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집을 하루에 한 편 읽고 있다.

숙제하듯 하고 있다. 좀 무겁게, 좀 의무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끼는 것도, 배우는 것도 많다.

어떻게 모든 단편마다 배울 수 있는 무언가의 종류가 다른지.


단편소설의 '천재'란 별칭이 괜히 붙을 리가 없지.


오늘치 숙제는 <당신이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


이 소설의 키워드는 단연, '흥정'이다. 

평화로운 시골 농가에 나타난 한 남자.

노부인은 그를 상대로 생을 건 '흥정'에 나선다.


흥정의 '품목'은 노부인의 딸, 


흥정의 모습은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다분히 흔하다.

노부인은 그에게 딸을 시집 보내고 그는 자동차를 얻는다.

세상 여느 흥정답게 양쪽은 서로 얻는 것이 분명하게 있다.


흥정은 우리 삶의 흔한 경제 활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혼의 타락이 개입될 소지가 다분하다. 

흥정에는 체질적으로 '이득'이란 게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득은 신중해야 한다. 사악할 수 있어서다.


무릇, 무언가를 얻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내놓는 행위가 전제되거나 개입되어야 

공평하다. 그게 우주의 진리여야 한다. 부디 그러길 나같은 소시민은 바라마지 않는다.

그 믿음마저 없다면 오늘의 이 고단함이 너무 남루하지 않은가.


이 소설에서 세상 흔해 빠진 '흥정'이 대단히 잔인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버림'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흥정의 주체인 노부인과 그(사위)는 어떤 존재를 버린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주체적으로 흥정에 참여하지 않는 존재, 딸이다.


딸이 흥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언어'다.

딸에게는 언어가 없다. 말을 하지 못한다.

남자는 미래의 아내에게 흥정과 하등 상관 없는 '새'라는 단어를 가르친다.


장밋빛 얼굴의 뚱뚱한 처녀 루시넬은 어디나 그를 따라다니며

"스에에 스에에"하고 박수를 쳤다. 노부인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은근히 흡족해했다. 사윗감을 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204p


노부인과 남자의 흥정은 '언어'로 이루어진다. 

두 사람은 말할수록 타락한다.

노부인의 딸은 말하지 못함으로 순수한 영혼을 간직한다.


이때껏 이 아이랑 이틀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데.


(210p)


노부인의 이 대사를 반복해서 읽었다.

많은 상황과 사정과 감정이 겹친 대사.


한번도 떨어져 본 적 없는 딸을 떠내 보내는 어미의 서운함.


그 한편에 도사린 다른 마음.

한번도 떨어지지 못했던 장기적인 돌봄으로부터 해방감.


시프틀릿 씨가 차를 움직였고, 부인은 손을 떼었다.


(210p)



딸을 돌보는 일에서 "손 뗀" 노부인은 발걸음도 가볍게 소설에서 퇴장한다.

소설에서 사라졌으나 사실, 노부인은 소설 속으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간다.


소설은 이래야 한다.


소설에서 퇴장했는데,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 아우라가 걷히지 않아야 한다.

퇴장 후에도 그 인물은, 그 뒤로 이어지는 문장을 따라 내내 걸어가야 한다.


독자는 눈으로는 노부인을 보내지만, 머리로는 노부인을 포박한다.


타락한 영혼의 소유자일 것이란 의심을 충분히 할 수 있으면서도

급기야 자기 구제를 선택한 이기적인 어미로.


한편, 남자는 흥정에서 자동차를 얻는다.

말 못하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내는 그로서는 원치 않는 덤이다.


돌봄에 지친 노부인이 딸을 버리듯 시집 보낸 것처럼,

남자는 인근 소도시의 식당에서 아내를 버린다.


하느님의 천사 같네요.  (211p)


루시넬을 하느님의 천사로 보는 식당 청년과 달리,

남자는 아내를 부담스러운 '히치하이커'로 치부한다. 


남자는 아내를 버리고 차를 몰아가다가 "동승객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코너의 미학은 바로 이토록 '잔인한' 아이러니에 있다.


그에게 흥정으로 얻은 아내는 동승객이 될 수 없고, 

길 가다 마주친 낯선 사람은 동승객이 될 수 있다.


설상가상, 남자가 흥정에서 얻고자 한 것이 아내가 아니었다는 게 드러난다.


