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진화론 - 종의 기원 강의
스티브 존스 지음, 김혜원 옮김, 장대익 감수 / 김영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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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울하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것을 감안하자. 그저께 겨우 끝낸 책을 되새김질하기도 쉽지 않다.  

갑자기 모든 것이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솔직히 매사가 시들시들해 진 것은 꽤 되었다. 열정도 호기심도 무엇보다 모험심도, 고갈되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나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지 않은 것들. 나는 갑자기 내 유전자에 모든 것을 넘겨버리기 시작한다. 해서 나의 아버지를 관찰하였다. 물론 신중하고 의미있는 관찰은 아닐 터였다. 그것은 일종의 삐딱하고 비난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일종의 공격을 위한 합리화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나의 혈통이 나쁘다는 사실에 수긍한다는 것은, 기분나쁜 일이다. 젊잖지 못하고 상스럽다는 것을 알지만, 나의 아버지에 대한 비난을 위한 관찰은, 기실 내 존재에 대한 비난에 다름아니란 사실을 알기는 하지만,중단할 수는 없었다. 내 정신의 판단은 일단 그렇게 하기로 하고 나아간다. 어설프게 유전자 중심의 진화론을 흡수한 자의 현실!

그저께까지 김연수의 세상의 끝 여자친구와 줌파 라이히의 그저그런사람 그리고 진화하는 진화론을 읽었다. 더 거슬러가니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도 있다. 물론 한꺼번에 왕창 읽은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두고두고 조금씩 읽었고, 어떤 것은 휴일날 왕창 읽었다. 원체 게을러서 침대와 방바닥을 오가며 고작 목과 손의 위치를 바꾸었을 뿐이었다.  

각각의 책들은 너무 다른 형식과 서술방식으로 한꺼번에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러나 몇마디 단순하게 평한다면, 줌파라이히의 그저그런사람은 그저그랬다. 첫 작품 축복받은 집을 잘 읽은 때문이리라. 여전히 그녀는 비슷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동화되기 어려운 이방인으로써의 정체성, 가족,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 이런 문제의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그러나 음, 뭐랄까 너무 호들갑을 떨면서 기대한 만큼의 만족감을 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여전히 읽을 만하다는 말은 해두고 싶다. 다음으로 김연수의 세상의 끝 여자친구. 사실 앞의 몇 편은 지금 명료하게 기억하기 어렵다. 한번 읽으면 좀체 두번 읽을 엄두를 안내는 나의 독서버릇 탓에 기억에만 의존해서 뭔가를 평한다는 것은, 작가에게 공평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려나 여기는 내 공간이고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있다. 하다면, 뭐 실수나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면야....아무튼 앞의 작품들을 또렷이 기억하긴 어려운데, 마지막 작품은 선명하다. 달로간 코메디언. 나는 여기 두 구절을 어느 공적인 글에서 인용하기까지 했다.  

뭐랄까 아련한 우수같은 것, 비애 같은 게 느껴졌다. 좀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는 5만달러를 훔쳐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하였던 것일까. 주인 잃은 안경테를 발견하는 순간이. 

하지만 나는 모르겠다. 이 우수와 비애의 정체에 대해서. 눈물에 대해서. 

진화하는 진화론은, 애초 독자평이 아주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기대않고 읽었다. 

기대를 안해서인지, 실망이 적었다. 아니 사실은 재미있었다. 옹기종기 이야깃거리가 즐비하니 즐겁게 읽었다. 물론 독자평에서 번역의 문제를 강하게 제기한 까닭은 나도  알겠다. 말이 안맞고 무슨 뜻인지 모를 구절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재미있게 읽었으니 용서할 마음은 있다.. 뭐 저자가 워낙 말을 꼬아서 하는 스타일일 수도 있으려니...하고 그만 넘어가 주고 싶은데,,이전 독자가 쓴 글을 다시 한번 읽어봤다. 그런데 이거 영, 그냥 넘어가 주면 안될 것 같다. 나 같이 마음씨 넉넉하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하는 사람만 있다간, 문제있는 번역이 그대로 판을 칠 터. 그러면서 우리말을 야금야금 잘도 갉아먹을 터. 이건 나에게도 안좋은 일이다. 김영사에서 책임있는 조치를 취하고 기 구매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해 주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요구한다(으쌰으쌰)!

