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9
제임스 M. 케인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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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사건들은 맥락없이 앞뒤로 엮이기도 한다. 꿈에 흰머리 염색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느닷없이 생전 보도 못한 대학 친구의 열살배기 아들이, 자기 엄마가 유괴되었단다. 

동생도 머리카락을 뒤집어서 흰머리칼을 보여준다. 이게 무슨 뜻일까? 이 꿈들은 연이어서 꾼 것인지, 밤을 건너뛰어 하루의 상간을 두고 꾼 것인지, 그것마저 헷갈린다. 수영장에서 문득, 나는 인간인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어젯밤에는 세계명작산책으로 미국의 주홍글자를 들었다.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맨 처음 장면이 무엇으로 시작하는 지도 기억에 없는데, 성우는 제법 진지하게 소설 첫장면을 연기한다. 내일은, 식료품을 좀 사야지 하는데, 갑자기 드는 생각 '모두가 어렵다 어렵다 하는데, 좀 절약해야겠다, 먹을 것을 좀 줄여야 하지 않을까?' 가난한 사람은 이제 더이상 절약할 것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면서 잠을 청하지만, 나도 집을 사야하는 것이 아닐까..이 낡은 이층집 이 조그만 방에 나의 물건들이 다 있구나, 이 정도면, 가난하다고 할 수 있을까? 부자라고 할 수 있을까? 연휴동안 책을 네 권 읽었다. 유일하게 하는 일이, 먹고, 잠자고, 읽고. 이것이 인간인가? 

2009년 1월, 가슴이 떨렸다. 아무 계획없이, 새해가 밝았다는 사실과, 어제와 오늘이 아무것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과, 무기력과 무능이 결국 같은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언론노조의 파업현장에서, 얼굴도 예쁜 아나운서들이 생각까지 똑바르다는 사실과, 연휴동안 거의 뉴스를 듣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래서,다시 묻는다, 이것이 인간인가?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는 제목이 탄생하기까지의 에피소드가 이 책의 역자의 글에 소개되어 있다. 사람들은 영화를 볼 때, 그 문제의 '포스트맨'은 언제 등장할까 고대하지 않았을까? 

물론 나는 영화를 먼저 보았다. 제시카 랭과 잭 니콜슨이 연기한 것이었다. 오래 전 일이다. 너무 선명한 이야기 줄거리 때문인지, 이것의 원작이 있다는 생각을 잘 못했던 것 같다. 이 말은, 그만큼 영화적 플롯이란 말이겠지. 

솔직히 소설을 읽고 나면,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기분이 나쁘다고 해야 하나? 설명하기 힘든 어떤 기분의 상태에 빠진다. 이 두 남녀를 어떻게 봐야 하나? 

사랑 때문에 살인을 하였다고 할 수 있나? 여자로 말할 것 같으면, 간이식당 여종업원 신세를 면할 가망성 없는 자신을 구해준 금줄시계찬 그 남편이, 그냥 견딜 수 없다고 하였다. 부랑자인 남자는, 그 여자가 원해서, 남편을 죽이기로 하였다.  사랑 때문이었을까? 

그 지긋지긋한 사랑 때문에, 포도주병으로 머리를 으깨 죽여버렸는가? 

내가 기분이 나빴던 것은, 이런 두 남녀의 살인행각에서조차, 주인공들의 거짓이 탄로날까봐 조마조마했다는 사실이었을까? 동정할 수 없는 살인에, 나도 모르게 응원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을까? 

이 구제할 길 없는, 동정의 여지 없는 두 남녀는, 포스트맨과 단 한번도 조우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원하던 어떤 것을, 얻는 바로 그 순간, 원하던 것을 잃는다, 만약 함께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말이다.

