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박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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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아버지는 남편에 비하면 늘 헐렁했다.

누군가가 생각해서 챙겨주더라도 

헐렁한 옷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버리는 그런 헐렁한 사람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여자는 

아버지가 던져준 헐렁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무렵부터 여자는 어떤 끈이든 단단하게 조이는 버릇이 생겼다.

풀려 있거나 느쓴해진 끈만 보면 꽉 조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여자를 짓누르고 있었던 헐렁한 삶에서 비로소 벗어난 것은 

바로 속싸개로 아기를 친친 동여매었을 때였다. 


-왜 이렇게 옷이 헐렁하다니, 얘야.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이 시시하고 헐렁한 농담 같았다.


아버지의 수의를 꼭 조였을 때, 그제야 여자는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했다.


여자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헐렁함'과 '조임'이란,

너무 흔해 빠진,

단 두 개의 심상만으로 빚어낸 현실.


움직임 없는 텍스트가 

유독 소설 속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소설가가 있기 때문이다.


박성원.


내 주위에 숱하게 널린 것들에서  

그의 눈에 뜨인 것들을 조각으로 꿰면,

내가 거한 작은 우주가 손에 만져질 것 같다.


내 눈에도 보이도록.


나는 무엇이 헐렁한가.

나는 무엇을 조여야 내 결핍의 민낯을 조우할 것인가.


아버지의 수의를 꼭 조여야만 하기 전에,

조일 것을 찾아내고자.


땡큐.


 

여자가 간선도로를 빠져나온 시각은 오후 세 시 십구 분이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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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소멸 -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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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럴 줄 알았다. ‘사물‘에 삶이 있을 줄 진즉 알아봤다. ‘정보‘를 지향했다. 정보가 많으면 유복할 줄 알았다. 정보의 즉각성과 휘발성은, 못본 체했다. 정보에 의해 사물이 소멸되는 중이다. 사물이 품은 실재와 시간이 아울러 소멸되는 중이다. 잊지 말자. 정보보다, 사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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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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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목을 매 죽은 이후로 내겐 두려울 게 없었다.

그때 나는 열아홉 살이었고,

말린 단풍잎을 책갈피로 쓰던 여고생이었고,

오 남매 중 막내였지만,

침착하게 부엌칼을 가지고 와서 아버지의 목을 죄고 있는 끈을 잘랐다.

시체가 된 아버지의 머리가 마룻바닥에 부딪치는 순간

이제 가족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겁나는 일이 없었다.

그보다 더한 일은 없을 테니까.


버스 정류장 근처 꽃집에서 나를 위해 꽃다발을 샀다. 


축의금이나 조의금도 섭섭지 않게 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오빠들은 집을 떠났고,

나는 어머니와 둘이 남았다. (10p, 여름방학 중에서)


아버지가 목을 냈고 그 끈을 잘랐는데

퇴직을 했고

그 때문에 꽃집에서 나를 위해 꽃다발을 사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오빠들은 집을 떠났다...


완전히 상관없는 사건들의 혼재가 덩어리로 이어진다.


의식의 흐름.

과거의 경험에 뿌리를 둔 의식이 자발적으로 튀어 오르는.


그 돌연함에 신기하게도 어긋남이 없다.


잘 섞인다.


윤성희, 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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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하는 마음 - 김혜리 영화 산문집
김혜리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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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 작가의 책은 챙겨 본다. 글 잘 쓴다...그런 건 잘 모르겠다. 책을 낼 정도면 글을 잘 쓰겠지. 좀 당연한 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나는 영화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 그의 책을 읽는다. 그는 영화를 많이, 누구보다 많이 보는 사람 같아서. 그것만으로도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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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개의 모노로그 오늘의시민서당 50
최형인 지음 / 청하 / 199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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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을 위한 연기 대본 연습집이다.


제목 위에 이렇게 붙어 있다.


'배우,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난 배우는 아니다.

엄마가 배우다. 

단역배우.


그래서 엄마 드리려고 샀는데,

나도 해당된다.


난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픈 인간이니까.


그래도 대본 연습집이니까,

외워서 연기를 해 볼 참이다.


어느 책이더라...


가수 백지영이 이 책의 문장들을 외워서

온 마음으로 연기 연습을 해보고 

지금의 그녀만의 감정과 감정을 품을 수 있었다는.

(최근에 읽었는데 어떤 책인지 기억이 안남 ㅠㅠ)


배우들은 진짜 대단.


한 줄 외우기도 이리 힘든가 그래.


포기하고, 그냥 보면서 읊어봤다.

온 마음으로 감정을 실어.

내 딴에는.


이 문장이다.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난 배우도 아닌데,

단역배우의 딸인데,


뭐지...


눈물이 나려 했다.


자기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이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존재,

체온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세번째 읽을 때 여기서 코끝에 쫘악, 핏기가 모이는 것 같더니


마지막 줄에서 


비 한줄기가 내리고 나면 불행한 증오는 서서히 걷히고


여기서 운에 습기가 촉촉.


바깥에 비가 내리고 있기 때문...일 거야.


순전히, 말이지.


이 비가 그런 비면 좋겠네.


불행한 증오를 서서히 걷게 해 주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부터 미워하지 않게 해 주는.


와씨,

소설 쓰지 말고 배우할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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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娛 2022-09-13 1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故 신영복선생님 이글 읽기전에는 여름이 살기 좋다고 했지요

젤소민아 2022-09-13 21:00   좋아요 0 | URL
옆사람을 증오하게 만드는 여름...사실, 체온이 꽤 뜨거운 거드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