이제, 다음 차례는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말이 필요없다. 번역가가 폴라니 전문가니 오죽하랴. 내가 경제서나 이론서, 철학서는 거의 안 읽는 편인데, 더러 나를 읽게 만드는 책들이 있다.  빈곤의 세계화니 신자유주의의 간략한 역사가 그런 책이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다.   

우리나라 헌법을 두고 '아름답다'라고 표현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또는 수학의 방정식이나 물리학의 어떤 이론에 대해서도 꼭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을 보았다. 

솔직히 나는 과연 그런 표현을 쓸 때가 있을까, 싶었는데. 오감을 통한 반응으로서 '아름답다'에 익숙한 나로서 말이다. 

그런데, 가끔 나도 그런 말을 할 때가 있다.  어떤 이론에 대해 아름답다고, 나도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다. 진화하는 진화론은 그런 느낌을 준다. 번역이 좀 그렇다하더라도 아름다운 책인 것 같다는.  

 "와우, 이거 너무 재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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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0-10-14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나에게, 11년 전의 나는 아름다웠구나.세상의 이치에 대해 여전히 호기심도 있었고, 그건 생의 열망이 있었다는 증거이겠지...지금의 나는 아니다. 이제 나는 스러져가되 아름답게 스러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그래서..이런 예전의 나의 글을 읽으면...좀..서글프다.
 
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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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당신을 떠올리며 이 책을 집어 들었어. 서경식, 이 이름은 당신 없이는 아무 의미도 없을 터이니. 당신이 만진 물건과 당신이 건넨 쪽지들, 당신에 의해 발화한 그 어떤 단어들, 당신이 서 있던 그 자리들, 그리고 당신을 비추던 불빛들, 당신이 머물던 자동차의 그 자리, 한쪽이 더 굵은 팔의 어떤 부분, 오른쪽 손가락 마디굵은 부위.....그리고 우리들이 함께 고르던 책들, 우리가 함께 공감했던 작가들.....

나는 당신에게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음을 늘 깨닫곤 해. 눈이 뜨이며 늘 당신이 자동적으로 마음으로 달려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추억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건 그 단어가 현재가 아닌 과거를 내포하기 때문일거야. 사랑을 추억해야 하는 상태란, 좋지 않은 결과를 의미하고 그것은 결국 이별의 다른 말임을 이미 알아버린 사람만이 추억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라는 비트겐쉬타인은 옳군!). 

내 사랑,  

그림이 고뇌하지 않게 된 건, 역사의식의 부재일까?  자각이 사라진 현재의 삶 때문일까? 

서경식은 언제나처럼 무거워. 그의 글들은 추상적이지 않지만, 문맥은 늘 의지적이니 말이야. 서경식은 이전과 달라진 점이 별로 없어 보여서 처음 몇 페이지를 읽다가 그만 덮어버렸어. 

숨이 막히기까진 아니지만, 답답한 마음이었어. 

그가 좀 달라졌기를 기대한 것일까. 이젠 그만 즐기기를 바란 것인지도 몰라. 그가 너무 무거운 짐을 스스로 걸머진 것 같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거야. 그의 가족사가 그를 가볍게 만들지 못하리란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왜 그런지, 그에게 이런 기대를 하였어. 

아니 어쩌면 지겨웠는지도 몰라. 삶이 다면체라면, 왜 그의 삶은 늘 면이 아니라 그 면들의 경계선이어야 할까? 그러지 말았으면, 편안하고 달콤하고 안락한 미술도 얼마나 많은데 왜 그는 일부러 고뇌의 정면을 찾아. 고뇌의 그림자와 고뇌의 언저리조차 일부러 쫓아다니는 걸까 하는.  

