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 쓰기를 배울 때 스승님이 그러셨다.

앞으로 '표절'이란 것에 대해 민감해질 것이라고.

내 것을 누가 표절하지 않을까.


일단, 여기에 신경 쓰일 거라고.

근데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작가도 아니고, 해서

더 관심 간 건 두번째 표절이었다.


남의 것을 내가 표절하지 않을까.

이거.


'내가 안 하면 되지, 그걸 왜 걱정하고 앉았나요?"


꽤나 순진무구했을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을 때, 스승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지.


"일부러 표절하려고 한 표절을 말하는 게 아니지요. 우리 무의식 어딘가에 스민, 선대 거장들이나 선배 작가들의 것을 나도 모르게 가져오는 것을 말하는 거지요."


그러면서, 스승님은 또 이런 말을 덧붙이셨다.

마치 백년 면벽수도한 고승처럼 눈을 감듯 내리까시고,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하늘아래 새로운 작품이 있을런지요. 

작가들의 무의식은 다 통해있지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후로 나는 '표절'에 좀 둔감해지기로 했다.

그게 속편하기도 하고, 

스승님 말씀처럼 '하늘 아래 백프로 새로운 작품은 없다' 싶어서.

우린 모두, 우리보다 먼저 쓴 누군가의 영향을 받기 마련 아니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이 두 거장의 명작을 비교해볼 깡다구가 생겼다.


다시금 말하지만, '표절'을 운운하기보다는 '통한다'는 의미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 출간)/레프 톨스토이/민음사

에브리맨(2006년 출간)/필립 로스/문학동네


1. 큰 플롯 면에서 통한다


두 소설 모두 주인공이 죽고 난 직후에서 시작한다.

이것만으로도 독특하다. 대개의 소설은 주인공이 죽기까지를 다루니까.


두 소설은 모두, 주인공이 죽고 난 뒤 장례식으로 시작해 

과거로 회귀

주인공이 죽는 시점에서 끝난다.


사실, 이 큰 플롯만으로도 내 눈에는 두 소설이 정말 많이 '통해' 보였다.


이반 일리치는 그곳에 모인 신사들의 동료로서 모두 그를 사랑했다. (9p)


그들은 그의 활력과 독창성을 회고하며, 딸 낸시에게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크나큰 즐거움이었다고 말해주었다.

(9p)


두 소설 모두, 주인공들이 잘 나가는 중년 남자.

죽기엔 아직 젊은 나이다. 아내(혹은 전처)가 있고, 자식(들)이 있다.


소설의 초반에 주인공들의 부고가 전해지면서 

동료들의 반응이 나온다. 두 소설 모두, 위에서 보다시피 동료들의 반응이 통한다.


더 있다.


이 죽음으로 인해 각자의 머릿속에는 직장 내의 인사이동과 가능할 법한 변화에 관한 생각만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가까운 지인의 죽음 자체는 늘 그렇듯 부고를 접한 모두에게 내가 아니라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의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10p)


물론 다른 누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비통해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거나 자기도 모르게 안도했다. 또는 좋은 이유든 나쁜 이유든 진정으로 기뻐하기도 했다.(23p)


두 소설 모두, 주인공의 죽음을 두고 동료들이 내놓는 반응 중에 '기쁨'이 보인다. 


2. '빛'으로 통한다


이젠 끝을 보자.


두 소설, 모두 주인공 남자들이 그닥 잘 살아오진 못했다.

그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가 될 수도 있고, 여기서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생략하자.


두 소설 모두, 마지막에 주인공 남자가 숨을 거두며 느끼는 감상이 나온다.

그때 중요하게 활용되는 것이 바로 '빛'이다.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 

"바로 이것이다!" 갑자기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기쁠 수가!" (103p)


모든 곳을 뚫고 들어가던 한낮의 빛이여. 그는 생각했다.

여름의 매일매일 살아 있는 바다에서 타오르던 그 빛이여. 그것은 눈에 담을 수 있는,

엄청나게 크고 귀중한 보물이었다. (188p)


그닥 잘 살아오지 못했던 두 중년 남자는 죽음 직전에 '빛'을 본다.

기쁨의 빛. 보물같은 빛.


