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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이 책을 1998년판으로 읽었다. 아래 리뷰 작성은 책을 읽은 그해 2003년에 4월에 한 것이다. 요즘 새삼 영화개봉에 맞추어 인구에 회자되는 듯하다. 나는 오래 전 이미 주제 사라마구의 '모든 이름들'을 발견했다. 한겨레 신문 덕이었다. 그 때 그의 이력에 '공산주의자'란 딱지가 뻔뻔스럽게도(!) 붙어있었다. 어쩌면 그것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책에 매혹되었더랬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책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주제 사라마구란 이름을 사랑하였다. 수도원의 비망록도 샀다. 물론 그의 모든 책을 다 읽지도 않았지만,이 늙은 공산주의자 작가의 상상력은, 나를 압도하였다. 만민평등의 사상을 가지고 자본을 철저히 경계하지만 그렇다고 배척하지는 않는자라고 생각한다. 수도원의 비망록은, 솔직히 읽기가 만만치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나는 사극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실화바탕의 소설은 거의 원수지간으로 알 정도다. 물론 이 책은 과거를 빌어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긴 하지만, 나는 오래된 습벽에서 곧바로 헤어나오는 것이 어려웠다. 머리맡에 두고두고 심심할 때면 꺼내들었을 뿐이다.
그와는 상대적으로 눈먼자들의 도시는 잘 읽혔다. 사실 이 소설이 암시하는 바가 너무나 명료하기 때문에, 책소개로서는 재미가 없었다. 나는 모호하고, 다층적이며 다의적인 것들이 더 편하다, 아무말이나 지껄여도 용납이 되니까. 하하*
포르투갈어는 전세계적으로 2억 이상의 인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다. 흔히 지리상의 발견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15세기, 포르투갈인 바르톨로메오 디아스 등이 희망봉을 발견한 이래 인도양 부근의 여러나라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 영향을 받아 앙골라, 모잠비크, 까부 베르드, 기네비싸우 그리고 성 또메 이 쁘린씨쁘의 아프리카 5개국이 남미의 브라질과 함께 포르투갈어를 공식어로 사용하는 공동체 CPLP( Comunidade dos Paises de Lingua Oficial Portuguesa)의 구성원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래서 포르투갈어는 지금도 유럽과 아프리카,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를 이어주는 중요한 문화적, 정치적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에게 너무 멀리 있어 아득하고 흔히 스페인과 혼동되곤 하는 나라(아니나 다를까 포르투갈어는 스페인어와 많이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름이란 나와 타인의 구체적 경계이며 구별짓기의 처음이라고 한다면 이 두 나라 역시 엄연히 독립된 역사와 문화를 가진 개별 독립국인 것을 잊으면 안될 것이다. 물론 이 말은 흔히 중요한 것을 자주 혼동하곤 하는 내게 하는 말이다.
이 이야기는 하루아침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 이야기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버린 도시 전체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겠다. 아무튼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한 남자가 운전석에 앉아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앞이 온통 백색광선으로 뒤덮이면서 안보이게 된다. 즉 눈이 먼 것이다. 이 눈 먼 남자는, 오늘날 문명인이라면 당연히 밟는 수순으로 아내와 함께 병원을 찾게 되는데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 즉, 의사, 간호사, 환자들이 차례로 눈이 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접촉했던 사람들 또한 눈이 멀고 또 그 사람들이 접촉했던 사람들도 눈이 멀고 또또 그 사람들이 접촉했던 사람들이 눈이 멀고...마침내 도시 전체가 모두 눈 먼 사람들로 가득 차버리게 된다. 모두가 눈이 멀어 보이지도 않고 보이지 않으니 잘 들리지도 않을 법한 이 도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소설가 정찬은 소설만큼 길을 잃기 쉬운 세계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 의미하는 바야 다르겠지만 이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눈이 멀지 않은’ 우리 독자들이 길을 놓쳐 버리지 않고 제대로 소설이 내는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 안내자가 필요할 법도 하다. 고맙게도 작가는 이러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맨 처음 눈이 멀어버린 남자를 진찰했던 의사의 아내가 우리를 이 간단하지 않는 소설의 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하도록 남겨둔 것이다. 의사의 아내만이 이 눈 먼 도시에서 유일하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도시의 구석구석을, 모든 사람들을, 그들을 대신해서 보고, 또 본 것을 말할 수 있다.
하루 아침에 멀쩡하던 눈이 먼다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눈먼 사람도 가족이나 친구 등의 도움을 받아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다. 그러나 일시에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버린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재산, 심지어 관계까지 이전에 누렸던 가치를 상실한다. 본다는 것이 단순히 사물을 구별하는 감각의 차원을 넘어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판단하는 일체의 것이라고 말한다면 보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 완전한 무지의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룩한 문명이란 것은 결국 ‘볼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유의미한 것이므로. 눈먼 자들의 도시는 결국 도시 이전의 도시, 역사 이전의 역사, 문명 이전의 야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98년 동안 영어권과 프랑스어권 작품이 거의 독식하다시피한 노벨상의 연혁에 아주 가늘고 섬세한 그러나 확고한 선하나를 그은 주제 사라마구는, 리스본일 수도 있고 여기 서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다른 모든 도시일 수도 있는 익명의 도시에서 이 환상적인 이야기를 풀어낸다. 쉼표와 마침표 이외 일체의 문장 부호를 사용하지 않는 독특한 화법은 독자와 소설 속 인물들의 경계를 허문다. 등장인물은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이름이란 한낱 이전 문명의 세련된 기억일 뿐이고 새로운 도시에서는 이전과 같은 광휘는 더이상 뿜어낼 수 없다는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의도된 생략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다.
하나의 힘이 유일하게 전세계를 지배하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 무소불위의 야만적 권력이 그들의 언어가 아닌 전혀 다른 언어로 사고하고 쓰고 존재하는 세계가 있음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때문이라면, 이 소설은 그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래서 그들 역시 눈 먼 자들이며 이 소설읽기는 결국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어서 나를 고스란히 이 고통의 세상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으려나. 단, 조금 우회적인 방법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