사는 것은, 마치 어젯밤 꿈속에서 이미 오래전 연락이 끊긴 친구의 아들을 본 것처럼, 느닷없이, 닥쳐오고, 사라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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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렐의 발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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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사람 하면 무엇보다, 나와 너무 다른 기질의 사람들이란 생각이 먼저 든다. 기껏해야 몇 편 정도이지만 남미 쪽 영화는 늘 불편했다. 유일하게 공감했던 것이 브라질 영화 '중앙역'이었으니, 애인과 함께 본 '시티오브갓'인가는 최악이었다. 아마도 폭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폭력 영화를 혐오한다. 내 애인이 두번 본 우리영화 '친구'도 나는 역겨웠다. 그 유명한 '원스어폰어타임어메리카' 역시 못마땅했다. 아름다운 음악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영화를 참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녀에게'의 폭력은 물리적 힘의 행사로서가 아니라 좀더 다른 방식이었다고 확고하게 믿는 내게는, 이 영화에 쏟아진 찬사에 심사가 뒤틀릴 지경이었다. 물론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어버린 유무형의 폭력에, 눈을 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아, 나는 비오이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이 소설은 폭력 이야기는 아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책의 삼분의 일까지 읽는데는, 솔직히 인내가 필요했다. 비오이 카사레스의 '러시아 인형'이란 단편집을 먼저 읽었던 터라 기대가 컸다. 뭐랄까 재기발랄한 온갖 상상력이 알맞게 버무려진 단편집의 기억이 너무 강했던 까닭인지, 상대적으로 이 책은 지루하기까지 했다. 전반부의 주요 이야기 전개는 범죄자로 경찰에 쫒기는 한 남자가 거의 무인도에 가까운 섬으로 피신가기까지의 이야기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전개될지 짐작도 못할 뿐 아니라 이 이야기가 흔히 남미문학에 갖다 붙이곤 하는 환상소설인지, 공상과학소설인지, 아니면 그냥 연애소설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침내 중반을 넘기면서, 그러니까 주인공 남자가 포스틴이라는 약간 특이한 여자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점점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다 마침내 그녀에게 어떻게든 자신을 드러내려 하면서, 조금씩 내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 여자와 주변 사람들이 주인공 남자의 존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어라 이거 점점 재미있군. 혹시..이거 식스센스류의 귀신이야긴가...아니면 타임머신 같은...아니면...동일한 공간속에 서로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들 이야긴가..

나의 짐작이 맞는지 보기 위해 책을 끝까지 펼치게 되었고, 마지막 반전이 허를 찌르자 마침내 책은 끝났다.

짐작대로 주인공은 그 섬에 있었으나 이제는 없는 존재와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폭력의 속성이 일방적이라면, 시간은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무방비의 육체에 가해지는 물리력의 결과는 파괴다. 시간은 사랑의 파괴이며, 육체의 파괴이며, 존재의 파괴이다.

그런 파괴를 견딜 만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주인공은 이 시간의 폭력에 반항하였으나 역설적이게도 존재의 파괴를 통해서였다.

무력한 것이 어디 시간에 대해서뿐이랴. 갑자기 인간 존재가 너무 무기력하고 허약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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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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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1998년판으로 읽었다. 아래 리뷰 작성은 책을 읽은 그해 2003년에 4월에 한 것이다.  요즘 새삼 영화개봉에 맞추어 인구에 회자되는 듯하다. 나는 오래 전 이미 주제 사라마구의 '모든 이름들'을 발견했다. 한겨레 신문 덕이었다. 그 때 그의 이력에 '공산주의자'란 딱지가 뻔뻔스럽게도(!) 붙어있었다. 어쩌면 그것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책에 매혹되었더랬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책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주제 사라마구란 이름을 사랑하였다. 수도원의 비망록도 샀다. 물론 그의 모든 책을 다 읽지도 않았지만,이 늙은 공산주의자 작가의 상상력은, 나를 압도하였다. 만민평등의 사상을 가지고 자본을 철저히 경계하지만 그렇다고 배척하지는 않는자라고 생각한다.  수도원의 비망록은, 솔직히 읽기가 만만치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나는 사극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실화바탕의 소설은 거의 원수지간으로 알 정도다. 물론 이 책은 과거를 빌어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긴 하지만, 나는 오래된 습벽에서 곧바로 헤어나오는 것이 어려웠다. 머리맡에 두고두고 심심할 때면 꺼내들었을 뿐이다.

