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인형 대산세계문학총서 1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안영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문학에 있어서 천재성이란 무엇인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뛰어난 작품을 창작하는 능력일까? 아니면 노쇠한 죽음의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고 수많은 작품을 쏟아내는 왕성한 창작욕을 말하는 것일까? 사실 천재성이란 나이와는 무관한 것이며 요컨대 작품의 완전성에 의존하는 개념일 것이다. 그렇다면 뛰어난 작품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오랜 시간의 외풍을 견디고 온갖 범람하는 비평의 파도를 넘어서 사람들에게 널리 애독되는 것들을 말하는가? 문학에 있어서 천재성이라는 말과 시대를 초월한 영원성이란 말만큼 매혹적인 말은 없는 듯하다.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 보편의 가치를 탐구하는 작품은 사람보다 훨씬 오래 살아 남는다. 불멸한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불멸의 반열에 오르기를 무의식적으로도 지향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영생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호머가 그렇고 단테가 그렇고 그리고 세잌스피어와 도스토옙스키가 그렇다. 그들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얼굴 윤곽은 그림속에서 혹은 사진속에서 흐릿해졌지만, 그들이 낳은 작품들은 여전히 우리들 삶속을 유유히 유영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돌포 비오이 까사레스는 우리에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보다 덜 알려진 작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번역된 작품도 거의 없다. 단행본으로는 이 「러시아인형」이 최초가 아닌가 싶다. 사실 우리 번역 문학의 지형에서 영어권과 프랑스어권 이외의 작품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것이 위험하다면 그동안 자주 접하지 못한 쪽으로 몸을 조금 움직여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터이다. 게다가 그것이 정신의 즐거움을 동반한 느긋한 환상여행이라면 더더욱.

혹시 보르헤스의 소설들을 읽고 그 생경한 경험에 다소 당황했지만 묘한 매력을 느낀 독자들일수록 이 비오이 까사레스의 러시아인형을 권하고 싶다. 내가 보기에 까사레스의 단편집은 그런대로 보르헤스와 독자간의 간극을 매워줄 만하다. 물론 그렇다고 보르헤스보다 까사레스가 못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열 네 살의 나이차이를 뛰어넘는 평생의 문학적 동반자였다. 다만 보르헤스가 좀더 일찍 우리에게 소개되었다면 까사레스는 중남미 문학을 전공한 이들 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거나 보르헤스의 소설들 속 등장인물로 우리를 먼저 찾아왔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 이 아홉편의 단편들은 제각각 다른 내용과 주제를 담고 있다. 표제작인 ‘러시아 인형’은 주인공 ‘나’가 건강상의 이유로 프랑스의 유명한 온천지 에-르-뱅으로 오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묵게된 호텔에서 단짝이었던 고등학교 친구를 만난다. 한밑천 잡기 위해 구대륙으로 온 친구는 제법 돈꽤나 있어 보였는데 어떻게 자신이 성공하게 되었는지 ‘나’에게 자초지종을 들려준다. 부잣집 딸과 결혼하기 위해 자청한 바닷속 여행에서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녹색 괴물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고 원하던 갑부집 딸이 아닌 호텔 여주인과 결혼했다는 어찌보면 흔한 이야기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어떻게 작가의 상상력이 덧칠해져 멋진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뒤이은 ‘로취에서의 만남’이나 ‘우리들의 여행’ 은 황당하면서도 재미있고 ‘물아래서’에 이르면 아름다운 서정의 여운 속에 은근하게 배어나는 작가의 유머와 재치를 느낄 수 있다. 마지막 ‘세편의 작은 환상작품’은 짧지만 간단치 않은 것들이다. 까사레스는 그로테스크하고 경악스럽기까지한 이들 이야기를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적인 배경과 인물을 통해 아주 현실감 있게 풀어낸다. 물리, 수학, 생태학 등에 바탕을 둔 그의 환상세계가 ‘보편적 인간 감정의 정서로서 환상요소를 이해할 수 있다’ 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오래두고 독자의 사랑을 받기에 모자람이 없고 그 뛰어난 상상력이 독자를 압도하는 비오이 까사레스의 작품이 천재적이며 동시에 불멸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 단편모음집「러시아 인형」 한 권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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