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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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당신이 낯설고 멀리 있는 무언가에 무작정 끌린다면, 혹은 무엇인가를 그리워하고 언젠가 그것을 탐험해 보리라 마음먹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당신에게 ‘낭만적 기질’이 다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당신이 ‘2년 전 우연한 기회에 고민 없이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당신 속의 낭만적 기질이 이끄는 대로 대책 없이 행동했다고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낭만적’의 사전식 풀이는 대충 ‘현실적이 아니고 환상적이며 공상적인’ 정도일 터입니다. 당신처럼 무작정 파리행 비행기에 올라탈 만큼 용감하진 않다고 하더라도 환상과 공상 속에서 파리를 혹은 그 언저리를 수없이 배회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요컨대 당신과 나를 이어주는 보기 드문 공통의 문화 코드 중 하나가 파리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지만 또 한편 그것은 굳이 파리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물론 문화적 편력에도 유행 같은 것이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파리는 당신과 나를 끌어당기기에 충분한 그 무엇입니다. 게으른 산책자만이 파리의 진정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에드먼드 화이트의 역설은 그래서 더욱 유혹적으로 들립니다. 목적 없는 산책-그것이 내포하는 자유와 꿈은 당신과 내 속의 기질을 너무나 잘 표현한 것이며, 어느날 문득 이곳을 외면하고 머나먼 어떤 곳으로 무작정 길 떠나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오늘을 있게 한 고래로부터의 삶의 한 양식이기도 하고 어쩐지 현실로부터의 도피라는 말보다 더 정감있게 들리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 <외면>은 이렇게 당신이 길을 떠날 때 동반하기에 적합한 책입니다.어쩌면 길을 떠나도록 부추기는 책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첫 장을 펼치면 비행기 혹은 기차나 버스 여행의 지루함을 완전히 잊게 해 줄 것임을 장담합니다. 마치 순전히 소낙비를 피하겠다는 마음으로 취리히의 어느 사진 전시장에 들르게 된 주인공이 그곳에서 마주친 한 장의 사진 때문에 20여 년 전 머나먼 산티아고의 집, 라칸텐 거리 20번지로 돌아가는 것처럼, 당신을 지금 여기를 떠나 당신 기억에서 사라졌으나 세포 속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아있을 어떤 곳으로 들어서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싫지 않은 경험이라고 일반화할 수야 없겠지만 고백하자면 이 첫 번째로 배치된 소설이 가져다 준 한 순간의 기억이 나를 이 책의 끝까지 이끈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친 김에 첫 편의 이야기를 더하기로 하지요. 10대 시절이란 얼마나 길고 지루하던가요. 20년 전 산티아고나 서울 혹은 그 밖의 어떤 곳에서 10대를 보낸다는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른 세계에 대한 동경, 더디게 가는 시간, 이성에 대한 호기심, 친구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과 믿음이 한데 어우러진 그 어지러운 시기를 아무 일 없이 지나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짐작하는 대로 주인공은 목숨까지 내놓을 만큼 어디나 한데 몰려다니는 친구 둘과 함께 주말 파티에 참석하다가 이사벨이라는 미지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함께 추었던 유혹적인 춤, 담배와 폰체 냄새, 낡은 음악 그리고 약속. 그러나 이후 다시는 이사벨을 만나지 못합니다. 다시 찾아갔으나 그날 밤의 리칸텐 거리 20번지의 청동문은 이후 취리히의 전시장에서 사진으로 마주치기 전에는 결코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주인공이 마음대로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진실을 이사벨이 가장 아름답게 부정한 것일까라고 반문하는 20년 후의 그날까지 말입니다.

이어지는 몇 편의 글들 역시 먼 망각 속의 기억을 더듬습니다. 어린 소년이 동승한 살인자에게 느끼는 두려움과 소년다운 연민, 회교승인 체 하던 재주꾼이 친구의 권유로 검을 삼키고 죽은 이야기, 문명의 이기인 자동응답기에서 빌린 목소리가 쏟아내는 독설은 작가가 왜 이 글들의 부제로 ‘사람들을 외면하다’라고 했는지 당신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짐작컨대 칠레라는 나라는 우리만큼이나 역사적 부침이 심했던 나라인 것 같습니다. 17번째 글인 ‘톨라의 기록’과 24번 째 글 ‘전장에서의 밀회’와 같이 다섯 개의 부제를 구성하는 총27편의 글들은 더러는 직접적으로 더러는 에둘러 칠레 역사의 어떤 면들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다만 그 담아내는 솜씨는 루이스 세풀베다라고 하는 작가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경험, 그리고 문학적 상상력에 기대는 바 클 것입니다.

