝나는 날까지 쉬지 않고 하루 10시간씩 일했다. 마침내 일은 끝났고 자유의 몸이 곧 될 터이다. 이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갇혀 있으면서 발견한 책임감과 타인에 대한 유대감이 저 멀리 두고 왔던 생활에서도 다시 제 값을 할 것인가.

‘우연의 음악‘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삶이란 우연과 선택의 결합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주인공이 우연히 굴러 들어온 돈 때문에 일상에서 일탈하고 우연히 만난 젊은이로 인해 삶이 완전히 뒤바뀌었지만 결국 이 우연의 매순간마다 자신의 의지와 선택이 운명을 결정지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풀 오스터 자신의 원래 주제의식과 스타일을 조금 벗어난 이 책을 덮는 순간이 이 물음에 적절한 답을 찾는 순간이라고 기대하지는 말라. 늘 그렇듯 책은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던지는 역할만을 할 따름이다. 나머지는 늘 우리 몫이다. 왜 여기 길 위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혹은 저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더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 모든 결정을 우연에 맡기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래야만 한다’의 세계에서 벗어나 ‘그럴 수 밖에’의 세계로 넘어오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밝혀 둘 것이 하나 있다. 나는 ‘바하의 푸가 기법을 따랐다.’고 운운한 그 신문기사를 착각한 모양이다. 이 책의 주인공이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지만 바하의 푸가는 아니었다. 전혀 다른 책을 소개한 기사를 읽었던 것인데 다시 확인해 보니 그 책은 ‘언 이콜 뮤직(문이당) ’이었다. 이 이상한 우연 덕에 나는 ‘우연의 음악’을 읽게 되었다. 후회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필히 제목과 어울리는 상황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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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이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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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시 이야기를 해야겠다.

101개의 섬과 365개의 다리에 의해 묶여진 물위의 도시-북구의 베니스로 불리는 그곳, 쭉뻗은 대로와 아름다운 운하로 이어진 인공의 도시, 세 번이나 이름이 바뀌어 불린 우여곡절의 도시, 6월이면 밤이 달아나 버리는 백야의 도시 그리고 우리에게는 현재보다 과거로 더 알려진 도시!

그 도시 뻬쩨르부르그는 지금부터 약 300년 전인 1700년 경 표트르대제가 스웨덴 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습지에 건설한 도시다. 이후 로마노프 왕조가 혁명으로 막을 내리기까지 근 200여년 간 러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러시아는 이 도시를 통해 서구와 의사소통하고 정신의 꽃을 피웠으며 혁명의 꿈을 완성했다.

도시가 게르만의 자유결사체 Genossenschaften에 기원하고 이는 ‘대등한 지위를 가진 개인들간의 자유로운 결사체'’를 의미한다면 뻬쩨르부르그는 의식적이고 인공적인 도시다. 그렇다고 이 도시가 분업과 교역의 발달로 인구가 밀집하고 새로운 규율이 형성되어 자연스럽게 생겨난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 얘깃거리가 덜하다거나 도시 생활이 덜 활기있다고 상상해선 안된다. 이 도시도 다른 모든 도시들이 그러했듯이 스스로 숨을 쉬며 욕망하고 그 속의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고 진화했다. 러시아 속의 유럽, 도스토옙스키가 ‘세상에서 가장 인위적이고 추상적인 도시’라고 했던 곳, 물리적으로는 우리로부터 5000여km 이상 떨어진 도시-그래서 너무 멀고 아득한 도시, 이제 그 도시 뻬쩨르부르그로 여행을 떠나기로 하자. 단, 지금보다 100여 년 전에 살았으므로 그만큼 더 행복에 가까웠을 지도 모를 사람들에게로 떠나는 시간여행을.

고골은 뻬쩨르부르그 태생은 아니다. 그는 19세 되던 때에 관리가 되기 위해 이 도시로 왔다. 이후 뻬쩨르부르그는 그가 43세에 정신의 일탈로 죽기까지 그의 작품의 배경이자 주인공이 된다. 그가 본 당시의 수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때도 지금처럼 '책의 집'이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을까? 18세기 후반에 건설된 시내 최대의 상가 건물 고스찌느이 드보르와 20세기 초에 세워진 시내 최고의 식료품 가게 엘리세예프 상점은 고골의 시대에는 아직 없었을 것이다. 이 식료품점 바로 옆 폰탄카강을 가로지르는 아니치코프 다리의 네 모서리에는 1841년에 시작해서 그가 모스크바에서 죽어가고 있던 1850년 대 거의 10년에 걸쳐 조각가 클로트가 완성한, 젊은 청년이 말을 길들이는 생명력 넘치는 조각품이 서 있다. 아무래도 고골은 이런 도시의 외형적 모습에는 관심이 없었던 듯 싶다. 오히려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 동감하고 숨을 쉬는 도시의 내면에 눈길을 주고 있다.