하지만, 그래서 서경식은 서경식인거야. 그는 왠지 내가 그리던 얼굴 모습을 하진 않았지만, 거리를 적당히 두어야만 하는 까다롭고 예민한 사람 같아 보이지만, 그가  만약 이렇듯 반드시 존재하지만 숨어있는 듯 보이는 것들에 대해 고뇌하기를 그만두어 버렸다면, 나는 아마 더욱 실망하고 말았을지 몰라(그러고 보니 내가 마치 거미여인 몰리나 같이 말하고 있군. 그녀-나는 그를 그녀라 부르겠어-는, 밤마다 자기가 본 영화를 이야기하지, 그 낮은 대화체의 말들을 내가 지금 흉내내고 있는 듯해).   

사물의 이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야. 나는 늘 그 점이 불편하곤 했어. 나에게 없는 어떤 것들이 부럽기도 하고, 조바심나기도 했어. 그래서일까? 나는 늘 과학에 경도되곤 해. 부족한 것들을 채우기 위해, 옆으로 기우는 것, 나의 눈이 향하는 곳. 사물의 진실,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 그래서 진실된 것들. 현실과 동떨어져 더욱 가치있어 보이는 것들.

서경식은 이렇게 나를 돌아보게 해. 역사를 본다는 것, 생활인으로 산다는 것의 진심을 이야기하는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생의 어떤 부분을 외면하고 지나쳤을거야.  

이 책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미술이 무엇인가, 예술이 어떤 것인가를 곰곰 생각해 보도록 하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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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다윈? - 신다윈주의, 비판적으로 읽기
이케다 기요히코 지음, 박성관 옮김 / 그린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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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높고 햇빛이 보다 투명해졌다. 태양이 지구보다 109배나 크다는 사실이 조금 실감난다. 동시에 1억5천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토록 직선으로 내리쬐는 빛을 그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받는다면, 우리가 모두 열로 화하거나 먼지로 다시 돌아갈 터이니까.  

차라리 그것이 더 나을 것인가 

가을이 시작될 때쯤 세권의 책을 읽었다. 오리진, 달콤쌉싸름한 쵸콜릿, 굿바이 다윈. 

오리진은 아름다운 책이다( 아, 다시 그 느낌들이 살아나네... ).종이가 반짝여서 형광등 아래에서 읽다가 눈이 자주 피로했다는 점만 빼면, 만족스러웠다. 우주의 기원과 앞으로의 운명에 대한 책들을 좀 읽은 터이라, 그리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이었지만, 다시 우주의 근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최초의 10의 -43승초와 5센티미터, 대폭발, 먼지, 별빛,무거운 원소들의 존재,입자와 반입자, 우주상수,생명체,액체. 우리들은 그런 것들에서 왔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다면 그 아름다운 성운들은, 우리들 과거이자 미래일 터이다. 

달콤쌉싸름한 쵸콜릿은, 사실 생각보다 별로였다. 소득이라면 멕시코 음식을 먹어봐야지 하는 생각이 든 정도. 영화를 이미 오래전에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굿바이 다윈은? 책을 받기 전 들떴던 마음은 표지를 열고 서문을 읽으면서 급격히 가라앉았다. 책을 택한 건, 1. 최첨단 다윈주의 이론이라는 광고 문구에 혹해서, 2. 알고 보니 번역자가 내가 아는 사람, 3. 출판사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첫번째 동기에 대한 배반_   알고보니 12년 전에 출판된 책을 번역한 것이었다. 12년이면 그 사이 새로운 이론이 출현했을 법하고,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는 일선적인 DNA위주의 신다윈주의자  중 한명인 스티브핑거의 저작이 내가 알기로도 두권이나 더 나왔다. 그렇다면 구조주의적 다윈주의의 비판에 대해 나름대로 방어할 논거를 취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최첨단이라고 단언한 광고 문구는 아무래도 출판사의 상업적 농간같다는 혐의가 짙다. 