흔히들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표현합니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불분명한 이야기들이 당혹스러울 때도 있고 또 한편으로 색다른 경험으로 신비감을 주기도합니다. ‘탈선’은 아마 후자의 느낌이 강한 작품으로 묘한 여운을 주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이제 ‘솔로르사노 부인에 대해 말해 주마’에 대해 언급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프라하의 헌책 방에서 발견한 책 첫 장에 선물하기 위해 쓴 글이 솔로르사노 부인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확인시켜 줄 줄을 30년 전에야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모두가 노인이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 정도로 생각했던 사랑이 ‘책처럼 망각의 밤을 딛고 살아남았으며’ 30년 뒤 프라하 거리에 그 사랑의 존재를, 못 이룬 약속을 증언케하려고 주인공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었을까요. 현실과 상상이란 어쩌면 삶을 이루는 양 축이며 당신이나 나나 그것에서 비켜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작가는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책을 덮은 지금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신과 내가 지금 이 삶에서 경험하는 것들이 어쩌면 모두 꿈이고 환영이며 깨어나면 전혀 다른 누군가로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말입니다. 어쩌면 그런 기대, 그런 바람들이 당신과 내 속에 늘 도사리고 있어 언젠가 낭만성이라는 기질에 기대어 멀리 밖으로 튀어나올 때만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땐 주저하지 않고 떠나게 될까요? 그곳이 파리든 산티아고든 혹은 투발로든 아니면 더 먼 곳이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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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자
실비아 플라스 지음, 공경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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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엔 언제나 비명이 살고 있어요./밤마다 비명은 울부짖으며/내 속에서 잠자고 있는 이 어두운 것이/ 구름이 지나가고 흩어집니다/..(실비아 플라스의 ‘느릅나무’ 중)


195,60년대 미국의 시인이었던 실비아 플라스는 31살의 나이로 자살했다. 자살이란 문자 그대로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다. 인생의 유쾌한 결말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영국의 유명한 계관 시인이었던 남편 테드 휴즈는 자살한 실비아의 일기를 세상에 공개했다. 나는 그것이 무척 뻔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부분에 대해 남편이라고 해서 세상에 공개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 예민한 실비아도 분명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난감한 일이 생겼다. 실비아의 일기가 보고 싶다는 유혹이 드니 말이다. 실비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자랐는지, 시란 그에게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왜 자신을 죽여야만 하였는지 자꾸 궁금해진다, 실비아 그녀가 자꾸 보고 싶어진다.

<벨자>는 지적이었고 예뻤으며 ‘지나치게’ 감성적이었던 실비아가 자살하던 해에 발표한 유일한 소설이다. 자신의 경험이 투영된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니, 내게는 일기를 대신할 수 있는 좋은 대체물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종(bell)을 뜻하는 <벨자>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책 속에서 확인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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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

"...."

"마음도 뇌의 작용일까? 아니면 또다른 어떤 것일까?"

지지난해 나의 애인은, 나를 집으로 바래다 주면서 느닷없이 그런 질문을 하였다. 준비되지 않은 질문에 당혹하기 일쑤인 나는, 역시 머뭇거린다. 머릿속으론, 이런 질문을 한 저의를 궁리해 본다.정말 몰라서 물은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대답을 이미 정해두고, 그를 설명하고자 했던 것일까?

나는 그가, 물은 것에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토론을 시도한 그의 기대를 짓밟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늘 머릿속의 어떤 저울질로 어긋나기 마련일까? 나는 늘 그에게 잘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허튼 대답을 하기보단, 침묵을 선호했다.

지나고 보면, 허튼 대답이 침묵보다는,사랑의 에너지를 전달하는데 더 나았을 것이라 반성한다.

나의 애인의 질문과, 그리고 이어지는 내 반응들에 대한 기억이, 어딘가에 묻히지 않고, 늘 나를 맴돌고 있었나보다. 결국 나는,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혹은 마음의 정체에 대해, 무시하고 넘어가지 못한다. 나는 늘 나의 애인과 관계된 것에, 민감하다. 나는 내 애인에게 인생을, 걸었던가? 책을 찾아보았다. 스티브 핑커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그렇게 하여 내 수중에 들어왔다. 행운이었다.

우리 종족에 대해서, 이 책을 만나기 전보다는, 조금, 아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었다고 감히 표현하고 싶다.

하지만, 참 방대하기도 하고, 전문적이기도 하여라. 860쪽에 이르기 위해, 몇 날을 보냈는지. 역시 나는, 난독증이 틀림없어하면서.  처음 100여쪽은, 잘 따라잡지 못했다. 읽고 나서도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그런 식의 지식이 처음이었던 까닭인가?  하지만 어느정도 익숙해지자, 재미를 붙일 수 있었다.

우리의 마음은, 진화의 산물이다. 마음은 일종의 모듈이며 뇌의 적응체계라는 것이다.