그때, 눈에 띈 도로 표지만.


The Life You Save May Be Your Own

(당신이 구한 생명은 당신 자신의 것일 지 모른다)


이 표지판은 남자에게 무엇을 경고하고 있나?

남자가 노부인과의 흥정에서 '구한' 것은 무엇인가?


자동차는 얻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더 큰 걸 잃었다.


자신의 영혼-.

그가 그렇게도 간절히 찾아 헤매던 '정직한 '영혼.


그의 손에 쥔 자동차는 몸을 이동해 줄 뿐, 영혼을 어디로도 데려다 주지 못한다.

자신이 한 말과 정반대로.


육체는 집과 같습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하지만 정신(영혼)은 자동차와 같습니다. 언제나 움직입니다. 언제나...


(208p)


그는 아내를 버리고, 다른 타인을 동승객으로 꿈꾸며, 도로를 달리지만, 

길의 끝에서 그가 만나는 것은 자유이긴 커녕, 폭우의 심판이다.


자기 구제를 위한 이기적 흥정이야말로, 

인간을 구원에서 가장 멀어지게 하는 조치임을 오코너는 보여준다.


표지판은 단순히 교통 안전을 경고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영혼에게 마지막으로 건네는 계시였다.


앞서 퇴장했던 노부인은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으나

여기서 그 우울한 그림자의 꼬리가 밟힌다.


오랜 돌봄에서 해방되어 자기 구제를 실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부터는 유일한 혈육이자 동거인이었던 딸을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내몬 죄책감을 감당해야 하는. 


고로, 두 사람은 흥정에서 양쪽 다 참패했다.


그렇다면 흥정에서 배제된 딸은?

 

비록 여전히 말을 하지 못해도, 그냥 그런 채, 

자신을 '하느님의 천사'로 보아준 식당 청년에게서

새로운 돌봄을 받으며 

그 삶의 동승객이 되어 소설 뒤에서 내내 걸어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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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8-24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젤소민아님이 좋으시다니 저도 곧 읽어보겠습니다. 사놓고 안읽고 있었습니다 ㅋ

젤소민아 2025-08-24 13:25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반가워요~. 오코너를 왜 단편소설의 천재라고 하는지 알겠어요. 제가 감히 천재를 알아볼 수준은 아니나...길지도 않은 모든 단편에서 어떻게 이렇게 배울 점이 많을까요. 정말 놀라운 소설가여요. 꼭 읽어 보세요~.

그레이스 2025-08-24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다는 소문이!
저도 사놨죠
아직 못읽었지만 ㅎㅎ

젤소민아 2025-08-25 12:21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같이 읽어요~~그레이스님 후기도 몹시 궁금합니다!
 
존재의 물결과 타자의 문학 - '우리가 모르는 세계'의 정치와 문학
나병철 지음 / 소명출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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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주 존경하는 이름 같은 두 분의 학자가 있다. 병자, 철자. 병철. 한병철. 나병철. 이름이 곧 개념이요, 이론인. 기표와 기의가 합일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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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영감노트 - 읽고 쓰는 모든 사람을 위한 고전 수업
기무라 류노스케 지음, 김소영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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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가 직접 새긴 서브텍스트,라고 제목을 붙였어도 매력적이었을 듯. 셰익스피어 문학 행간을 읽는 연습. 대가들의 대가의 서브텍스트 엿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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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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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집을 일주일 전부터 한편씩 일고 있다.

같이 읽기로 했다. 글쓰는 사람들과.


매일 한편씩 읽고 단톡방에서 5줄의 후기를 나눈다.


오늘치 숙제는 <이녹과 고릴라>




어제 읽은 <행운>도 기가 막혔는데, 이건 또 다르게 기막히고 코막히고.

놀라움의 연속, 경이의 연쇄.


플래너리 오코너를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정도에서 

묵혀 뒀다는 사실에 땅 치고 후회했다.


오코너의 모든 단편마다, 그 어떤 소설 관련 수업이나 작법서에서 접하지 못했던,

혹은 살짝만 접했던, 혹은 내가 이해 못하고 넘어갔던 무언가를 배운다.


기회 되면 뭘 배웠나, 하나하나 풀어가 볼 참이다.

알라딘 서재란 것을, 말 그대로 '서재'의 기능으로 활용해 볼까 한다.