그리고 두 남자는 죽는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한중간에 그대로 멈추더니 몸을 쭉 벋은 채 죽었다.

(103p)


다시 충만해지기를 갈망하며 밑으로 내려갔지만, 결국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188p)



이때, 뭔가가 '없다'는 걸 강조한다.


죽음이 없기 때문에 어떤 공포도 없었다. (103p)

그는 이제 없었다. (188p)


두 주인공 모두 '없음'의 경지를 경험하고 세상에서 '없어진다'는 점에서 또 통한다.


3. '구멍'으로 통한다.


두 소설에서 두 중년남자 주인공은 죽음 직전에 '구멍'을 경험한다.


무슨 구멍이냐고?

이반 일리치의 경우는 '검은 자루'의 아가리인 '구멍'이고

에브리맨의 '그'의 경우는 자신의 관이 들어갈 무덤의 '구멍'이다.


이 검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괴로운 일임을, 더군다나 그 스스로 뚫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더 괴로운 일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그 구멍으로 들어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삶이 훌륭했다는 의식이었다. (101p)


하지만 무덤을 파는 얘기로 돌아가죠. 마무리는 내 아들놈이 합니다. 

네모반듯하고, 바닥은 평평해야 합니다. 깊이는 2미터 정도 되고, 

멋있어 보여서, 구멍으로 한번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도 들어야 돼요.

(중략) 

이렇게 이 2미터 깊이의 구멍을 파는 거죠. 이 구멍은 유족을 위해서도 제대로 파야 하고,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제대로 파야 합니다." (182p)


두 소설에서 '구멍'의 쓰임을 비슷하기도 하면서 다르기도 하다.


우선 비슷한 점은,


두 사람이 삶의 마지막에 조우한 '공간'이란 것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 '구멍'은 '에피파니(epiphany)'의 성지가 된 셈이다.

참 얄궂게도 두 사람은 어쩌면 가장 기피하고 싶었던 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운다


다른 점은 '구멍'의 내용이다.


이반 일리치에게 '구멍'은 마침내 빛을 발견하는 통로였지만,

에브리맨의 ‘그’에게는 어떤 구원의 약속도 없는 육체의 최종 거처가 된다.


하나는 구멍을 통과하며 빛에 이르렀고, 

다른 하나는 구멍 앞에서 삶의 유한성을 확인했다. 


작가들은, 이 정도로 '통한다'.


이걸 놓고 '표절'이란 말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통하긴 아주 많이 통한다. 안 그런가?


좋은 의미에서다.


소설의 ‘변주’란 같은 메시지를 다른 방식으로 전달하는 일이다. 

우리네 인간이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문제들이란 게 

시대가 달라진다고 얼마나 달라지겠나.

(알고 보면 이 세상 모든 소설의 최고 꼭대기엔 '구원'이 있을 뿐이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망하고, 후회하고, 그러다 죽겠지.


이 모든 건 지난 수천 년 동안 인간이 해온 일이고, 

작가들이 줄기차게 써온 이야기다. 

그런데도 우리는 또 읽는다. 

지겨운 줄도 모르고 또 읽고 또 읽는다.


이 정도면 뻔할 법한 이야기가 매번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작가들이 저마다의 경험과 상상력으로 그 이야기를 변주해 내기 때문일 것이다.


톨스토이가 파놓은 구멍을 120년이 지나

필립 로스가 다시 파서 우리 앞에 내놓았다.


두 작가가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인물을 데리고 와서 

피해 갈 수 없는 그 좁은 구멍 앞에 우릴 세워놓았다. 


아무래도 죽음에 관해

인류가 아직도 이렇다 할 새로운 답을 찾아내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니 작가들이 자꾸 그 '구멍'을 들여다보는 것 아니겠는가.

혹은 뻔질나게도, 지겹게도 '빛'을 끌고 들어오는 것 아니겠는가.

(올해 나온 소설 중 '빛'이 들어간 게 몇 권인지 세어보라. 깜짝 놀랄 것이다.)


소설에 변주가 있다면 나는 소설(비소설도 포함) 독서에도 변주가 있다고 본다.

바로, 서로 ‘아는 척’하는 책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릿속에 쌓인 책들이 서로 아는 척을 하기 시작한다.