물론 유전자 위주의 진화론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은 공감할 만하다. 나로서는 처음 접하는 이론이므로 유익한 내용이었다.

두번째 동기_역자의 말이 좀 구태의연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외는 별 문제없었다. 

세번째 동기_그린비, 책 두께와 내용의 수준에 비해 책값이 좀 비싼 것 아닐까?  

아무튼 나는 최근의 아주 첨단의 진화론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런데 12년 전의, 그것도 출판사 직원을 대상으로 개론적으로 구조주의다윈주의가 무엇인지 강의한 내용을 첵으로 펴낸 것이라니....왠지 속은 것 같은 이 느낌, 지울 수가 없다. 나는 말이지 좀더 전문적이면서 재밌는,그리고 최첨단의 진화론에 대해 알고 싶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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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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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한여름 지나가는 소낙비다. 그 소리가 맑고 눈부시다. 쏴아,쏴아. 비들은 사선이다. 그러고 보니 사선이 아닌 비를 만난 적이 거의 없는 듯하다. 비는 바람과 하나가 되어 일종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비가 요염할 때는 언제일까?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은하수가 요염하다고 짧게 묘사했다. 나는 요염과 은하수를 머릿속에 그리느라 몇 초를 흘려보낸다.그 몇 초 동안이라도 단어들이 의미대로 눈부시게 빛나기를 바라지만, 금방 그친 지금 저 비처럼 순간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소득없이 상상은 끝을 맺는다. 

설국은, 한겨울의 소설이다. 눈이 한겨울에만 내려서일까? 겨울의 눈덮인 고장을 생각해 보기가 쉽지 않다. 지금은 7월 말, 복중이니까. 

인간은 여전히 외부 환경에 덧얹혀져 사는 존재이기 때문임을 실감한다. 한여름에 한겨울, 눈이 소복히 내리다 못해 귀까지 덮어버릴 지경의 먼나라를 그려보기엔 좀 거리가 있으니말이다. 아니면 나라는 존재가 그리 생겨먹어서일 수 있다. 

다시 해가 나올 기미가 보인다. 요코라는 여인은 끝내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정녕 시마무라가 상상한 대로 혹은 전하는 이야기대로 그 선생 아들의 새 애인이었을까?  

12년에 걸쳐 다듬고 다듬은 연작들을 묶은 것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하나 하나의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었던가? 나는 그 장면 장면들을 떠올려본다. 그 장면에서 그렇게 끝이 나고, 다시 세월이 가서 1년 만에 눈고장을 찾아 여인들을 만나고...또 그렇게 끝이 나고, 다시 봄이거나 눈의 계절이거나에 다시 그 온천장 여관에 들러 그 여인들을 만나거나 상상하는 것이고...

수묵화는 기름냄새따윈 풍기지 않는다. 미묘한 종이 번짐은 경계 또한 갖지 않는다.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형체를 갖춘 수묵화에는 그리고 먹 냄새가 난다. 그 냄새는 독특하다. 사람의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 있다. 아니다 내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렵다고 해 두자(언어는 사람의 영혼인가? 문득, 나의 영혼은 작은 그 무엇이겠구나 싶다). 설국은 그런 느낌이다. 수묵화 같은. 여운이 구름처럼 하늘로 올라가지만 경계가 없다. 기름냄새 대신 형용할 수 없는 먹냄새를 풍긴다. 그것은 끝이 없다. 우리 머릿속에 어떤 여지로 남는다. 요코가 누구이며 사마코는 무엇인가?  '헛수고'를 일삼는 이 여인들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는 것은 역시 '헛수고'인가?  

여인들의 생명력과 시마무라의 '헛수고'에 대한 상념은, 그래서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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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볼루셔너리 로드
리처드 예이츠 지음, 유정화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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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오래 된 이야기다.

