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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렐의 발명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남미사람 하면 무엇보다, 나와 너무 다른 기질의 사람들이란 생각이 먼저 든다. 기껏해야 몇 편 정도이지만 남미 쪽 영화는 늘 불편했다. 유일하게 공감했던 것이 브라질 영화 '중앙역'이었으니, 애인과 함께 본 '시티오브갓'인가는 최악이었다. 아마도 폭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폭력 영화를 혐오한다. 내 애인이 두번 본 우리영화 '친구'도 나는 역겨웠다. 그 유명한 '원스어폰어타임어메리카' 역시 못마땅했다. 아름다운 음악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영화를 참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녀에게'의 폭력은 물리적 힘의 행사로서가 아니라 좀더 다른 방식이었다고 확고하게 믿는 내게는, 이 영화에 쏟아진 찬사에 심사가 뒤틀릴 지경이었다. 물론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어버린 유무형의 폭력에, 눈을 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아, 나는 비오이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이 소설은 폭력 이야기는 아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책의 삼분의 일까지 읽는데는, 솔직히 인내가 필요했다. 비오이 카사레스의 '러시아 인형'이란 단편집을 먼저 읽었던 터라 기대가 컸다. 뭐랄까 재기발랄한 온갖 상상력이 알맞게 버무려진 단편집의 기억이 너무 강했던 까닭인지, 상대적으로 이 책은 지루하기까지 했다. 전반부의 주요 이야기 전개는 범죄자로 경찰에 쫒기는 한 남자가 거의 무인도에 가까운 섬으로 피신가기까지의 이야기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전개될지 짐작도 못할 뿐 아니라 이 이야기가 흔히 남미문학에 갖다 붙이곤 하는 환상소설인지, 공상과학소설인지, 아니면 그냥 연애소설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침내 중반을 넘기면서, 그러니까 주인공 남자가 포스틴이라는 약간 특이한 여자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점점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다 마침내 그녀에게 어떻게든 자신을 드러내려 하면서, 조금씩 내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 여자와 주변 사람들이 주인공 남자의 존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어라 이거 점점 재미있군. 혹시..이거 식스센스류의 귀신이야긴가...아니면 타임머신 같은...아니면...동일한 공간속에 서로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들 이야긴가..
나의 짐작이 맞는지 보기 위해 책을 끝까지 펼치게 되었고, 마지막 반전이 허를 찌르자 마침내 책은 끝났다.
짐작대로 주인공은 그 섬에 있었으나 이제는 없는 존재와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폭력의 속성이 일방적이라면, 시간은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무방비의 육체에 가해지는 물리력의 결과는 파괴다. 시간은 사랑의 파괴이며, 육체의 파괴이며, 존재의 파괴이다.
그런 파괴를 견딜 만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주인공은 이 시간의 폭력에 반항하였으나 역설적이게도 존재의 파괴를 통해서였다.
무력한 것이 어디 시간에 대해서뿐이랴. 갑자기 인간 존재가 너무 무기력하고 허약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