한참 전에 읽은 책이 끼어들기도 하고, 

까맣게 잊고 있던 장면이 다른 책에서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이번에 두 소설의 ‘통하는’ 부분을 발견한 것도 그 덕이다.


책들이 서로 아는 척을 할 때마다 이미 읽은 이야기에 새로운 해석이 보태진다. 

한 권의 책에서 끝난 줄 알았던 이야기가 다른 책으로 건너가 다시 이어지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서로 아는 척할 책들이 많아질수록 독서가 재미있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긴 독서 후기도 쓰게 되고, 글솜씨도 진일보할 것이고, 

다른 책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진다. 


다음에는 또 어떤 책이 아는 척을 해올까 싶어서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독서의 변주란, 

한 권의 책을 읽을 때마다 

지금껏 읽어온 책들까지 조금씩 새로 읽게 되는 일이다.


그러니 독서가 이 아니, 즐겁겠는지요.

(나무아미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벌과 보이지 않는 것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52
클레멘스 J. 제츠 지음, 권선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러니까, 소설은 아니고, 문학보고서라굽쇼. 듣도보도 못한 장르이긴 합니다만, 호기심 담뿍 느껴집니다! 반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기쁨일 거고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꼭두, 듣다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60
이주혜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시대의 믿음직한 소설가의 신작 소식은 (우영우 대사를 빌린다면) 늘 봄날의 햇살같다. 꼭두, 라니. 대단한 발상. 꼭두에게 내 이야기도 하러 가볼까. 아니구나. 망자의 소리만 듣는구나. 그럼, 망자의 소리를 들으러 갈까나. 꼭두의 귀를 빌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10월의 마지막 날.

미국은 귀신을 쫓기 위해 귀신으로 위장하는 날.

거리마다 가게마다 귀신들이 그득하다.


매년 할로윈은 추웠는데, 이번엔 햇살이 봄처럼 좋다. 

이런 날은 집 안에 있는 게 날씨에 대한 결례같아 나선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차 타고 검색을 시작했다.


볕은 봄이지만 시기는 가을이니 단풍!


단풍과 서점과 카페가 그득한 곳이란다.

그래, 뉴욕주 뉴팔츠(New Paltz)다. 집에서 한 시간.


New Paltz부터 공부. 


17세기 프랑스 위그노(Huguenot) 이주민들이 정착한 곳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지 거리 중 하나인 히스토릭 위그노 스트리트(Historic Huguenot Street)가 남아 있다. 뉴욕주립대(SUNY New Paltz)가 자리한 덕분에 오래된 건물과 독립서점, 갤러리, 카페들이 어우러져 있다. 인근 샹가크 산맥(Shawangunk Mountains)의 아름다운 풍경까지 더해져, 오래된 역사와 젊은 예술적 감각이 공존하는 마을이다. -나무위키 중-


호젓한 도로와 새치름한 골목을 기웃거리는데 중고서점 둘이 마주보고 섰다.

벗인가, 적인가. ^^


먼저 들어간 곳 초로의 주인 남자는 샐러드를 먹고 있었다.

일회용 접시에 플라스틱 포크로.

어째 안 어울리잖아...


난 지금부터 시간을 거슬러 갈 건데.



시집 코너.

책이 얇으니까. ㅋㅋ

읽는 덴 부담 크지만, 보는 덴 부담 없으니까.


메리 올리버 시를 뒤적였다.


Dog Songs.

장마다 귀여운 개 일러스트. 꺅, 소리칠 뻔.




이 책이 번역돼 있던가. 찾아보니, 있다. 품절. 


개를 위한 노래



이걸 사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중고책에 더 눈이 가서.


그러다 심봤다!


아모스 오즈의 장편 소설, 'Don't Call it Night'.














그리고 소설쓰기하고 연관해서 이 두권 모셔왔다.



두 권 모두 한국 번역본은 없는 듯하다.

특히 왼쪽 책은 '단편소설 종합 작법서' 같은 건데 33명 소설가의 작품이 인용문으로 다루어져 있다. 이런 거 읽는 재미가 쏠쏠한 법. 


오른쪽 책은 소설의 대사 쓰기 작법서인데,

역시 구매 의도는 같다. 인용문 읽는 재미.