오래 전,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할일 없이 빈둥거리던 그 시절, 막연한 자신감과 세상과 운명에 대한 무지로 시간을 그렇게 흘려보내버리던 그 시절, 내가 자주 찾아가던 나의 후배, 그녀 김미경!


어느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집에서 한 정거장 반 정도의 연립주택 2층에 여동생과 같이 살고 있던 김미경, 그녀를 찾아갔다.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어슬렁거리는 내 그림자가 발끝에 채였으리라. 무심한 시선은 나의 키만큼만 나를 앞지르고 있었을 터이고, 내 손에 귤봉지 비슷한 어떤 것이라도 들려있었으면 좋았을 걸. 나는 그야말로 늘상 웃으며 맞이해 주는 그녀들의 호의에 답할 만한 그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못한 채 그 집을 방문하였던 것 같다.


그 날도 김미경 그는 낡아서 먼지가 폴폴나는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으레 방문에 따르는 이런 저런 인사말이 오갔을 법하고, 그 즈음 아프리카 민속음악에 빠져 있었던 그녀는 귀에 익지 않은 타악기소리로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무렵 그녀는 순전히 외모에만 연유하지 않는 그 어떤 이유로 비트겐쉬타인 원서를 강독하고 있었다. 그 침대 밑에서 나는 문고판 타르튀프를 발견하기도 하였다(그 책은 지금도 내게 있다). 그 침대 밑에서라면 무언들 발견하지 못하였을까? 마치 고서점에라도 온듯 특유의 냄새가 났던 책들이 아무렇게나 삐죽삐죽 나와 있었지. 그 넓고 낡은 침대며, 그 당시 우리들 나이만큼이나 거칠게 이어붙인 나무책장이며. 그 방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아무려면 어떠랴. 두 여자들만의 방이었다고만 해 두자.


그날 그녀는 나에게 <위대한 유산>의 첫 문장들을 읽어 주었다. 오랫동안 나는 그 문장들이 미스 해비셤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9시 20분 전에 전생애가 정지해 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 말이다. 그즈음 그녀는 위대한 유산의 첫 문장을 자주 읽곤 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어떤 문장들을 반복하여 읽고 싶다는 것은, 그 문장들을 내 생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싶어한다는 뜻일까? 그 행위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그 뒤 알폰소 쿠아론이 만든 영화 <위대한 유산>을 보러 갔을 때도, 내가 그 책을 읽기로 마음 먹은 바로 그날에도, 그 누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김미경 그녀를 생각했다.


그래서 마침내 위대한 유산, 첫페이지를 넘겼을 때, 그것이 이렇게 시작된다고 하여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될 것이다.


“우리 아버지의 성은 피립이고 내 세레명은 필립이었는데 어린아이 적 내 짧은 혀는 이 이름과 성을 핍 이상으로 길게도 분명하게도 발음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늘 내 이름이 핍이라고 말했고 그 결과 나는 핍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의 성씨가 피립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아버지의 묘비와 우리 누나인 조 가저리 부인―누나는 대장장이의 아내였다―의 말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렇듯 미스 해비셤의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9시 20분 전에 전 생애가 멈춰버린 한 여자 이야기가 아니어도, 나의 기억이 따라서 올바르지 못하다는 사실에도 내가 전혀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면 말이다.


어쩌면 진정 놀라워해야 할 일은, 이토록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한 지점에 우뚝 멈춰 서 있는 그 두 자매에 대해, 내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이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행 중 기차에서 만난 독일 남자의 아내가 되어 멀리 떠나버린 김미경. 늘 싫은 내색 없이 우리에게 자신의 집이 기꺼이 아지트가 되도록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거나, 침묵하였던 그 여동생은, 이제 어떻게 되었을까?


잊혀진 것들은 아름답기보다는 쓸쓸하다. 그 두고 온 것들, 만지작거리며 들춰보던 책들의 표지며, 같이 웃었던 기억들조차, 마음에 미세한 떨림을 준다. 왜 어린시절을 회상하거나, 지금보다 몇 년 더 나이를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면, 늘 감정의 균형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잊혀진 사물들에서 받는 어떤 인상이 쓸쓸함이라면, 꿈이나 사상, 어떤 가치있는 정신의 한 상태를 잊어버린 데 대한 대가는, 무엇일까?