그와는 상대적으로 눈먼자들의 도시는 잘 읽혔다. 사실 이 소설이 암시하는 바가 너무나 명료하기 때문에, 책소개로서는 재미가 없었다. 나는 모호하고, 다층적이며 다의적인 것들이 더 편하다, 아무말이나 지껄여도 용납이 되니까. 하하*


포르투갈어는 전세계적으로 2억 이상의 인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다. 흔히 지리상의 발견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15세기, 포르투갈인 바르톨로메오 디아스 등이 희망봉을 발견한 이래 인도양 부근의 여러나라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 영향을 받아 앙골라, 모잠비크, 까부 베르드, 기네비싸우 그리고 성 또메 이 쁘린씨쁘의 아프리카 5개국이 남미의 브라질과 함께 포르투갈어를 공식어로 사용하는 공동체 CPLP( Comunidade dos Paises de Lingua Oficial Portuguesa)의 구성원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래서 포르투갈어는 지금도 유럽과 아프리카,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를 이어주는 중요한 문화적, 정치적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에게 너무 멀리 있어 아득하고 흔히 스페인과 혼동되곤 하는 나라(아니나 다를까 포르투갈어는 스페인어와 많이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름이란 나와 타인의 구체적 경계이며 구별짓기의 처음이라고 한다면 이 두 나라 역시 엄연히 독립된 역사와 문화를 가진 개별 독립국인 것을 잊으면 안될 것이다. 물론 이 말은 흔히 중요한 것을 자주 혼동하곤 하는 내게 하는 말이다.

 

이 이야기는 하루아침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 이야기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버린 도시 전체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겠다. 아무튼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한 남자가 운전석에 앉아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앞이 온통 백색광선으로 뒤덮이면서 안보이게 된다. 즉 눈이 먼 것이다. 이 눈 먼 남자는, 오늘날 문명인이라면 당연히 밟는 수순으로 아내와 함께 병원을 찾게 되는데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 즉, 의사, 간호사, 환자들이 차례로 눈이 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접촉했던 사람들 또한 눈이 멀고 또 그 사람들이 접촉했던 사람들도 눈이 멀고 또또 그 사람들이 접촉했던 사람들이 눈이 멀고...마침내 도시 전체가 모두 눈 먼 사람들로 가득 차버리게 된다. 모두가 눈이 멀어 보이지도 않고 보이지 않으니 잘 들리지도 않을 법한 이 도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소설가 정찬은 소설만큼 길을 잃기 쉬운 세계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 의미하는 바야 다르겠지만 이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눈이 멀지 않은’ 우리 독자들이 길을 놓쳐 버리지 않고 제대로 소설이 내는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 안내자가 필요할 법도 하다. 고맙게도 작가는 이러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맨 처음 눈이 멀어버린 남자를 진찰했던 의사의 아내가 우리를 이 간단하지 않는 소설의 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하도록 남겨둔 것이다. 의사의 아내만이 이 눈 먼 도시에서 유일하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도시의 구석구석을, 모든 사람들을, 그들을 대신해서 보고, 또 본 것을 말할 수 있다.

하루 아침에 멀쩡하던 눈이 먼다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눈먼 사람도 가족이나 친구 등의 도움을 받아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다. 그러나 일시에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버린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재산, 심지어 관계까지 이전에 누렸던 가치를 상실한다. 본다는 것이 단순히 사물을 구별하는 감각의 차원을 넘어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판단하는 일체의 것이라고 말한다면 보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 완전한 무지의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룩한 문명이란 것은 결국 ‘볼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유의미한 것이므로. 눈먼 자들의 도시는 결국 도시 이전의 도시, 역사 이전의 역사, 문명 이전의 야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98년 동안 영어권과 프랑스어권 작품이 거의 독식하다시피한 노벨상의 연혁에 아주 가늘고 섬세한 그러나 확고한 선하나를 그은 주제 사라마구는, 리스본일 수도 있고 여기 서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다른 모든 도시일 수도 있는 익명의 도시에서 이 환상적인 이야기를 풀어낸다. 쉼표와 마침표 이외 일체의 문장 부호를 사용하지 않는 독특한 화법은 독자와 소설 속 인물들의 경계를 허문다. 등장인물은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이름이란 한낱 이전 문명의 세련된 기억일 뿐이고 새로운 도시에서는 이전과 같은 광휘는 더이상 뿜어낼 수 없다는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의도된 생략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다.