내가 미처 챙겨 읽지 못했거나 내 레이더에 들어오지 못했던 

좋은 소설들을 대거 '조각'이나마 맛볼 수 있다.

전체 파이가 아닌 조각으로 먹을 때 그 맛의 임팩트라니!



오늘 본격적으로 떠들어 볼 책은 이거다.

이건 플라스틱 포크로 샐러드 먹는 주인장의 중고서점이 아니라 그 근처 

앤틱숍에서 건진 거다.


The Brave Little Tailor.


출판연도를 확인하니 1958년. 무려 68년 전의 책

나보다 먼저 세상에 나와,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손을 거쳐 여기까지 흘러온.


이야기는 유쾌하다. 

가난한 재단사가 파리 일곱 마리를 단번에 때려잡는다. 

의기양양해진 그는 허리띠에 '한 방에 일곱!'이라고 새기고 세상으로 나간다. 

사람들은 그가 사람 일곱을 때려눕힌 영웅인 줄 안다. 

재단사는 굳이 오해를 바로잡지 않는다. 

그 허풍을 밑천 삼아 거인들을 물리치고, 

당시 동화가 흔히 그렇듯 당연히 공주와 결혼한다.

공주와 결혼했으니 또 당연히 왕이 된다. 

파리 일곱 마리로 왕이 된 인생역전 스토리.


그림이 지금 나와도 전혀 꿀리지 않게 세련됐다.


1958년은 전쟁이 끝났으니 미국에 아이들이 넘쳐났을 거다.

어린이책 시장도 폭발적으로 성장했겠지.


컬러 인쇄가 대중화되던 시기.

이 책도 색감이 이다지도 또렷하고 어여쁜 이유가 그것일 거다.

색, 색, 색으로 유혹하라!


이 책이 속한 'Wonder Books' 시리즈는 1949년 첫 책을 찍었다.

그 당시 한 권에 25센트였다고.

첫 두 달 동안 200만 부가 팔려나갔단다.


내 어린 시절은 부의 상징이 피아노였다.

피아노 있는 친구 집에 초대도 안 받았는데 막 쳐들어갔더랬다.

그때는 그렇게 쳐들어가도 떡볶이와 꽈배기 같은 걸 내주었다.

날 초대한 적 없는 친구는 배 깔고 엎드려 

오렌지처럼 큰 귤을 까먹으며 일본에서 건너온 만화책을 읽었고

나는 도둑 고양이처럼 등을 웅크리고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소리 너무 크지 않게 가운데 페달을 밟아놓고.

그때 도레미도레미를 쳐보다가, 용기내서 88개 건반을 저쪽 끝에서 

이쪽 끝까지 하나씩 눌러보다가 더 용기내서 친 게,

'엘리제를 위하여'였던가.


나름, '완주'하고 등을 좀 펴고 보니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만화책 보던, 날 초대하지 않은 친구는 여전히 배깔고 엎드려 

만화책 다음 권을 집으려 하고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 친구 아부지.


어디서 피아노를 배웠니, 얼마나 배웠니...


1년 정도요-그게 내 평생 피아노 배운 총 길이다-.


-그런데 그렇게 잘 치니?

-이거만 쳤거든요.

-그래? 아주 집중력이 좋구나.

-다 외우는 게 이것 뿐이어서요.

-그게 집중력이 좋은 거야.

-우리 오빠는 제가 머리가 나빠서 그런 거라는데요.


날 초대하지 않은 친구가 킥킥 웃었던 게 그때인데

나는 지금도 그 애가 만화책이 웃겨서 웃은 거라고 믿고 산다. 


이야기가 너무 삼천포로 빠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서~~

한국에선 피아노가 부잣집의 상징일 때

미국에선 컬러 그림책이 부잣집의 상징이기도 했다.


인쇄술도 그때가 좋았는지

68년이 지났는데 색감의 선명도가 예술이다.

종이도 얇은데 찢어진 데 없이 든든하다.


캬. 이 냄새.


68년 묵은 책 냄새. 책의 살 냄새.

먼지 냄새도 아니고, 곰팡이 냄새도 아니고,

아니아니,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나무향과 버무려진 이 오묘한 냄새.