승진 청탁을 하기 위해 상경한 장교가 어느날 아침 문득 잠을 깨고 거울을 보았을 때 얼굴의 코가 사라져버렸다. 귀나 다리나 팔이 아니라 하필 얼굴의 정중앙에 위치한 코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래가지고는 출세를 하기는커녕 낮에 신문에서 본 아름다운 여성과도 만날 수 없고 점찍어 둔 고관부인의 딸과도 만날 수 없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그의 코가 자신보다 높은 5등 문관의 복장을 하고 성당이며 연회에 참석하는 것이 아닌가.

9등관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평생 관청에서 문서를 정서하는 일만 하는 하급관리였다. 그는 그저 사람들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기만 하면 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친구도 없었고 다른 일을 하고자 하는 욕심도 특별히 없었다. 다만, 뻬쩨르부르그 최대의 적이자 위협적인 유일한 존재인 추위에 맞서기 위해 외투를 장만하기만 하면 되었다. 최극빈 생활을 통해 틈틈이 모아 둔 돈과 월급을 가불하고 재봉사에게 사정하여 그럴듯한 외투를 장만한 날 난생처음으로 파티에 초대까지 받게 된다.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길에 등불이 휘황찬란한 상점 진열장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모르는 여자의 뒤를 이유없이 따라가기도 한다. 그런 그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강도들이 외투를 빼앗고 그 후 그는 병에 걸려 죽어 버린다.

또 한 명의 하급 관리 뽀쁘리친은 비록 말단직이긴 하지만 자신이 귀족 출신이며 일반 장사치나 마부들과는 다르다고 강하게 인식하다 급기야 자신을 스페인 왕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연필을 깎아주기 위해 들르는 국장 집 딸과 사회적 신분 상승을 꿈꾸지만별 볼일이 없음을 그 집의 애완견이 쓴 편지를 훔쳐보면서 알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조금씩 광인이 되어간다.

황당하고 비현실적이 일이 벌어지고 신분상승을 꿈꾸지만 광인이 되어가는 곳, 가난한 하급관리가 살기에는 너무나 추운 곳이 바로 고골의 눈에 비친 수도의 진면목이었던 것일까?

이 뻬쩨르부르그의 한 쪽 바실리에프섬에 살고 있는 가난한 화가 차르뜨코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골의 눈에 비친 수도가 어떤 것이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차르뜨꼬프는 그런대로 재능있고 선량한 화가였지만 우연히 발견한 초상화에서 떨어진 금화가 그의 인생을 바꾼다. 이 금화를 밑천으로 신문에 광고를 싣고 집을 옮기고 상류사회 흉내를 내면서 세속적인 명예와 부를 좇아 자신의 재능과 청춘을 팔아버린다. 한편 소심하고 몽상적인 화가 삐스까료프는 이상적인 여인인 줄 알고 뒤쫓아간 여인이 술집 여자인 것으로 알고 상심하다 자살한다. 세속적이고 허영심 많은 그의 친구 삐고로프가 금발여인의 집까지 따라가 겪은 해프닝과는 대조적이다.

이 모든 것이 수도 뻬쩨르부르그에서 일어난 일이다. 삶의 천태만상을 보여주는 전람회장이기도 한 수도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라고 고골은 말한다. 그러나 또 그는, 이 수도의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믿지 마라, 모든 것이 기만이고 꿈이며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충고를 잊지 않는다.