하나의 힘이 유일하게 전세계를 지배하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 무소불위의 야만적 권력이 그들의 언어가 아닌 전혀 다른 언어로 사고하고 쓰고 존재하는 세계가 있음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때문이라면, 이 소설은 그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래서 그들 역시 눈 먼 자들이며 이 소설읽기는 결국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어서 나를 고스란히 이 고통의 세상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으려나.  단, 조금 우회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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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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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뵐의 늙은 사진은, 솔직히 내게 호감을 주진 못한다. 나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낀다. 1975년의 사진을 실었다면, 이 책을 썼을 당시 그의 어떤 면모을 엿볼 수 있을 터인데, 이 사진은 늙은 작가의 쉽지 않은 성격을 짐작하게는 하지만, 여전히 젊은 그의 모습에 대한 그리움을 상쇄하진 못한다.

생각의 흐름은 늘 제멋대로다. 그것에 일정한 방향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 뇌가 정교한 계획에 의해 진화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관성이며, 새로운 진화를 위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있던 체계를 땜질해 나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라는 말은 맞는 걸까?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 또한 인간 개개인마다 다르다. 만약 진화가 직선방향의 진보라면, 인간에게 과거의 실수는 되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주변을 보라!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는 과거의 어떤 때의 그것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는 진보는 차치하고라도 겨우 제자리걸음을 할 수 있기라도 하다면,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다.

장담하건대 인간은 과거의 잘못을 일부 수정할 수는 있을 지언정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우울하다. 나는 가끔 정의라고 하는 것이, 허무맹랑한 위선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갖는다. 그래서 책 속에서나 정의를 살리고 정의를 수호하고 정의가 이기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머리 속에서만이 가능한 것이 정의라면, 이 세상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 또한 우울함을 더한다.

카타리나 블룸은 명예를 잃었다. 그보다 더 나쁠 것이 없는 모욕적인 방식에 의해서였다. 꽤 괜찮은 스물 예닐곱의 여성이 검찰이 오랫동안 고군분투하며 검거에 나선 강력범죄혐의자의 도주를 도운 애인이며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내로라하는 결혼한 남자의 정부였다는 평판만큼 치명적인 모욕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녀 한 개인의 명예감을 훼손한 것에 그치지 않고 타인들이 그녀에 대해 가지고 있던 평판까지  현저히 훼손시킨 것이라면? 이미 이것은 일개인을 뛰어넘는 일이며, 사회적 의미를 띨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 명예훼손의 주체가 수만 수백의 독자를 가진 신문사에 의해서라면 말이다.

그렇다. 카타리나 블룸은, 이제 추락한 자신의 명예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더 큰 적들과 대면해야 한다. 그것은 전쟁이다. 이웃으로부터의 업신여김과 손가락질뿐 아니라 매일 아침 신문을 펼쳐볼 수만 수백만의 독자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정점에는 사람들의 은밀한 관음증과 호기심을 부추기는 주관적 판단 유포자로서의 신문사가 있다.

1970년 대 독일은 분단국이었고, 그녀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혐오증을 가진 사람들과 동시대인이었다. 그녀에 대해 사람들은 자기식대로 기억하고 말하고, 여기에 취재기자(혹은 신문사)의 일방적인 판단이 더해져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자극적인 기사들이 연일 보도된다. 기사라는 형식을 쓰고 무방비의 한 개인에게 가해지는 언어적 폭력의 결말은?