다음에 다시 정식의 독후감을 쓰기로 하자. 지금은 일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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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에 읽은 [사랑의 역사]가 생각난다.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였다. 나는 그것을 하룻밤만에 읽어 치웠다. 니콜 크라우스라는 여자는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이런 소설을 쓰는 작가라면, 도대체 어떤 내면을 가진 사람일까? 그의 남편도 소설가라고 한다. 불행하게도 니콜 크라우스의 다른 책들은 번역이 아되어있었다. 나는 그의 남편의 책을, 읽기로 한다. 물론 남편과 아내를 동일시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운]-그의 남편의 책이다. 솔직히 기대를 하지 않았다. 설마 부부가 나란히 걸작을 쓰는 우연이 있을라고. 그러나 살다보면 우연이, 힘없는 나를 무자비하게 비웃을 때가 있다. 이 두 사람은,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둘다 결은 달라도, 본질적인 어떤 지점에서 서로 통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 둘에 대한 감상문은 추후에 정식으로 올려야 겠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소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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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 석가모니 - 그 생애와 가르침
와타나베 쇼코 지음, 법정(法頂) 옮김 / 동쪽나라(=한민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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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파고든 정신의 질식 상태를 문득 절감하게 되었던 그 해 가을, 우리는 민족을 초월한 하나의 믿음 가운데 낯선 언덕에 서서 손을 마주 잡았었지요. 그 이후로 나는 당신께 내 사랑의 표지를, 아울러 내 행위의 실증을, 즉 내 사유의 세계를 응시하는 한 줄기 시선을 전하리라는 소망을 간직해 왔었습니다... "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에서 로망 롤랑에게 헌사한 글의 일부이다. 이 위대한 작가이자 사색가가 한탄한 것이 정신의 질식 상태였다니 의외일 법하다. 헷세가 그린 싯다르타는 불타 싯다르타 그 자신을 그린 것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불타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도 정신의 갈증을 채울 수 없었던 주인공 싯다르타는 다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길을 간다. 여기서 싯다르타는 어떤 의미에서는 헷세 자신을 빗댄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말하자면 로망롤랑에게 고백했듯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정신의 질식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헷세는 불타 싯다르타와는 또다른 싯다르타를 앞세워 구원의 메시지를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헷세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1차 세계 대전 후에 발간된 이 ‘싯다르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고백하자면 작품이 전하는 철학적 메시지보다는 어쩐 일인지 이 작가가 '정신의 질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는 사실이 내마음에 더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불타 석가모니란 석가 족 출신의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지금부터 약 2천 5백 년 전에 세상에 와서 깨달음을 얻고 45년 간 가르침을 펴다가 여든 살에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정확한 연대기가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인도에서 연도를 기록하지 않는 습관이 있어 정확한 연대 추정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종교가 그렇지만 창시자에 대해서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실 기록보다는 초자연적이고 신화적인 기록이 당연할 것이라고 한다면 이 불교의 창시자에 대한 기록 역시 이 점을 비껴가진 않는다. 그러나 신화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술이 현대인에게 신빙성을 감하는 요소라 하더라도 그것을 겉모습 그대로 이해하기보다는 종교적 진실을 표현하는 독자적인 방법이므로 그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저자는 미리 귀띔한다. 또한 저자는 '불타 석가모니'에 대해 최대한 공평하게 전기를 쓰려고 애썼다고 밝히고 있다. 공평하다는 것이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라면 저자는 아마도 종교가로서가 아니라 학자로서의 태도를 견지하려고 했다는 뜻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이 책 '불타 석가모니'는 석가모니의 전생에서 시작하여 룸비니 동산에서의 탄생, 출가, 고행 및 성도 그리고 가르침을 펴고 입적할 때까지를 여러 문화권에 남아 있는 경전과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고 있다. 단순한 한 위인의 생애 기록이라기보다는 석가모니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상과 여러 종교의 관계들까지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한 종교의 창시자의 전기라기보다는 그 당시 인도의 사회상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인류사적 자료로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와타나베 쇼코는 먼저 석가모니의 전생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고 한다. 전생에 대한 믿음은 인도인들 사이의 보편적인 믿음이며 전생이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위인의 인품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불교 경전 <자타카>에서 석가모니의 전생에 대한 기록을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 몇 가지를 인용하는데 저자는 여기서 위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기록으로 전생을 소개하고 있다.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로 남겨진 경전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익숙한 삼장과 현장의 기록까지 두루 섭렵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아마도 그가 우리와 같이 불교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라는 점도 고찰의 깊이를 더하는 데 한 몫 했을 것이다.

대략 석가모니 부처는 기원전 560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480년경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가해서 깨달음을 얻어 가르침을 편 지 45년, 인간의 생으로 약 80년을 산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윤회에서 벗어나야 함을 설파했으나 범상한 인간에게 그것은 너무 아득한 얘기이지 않을까.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이고 그는 여전히 그일 뿐인가. 사실을 말하자면 그가 말한 깨달음에 가까이 다가서기는커녕 나의 무명(無明)에 대해 인식하기조차 어렵다. 그가 입적할 즈음 곁을 지키던 아난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또 어떤가. “... 모든 현상은 변천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위대한 성인이 남긴 말치고는 평범하기 그지없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제자들이 기대한 마지막 유언으로는 어떤 의미에서는 실망스럽기까지 할 수도 있다.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란 스스로 알아서 깨닫고 정진할 도리밖에 없다는 말인가. 책을 덮는 그 순간의 허망함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 5백 년 전에 살았던 석가모니 부처의 깨달음과 가르침이 지금의 우리에게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정신의 질식 상태를 탈출하고자 했던 헷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감히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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