여기 두 젊은 부부가 있다. 남자와 여자의 나이는 둘 다 스물 아홉. 남자는 귀엽고 사랑스런 두 아이의 아버지, 안정적인 직업까지 갖춘 부족할 것 없어 뵈는 중산층의 가장이다. 그는 “검은색 머리카락은 짧게 깎았고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눈길을 끌 만큼 개성적인 면이 없는 몸매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는 평범하지 않은 변덕이나 들뜬 마음 같은게 어렸다.”(26쪽) 그는 한 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확실히 알 때까지 직장없이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지냈지만 결혼을 하고, 이제 어느덧 중산층 부부들이 대개 그렇게 하듯 교외의 아늑한 집을 구해 이사하며 안정된 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여자는, 뉴욕의 일류 드라마 학교를 나왔으나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로 여기 코넷티컷 교외의 레볼루셔너리 힐 에스테이트에 정착하였다. “스물아홉살의 그녀는 귀족적인 아름다움을 풍기며, 큰 키에 은빛이 도는 금발의 미인이었다.”(19쪽)

이들 부부에게 삶의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여자가 동네사람들과 만든, 자신의 어린 시절 배우의 꿈을 상기시켜준 연극공연이 실패한 바로 그날부터 였을 것이다.


그렇다. 살면서 우리는 매순간 뾰족하게 날이 서 있지는 않다. 비록 불만이 있을지라도, 이게 아닌데라고 거듭 깨우쳐주는 찰나의 순간은 존재하더라도, 더 큰 혹은 더 중요한 계기가 필요하다. 그 계기를 이유삼아 항상 익숙하던 것에 감히 반기를 들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논리야말로 우리가 한없이 나약하고 한없이 무르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계기 없는 반역이 도대체 가능하지 못할 것이란 이 비관적 전망 말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파리로 가자고 한다. 이미 계획은 확고부동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원래 원하던 것을 찾아보라고 한다. 일자리가 없어도 자신이 먹여살리겠다고. 6개월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드디어 9월이 오면, 파리로 네 식구가 “영원히” 떠나는 것이다.

“이 염병할 교외 주택가 타입의 좀스러운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일이 지독하게 힘들다는 거지.....한통속으로 좀스럽고 무능하고 얼간이 같은 인간들 틈에서 다치지 않고 살아가는 거 말이지.....”(44쪽)라고 말할지언정 진정 여기를 벗어날 용기가 없었던 남자보다 여자는 더 과단성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당신은 ‘시간’을 갖게 되는 거란 말이죠. 당신 인생에 처음으로 스스로 하고 싶은 게 무언지 찾아내기 위한 시간을 갖게 될 거에요......”(163쪽)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남자는 어땠을까? “그 계획을 듣는 순간 겁에 질린 모습들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162쪽)

여자가 어떻게 서로를 설복시켰든 간에 마침내 두 사람은 유쾌한 혼돈, 도취된 방종의 시간을 시작한다. 프랑스어를 배우고, 여권을 신청하고, 사표를 쓰고, 밤마다 떠날 도시와 맞을 도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무언가를 갈망한다는 것은 그리고 그 갈망이 곧 몇 달 안의 성취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사람을 얼마나 매혹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인가? “그녀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해서 커튼콜을 받으며 섰을 때 딱딱하게 경직되고 굴욕감으로 참담하던 여배우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그녀에게서는 고전적인 미인의 자태가 풍겨 나왔다. 그 누구라도 유럽을 정복한 그녀의 모습을 그려볼 만했다(187쪽).”