하인리히 뵐은 이 작품을 소설이 아니라 이야기걸기 방식으로 쓴 것이라고 하였다.  마치 보고서를 쓰듯 검찰 조서를 출처로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부제로 붙은 "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가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30년 전의 독일 사회와 현재의 우리를 비교한다는 것은 공평하지 못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문득 이 범상치 않은 소설을 늦게라도 알게 된 기쁨에 앞서, 우리 사회의 언론 환경은 과연 어떤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지난 여름,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이미 국가권력보다 더한 힘을 가졌다는 몇몇 언론사들의 펜에 의해 추락한 힘없는 개인들의 명예감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 과연 그것은 어떤 결말을 가져올 것인가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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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위의 여자 Mr. Know 세계문학 11
존 파울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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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2004년도 나온 책입니다. 문고판이 나온 줄 알았으면 문고판을 샀을 텐데... 저는 개인적으로 양장본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보관하기가 용이할 지는 몰라도 읽기는 여간 성가신게 아니니까요. 표지의 두께에 쏠려 자꾸만 읽던 페이지가 흐트러지거든요. 그리고 가지고 다니기에도 불편하고요. 딱 하나 좋은 점은 베고 자기가 좋다는 것?

사두고 계속 첫페이지만 읽다가 밀쳐놓곤 하던 것을, 우연히 눈에 띄길래 펼쳤지요. 책은 늘 때가 있는 법이니까요.

어찌나 재밌던지, 결국 밤새워 읽었습니다. 지난 해 9월 읽었던 <사랑의 역사>(언제 사랑의 역사에 대해서도 소개하겠습니다) 버금가는 재미였습니다. 

친척이고 의지할 데도 없고, 부자도 아니고 신분도 낮은, 게다가 프랑스중위놈이랑 놀아났다는 평판의 가정교사 여성이,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이해해 주는, 곧 귀족작위를 물려받을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사랑까지 얻지만,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멀리 떠납니다. 남자는 부르조아계급의 약혼녀가 있지만, 이 여자 때문에 파혼하게 되지요. 

파혼으로 여러가지 곤혹스러운 일까지 겪지만 사라진 여자를 신문광고까지 내면서 찾습니다. 허나 여자의 행방은 오리무중...아마도 그런 여자들이 흔히 그렇게 되듯 사창가로 흘러간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지요.

이러저런 곡절 끝에 사라진 여자를 찾지만, 그 여자는.....

뭐 대충 이런 이야깁니다.

역시 만사 귀찮을 땐 연애소설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끝났다면 흔한 연애소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겠지요. 비슷한 소설이 꽤 있었던 듯 한데...이 소설이 여느 연애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작가의 지나친 개입이라는 것이지요. 아예 처음부터 영화를 찍듯 작가가 이야기를 거듭니다. 그러다간 이야기 흐름을 꺾기위해 소설 속에 직접 등장하기도 합니다.

소설의 결말이나 이야기 전개가 이 작가의 노골적인 개입으로 인해 두번 꺾입니다.

저는 이 소설이 영화화 되었고, 영화는 영화찍는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본 줄거리와 함께 펼쳐진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해서 영화, 별 시덥잖겠군...하면서 부러 안보았지요.

헌데 책을 읽고 나니 그 설정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만약 소설 줄거리의 어느 하나를 선택해서 영화를 만들었다면, 이전에 나온 순수의 시대니 위험한 관계류의 재탕밖에 안될 터인데, 이 소설의 묘를 살리자면, 액자소설처럼 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해서 이 영화를 기회가 있으면 보려고 합니다. 

이 책은 1967년에 씌어진 듯합니다. 딱 100년 전의 영국 여자와 남자의 사랑과 풍속을 그리고 있으니까요. 사랑도 사회의 한 부분인지라 당시 영국 땅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알 수 있지요. 시대물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 정도의 작품이라면 기꺼이 시대물도 좋아할 수 있을 법합니다.  

사라....그녀를 따라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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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19-09-04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과거의 내가 놀라울 때가 있다..지금이 그런 순간..나는 존 파울즈의 이 소설을 이렇게 읽었구나.. 다시 읽는다면 또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