모든 도시는 서로 닮았다. 이것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건축물이나 도시를 감싸고 있는 풍경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욕망과 물질이 동질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시대까지도 초월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의 사람들을 찬찬히 뜯어보라. 고골의 시대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는가. 역사는 길어지고 우리를 담아내는 거리의 풍경은 바뀌었지만 삶은 반복되고 변한 것은 여전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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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 마리안느 - 그린북스 52 그린북스 52
멘델스존 지음 / 청목(청목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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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중년을 넘긴, 그러나 노인이라고 하기엔 아직 이른 나이의 신사였을 것이다. 은색의 머리칼이 반듯한 이마 위로 몇가닥 흘러내린 것을 제외하곤 귀뒤로 가지런히 넘겨져 있었을 것이며 얇은 입술 주위로 연륜을 드러내주는 가느다란 주름들이 보일락 말락 조금씩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눈은 아직 젊은이다운 이상을 담고 있었을 것이고 동시에 중년을 갓넘긴 사람들에게서는 드물게 발견할 수 있는 내면의 깊이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끔 미소를 지을 때는 얇은 입술이 조금 옆으로 삐뚤어져 보였을 것이며 여럿이 모여 대화를 나눌 때에도 큰소리로 성큼 성큼 말을 던지기보다는 말의 무게를 깊이 저울질 할 줄 아는 듯 필요한 말을 제때에 고를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젊은 시절을 통틀어 아니 지금까지 전 생애를 가로질러 가장 마음 속에 사무치고 아련하게 남아 있는 영화로 ‘내 청춘 마리안느’를 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마리안느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프랑스식이다. 그리고 내 기억 속의 한 여자가 흐릿한 안개 속을 뛰어가며 외치던 ‘뱅상, 뱅상’이라는 이름도 역시 프랑스식이다. 이 기억은 아주 오래 되었기 때문에 제나름의 색을 지녀버린 바위와 같이 굳건하다. 시간의 풍화작용에도 오랫동안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킨다. 근원을 캐어묻기엔 이미 너무 세월이 흘러 버린 것일까? 지금의 기억이 처음의 그것이었고 아마도 이후에도 그것은 변하지 않으리라. 시간의 어느 한 지점에서 굳건히 뿌리 박힌 기억은 전후의 사실관계를 따지는 변별의 시도를 무로 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청춘 마리안느’는 독일인이 쓴 독일 소설이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줄리앙 뒤비비에가 같은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고 내 최초의 마리안느에 대한 기억을 독일이 아닌 프랑스로 묶어버렸다고 해서 그를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어차피 인간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대로 기억하고 그 시기에 가장 또렷한 개인적 체험을 그 기억 속에 녹여두는 법이 아니던가. 중년을 넘긴 그 신사의 기억 속에 포진해 있는 마리안느는 또 어떤 모습일런가? 그와 내가 제각기 다른 마리안느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그 마리안느가 마리안느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내청춘 마리안느’는 아르헨티나에서 하이리겐슈타트 성에 갓 도착한 ‘빈센트’가 친구들을 만나고 이러저러한 호의와 애정을 통해 조금씩 성장해 간다는 내용의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소년들 사이의 모험심과 영웅심 그리고 그 작은 세계조차 피해갈 수 없는 존재의 불안과 불투명한 생의 일면이 빈센트와 빈센트 주변의 ‘게릴라 부대’라 일컬어지는 아이들, 그리고 빈센트의 선망의 대상인 만프레드 등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

멘델스존은 아마 이 글을 통해 청춘의 빛과 인생의 아련한 흥분 같은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봄에서 막 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에 드러나는 푸른 자연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야릇한 기대-그 기대의 절정이 곧 빈센트가 호수 건너 하얀집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마리안느이다. 단 한번의 만남을 통해 빈센트가 사랑하게 되는 여인 마리안느는 사실은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존재다. 안개낀 호수를 가로질러 우연히 마주치게 된 미녀이자, 갇혀있다고 말하는 알쏭달쏭한 존재이며 곧 여든이 가까운 기사라고 불리우는 사람과 결혼하게 될 것인유령의 성에 살고 있는 그야말로 유령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이 몽롱한 사랑의 기운은 비밀이기에 더욱 신비롭고 절실하게 빈센트를 버겁게 한다. 빈센트가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것이 곧 마리안느와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러나 그 사랑은 얼마나 아련하고 희미하며 몽롱하던지.

소년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흐릿한 안개낀 호수를 건너 마리안느를 만나고 곧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가 사라진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술이 몇 순배쯤 돌고 네모난 탁자를 둘러싼 대여섯의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은색의 머리칼은 이마 위에서 땀에 젖었고 그의 눈은 희미한 기억 속에 바위처럼 굳건한 마리안느를 추억하듯 들고 있던 술잔 속을 응시한다-내청춘 마리안느!-그것은 청춘의 다리를 건너온 수많은 빈센트들의 가슴속에 안개처럼 희미하게 남아있는 아련한 내면의 비밀같은 그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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