미간이 찡그려지려 하다가 돌아서면 뭐였더라? 한 번 더 맡아보고픈 이 냄새.


늙은 어머니의 땀과 몸 기름이 밴 베갯잇 냄새같은.

깨끗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빡빡 빨아 빼내고 싶지 않은.


표지 위쪽에 적힌 문구 봐라.


An Old Favorite with New Pictures.

오래된 이야기에 새로운 그림을.


그 문장을 한참 들여다봤다. 

1958년, 이 책을 처음 집어 든 아이에게 이 그림은 분명 'NEW'였을 테지.


완전 '새빠시 신상'이었겠지.


인쇄소에서 막 나온 책답게 신선한 잉크 냄새가 물씬 났을 테지.

아이에게 'NEW'라는 단어를 말 그대로 새로웠겠지.


그러고 68년이 지나는 사이, 그 아이는 자라고, 나이 들고, 늙어갔겠지.

이제는 팔순 정도 되었겠지.


지금의 팔순 노인은 기억할까.


68년 전의 새로움을.

지금 그 나이에는 무엇이 새로울까.


이 모든 디지털이며 AI며, 스스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새로울까.

팔순의 몸에 그게 새롭기나 할까.

새로움을 넘어, 다른 차원의 이야기는 아닐까.


이젠 '새롭다(NEW)'는 말도 좀 지친 느낌이다.

이전과 달라야 새로운 건데, 이전과 다른 걸 느낄 수도 없으니.

이전과 다른 걸 느끼려면 그것의 '유저(user)'가 되어야 할 테니 말이다.


유저는 주권, 권력 같은 말과 통한다.


무언가를 '사용한다(use)'는 것은 그것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그 귤 까먹고 만화책 보던 친구는 피아노를 칠 줄 모르는데

'장식용'으로 엄마가 산 거라고 했더랬다. 왜 자꾸 그때 피아노가 떠오르는지-


내가 팔순이 될 때, 내겐 무엇이 새로울까.

기대와 설렘보다는 왜 두려움과 맥빠짐인지.


그땐 달나라를 내집처럼 오갈라나?


그때 새로울 게 뭔진 모르지만

그 미래의 나,

그리고 68년 전 이 그림책을 손에 들었을 아이에게 도래한

 'newness'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후자를 고르고 싶다.


내겐 그게 훨씬 '살'로 다가오니까. 

그 흥분과 설렘이.


나는 중고서점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을 산 것이 아니라, 

68년 묵은 'NEW'를 샀다. 


서점을 나섰을 때도 햇살은 여전히 좋았다. 

나는 68년 된 책을 품에 안고 걸었다. 

동반한 이가 말했다.


-중고책이나 오래된 책엔 벌레가 살아. 몸에 옮을 수 있어.

방에도 두지 마.


이 사람 참...


볼수록, 만날수록 새롭단 말이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망고 2026-11-02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가서 책 소독기에 넣으면 벌레나 세균이 싹 소독될텐데요ㅋㅋㅋㅋㅋ
68년 묵은 그림책을 득템하셨군요. 와 그렇게나 오래된 책이 아직도 멀쩡하게 헌책방에 나와있다니 놀랍네요. 그리고 그시절 칼라도판이라니... 저 책을 처음 가졌던, 지금은 노인이 되었을, 그 아이에 대해 마구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젤소민아 2026-11-03 22:16   좋아요 1 | URL
그런 소설을 하나 써볼까봐요~~^^ 망고님, 한국엔 책 소독기가 있나요? 미국에선 본 적 없어요....부럽!
 
어떤 뜨개도 개인적이지 않았다 - 조각난 세계를 이어 붙이는 치유와 연결의 힘
로레타 나폴레오니 지음, 장상미 옮김 / 유유 / 202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취미로 뭘 하더라도, 이 정도의 탐구 정신으로 임한다면, 그 취미는 더 이상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삶을 밀고 나가는 강력한 동력이 될 것이다. 그떈 무엇을 하느냐의 경지를 넘어 그것에 어떻게 자신을 바치느냐가 될 테니까. ‘헌신‘하면 ‘보람‘ 말고도 더 큰 걸 손에 쥘 수 있다. 발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