남자 역시 “평소보다 말의 속도가 느리고 더 신중하며 더 깊은 어조로 더 유창하게 말한다는 것을, 그는 이제 말을 더듬거나 얘기를 매끄럽게 이어가기 위해 사과하듯 던졌던 말들에 기대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때때로 밤이 이슥한 시각, 말을 아느라 목이 아프고 눈자위가 화끈거릴 때, 어깨를 웅크리고 턱은 쑥 내밀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겨 무슨 밧줄처럼 걸고 있을때 창을 유심히 노려보면 자기에게도 어느덧 담대한 풍채가 배어 나오고 있음을 느꼈다.”(188)

그러다가 그런 일이 터졌다. 뜻하지 않은 일. 생각지도 못했던 일. 여자가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한 것이다. “자기 앞으로는 사실상 돈 한푼도 없는 사람들이, 그것도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갈 나이의 아이들을 데리고,” 무작정 파리로 떠나고자 했던 이들에게, 어쩌면 결정적인 짐이 더해진 것이다. 유일하게 위선이나 안락함과 거리가 먼 기빙스 부인의 미친 아들 존이한 말처럼 “이 나라의 모든 것에 담긴 절망적인 공허”에 대해 이야기했던, 밤이 새도록 죽치고 앉아 공허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절망을 보려면 훨씬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였던 바로 그 순간에 용기를 꺾을 가장 강력하고 그럴듯한 구실이 생긴 것이다.

“가족이 생기면 진짜 삶에서 물러나 ‘안주해야’마땅하다는 생각....그건 교외 주택가에 사는 사람들이 빚어낸 지극히 감상적인 거짓말이에요“. (167쪽)라고 웅변했던 여자도 이 세 번째 임신이 갖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 하필 때맞춰 남자에게는 승진의 기회도 왔다. 남자에게 그것은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모험을 접을 좋은 구실이 되었다.

“자신을 그런 식으로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니 얼마나 교묘하고 불성실한 짓인가! 일단 그렇게 시작되면 그만두기가 너무나 어려워지는 것을....그리고 자신이 관여하는 삶이라는 게 월계수 극단이 <화석숲>에 관여하는 방식, 혹은 스티브 코빅이 자기 드럼에 관여하는 방식과 같다는 사실을 깨eke게 되었다.-열성적이고 대단히 감상적이며 한낱 시늉뿐이어서 매사가 온통 잘못된 방식.”(436쪽)

여자는 자신을 몰아세운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정직하고 절대적으로 진실한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그것은 반드시 홀로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친 자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책 앞머리의 “아아 슬프도다! 미약하면서도 격렬한 정열이여!”라는 존 키츠의 인용구에서 이미 이 이야기의 결말이 내정되어 있었던 것인가.


바람이라도 불었으면 좋겠다. 그 바람에 서글픔의 기미가 묻어있으면 안심이 좀 될 것 같다. 때로 우리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대상은 동조하는 듯한 일말의 자연의 기미인지도 모른다. 그 자매들이 있던 방은 이제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살고 있다. 마치 에이프릴과 프랭크가 떠나 버린 레볼루셔너리 힐 에스테이트에 새로운 젊은 부부가 이사왔듯이. 삶은 계속되고 생활은 이어진다. 내 나이 스물 아홉이었던 때, 그 좁은 자매들의 방에서 그들과 내가 좇고자 했던 것이 정신의 고양이었는지, 그보다 더한 무엇이었는지는 사실 불분명하다. 인생이 더 깊어가더라도 모르기는 매한가지 같다. 다만,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던 그 때, 쉽게 동요하고 쉽게 꿈꾸고, 그리고 쉽게 떠날 수도 있었을 그 때, 적어도 에이프릴 그녀만큼은 용감했던 것 같다. 또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 지는 적어도 더 명료했던 것 같다. 잊혀진 사물들은 쓸쓸하지만, 잊혀진 꿈, 잊혀진 용기는, 그래서 슬픈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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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qp 2009-11-18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참 개성있고 흥미롭게 잘 쓰시네요 대단해요

테레사 2009-11-18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