누구한테 보여주는 글이 아니라 나중에 내가 다시 보기 위해 써놓기.


<이녹과 고릴라>


다른 사람에게 돋보이고 싶은 인물, 이녹은 그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그 욕망을 이미 이룬 인물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인물에 자신의 욕망을 위임하고자 한다. 바로 서커스단의 고릴라. 사람들이 고릴라, '공가'를 보고 환호하는 걸 목격한 이녹은 그 고릴라가 되고자 한다.


자신의 욕망을 직접 수행하지 못하고, ‘대리자’를 찾은 것이다. 


말하자면, 욕망의 외주화(outsourcing of desire)-.


이녹은 스스로 욕망을 실현할 능력이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이미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존재에게 자신의 욕망을 위임한다. 


서커스의 고릴라가 바로 그런 '욕망의 대리자'라고 철석같이 믿어 버린다.

여기까지는 아주 낯설지는 않다.

욕망을 타인에게 위임하는 소설 속 인물은 숱하게 많았으니까.


욕망의 위임자 설정은 물론, 라캉과 지라르와 닿아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인간은 욕망을 추구함에 매개를 거친다-.


     


그런데 문제는 욕망의 주체인 이녹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 혹은 매개인 고릴라에게 있다.

(물론, 이녹의 입장에서)


그 고릴라가 실재의 위엄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탈을 쓴 인간이란 사실!


신비로운 우상으로 보였던 고릴라의 가면이 벗겨지면서

욕망은 허무로 드러나고 만다.


그러나 이녹은 허무할 새가 없었다. 더 나아가기로 한다.

그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녹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허무'와 '비탄'이 담보된, 타자를 매개로 한 욕망을 자신에게로 되돌릴 기회가.


바로, 고릴라에게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던 순간이다.


이제 그의 앞에는 아이가 두 명밖에 없었다. 첫 번째 아이가 악수를 하고 비켰다.

이녹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다. 이녹 앞의 아이가 악수를 마치고 비켜서자

그는 유인원을 마주했고 유인원은 자동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이녹이 그 도시로 와서 처음으로 잡아 본 손이었다. 

그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잠시 손을 잡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뒤 더듬거리며 말했다.


"내 이름은 이녹 에머리야. 나는 로드밀 소년 성경 학교에 다녔어.

지금은 시립 동물원에서 일해. 네 사진 두 개를 봤어. 

나는 겨우 열여덟살이지만 벌써 시립 기관에서 일해. 

우리 아빠가 나를 여기로..." 


거기서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156p)


그러나 이녹이 시도한 정체성의 위임은 곧바로 좌절되었다.


작가와 독자, 모두 그걸 정확히 인지했다.

이녹만 빼고. 

이녹의 소외와 배제는 여기서 본격화, 아니, 이전보다 더 강화된다.


고릴라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거칠고 냉담하기 그지없다.


“저리 꺼져!”


이녹은 욕망을 대신 짊어 줄 타자가 무력하다고 인지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이녹은 욕망의 위임을 급기야 '모방'으로 전환한다.


욕망을 자기화하지 못하고 고릴라 탈을 훔쳐 쓰는 것으로 정체성을 모방하고자 한다.


잘 될 리가 없다.

그는 드디어 고릴라가 되어 사람들 앞에 서지만 결과는 참혹하다.


자신을 본 사람들에게서 돌아온 반응은

환호가 아니라 공포.

수용이 아니라 추방.


이녹이 욕망했던 '우상'이 '괴물'이 되는 순간.


어찌 보면, 우린 욕망하는 순간, '소외' 혹은 '배제'를 품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별처럼 빛나고 돋보이는 존재 역시 어떤 각도에서 보면 '배제'를 경험하는 것 아닐까?


돋보임은 곧 시선의 집중이고, 시선은 언제나 구경거리와 낙인을 동시에 만든다.
사람들이 환호하는 순간에도 보라.


그 존재는 무대 위에서 고립되어 있다.


여기서 불현듯 끌어들이게 되는 기 드보르의 사유.


수동성은 분리의 본질적인 조건이다. 

“원자화된 군중” 속에 “고립된 개인”은 스펙타클을 필요로 하고, 

스펙타클은 개인의 고립을 강화시킨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 어떤 이는 빛나지만, 어떤 이는 괴물이 된다

아니, 괴물로 비친다. 


이녹처럼.


생각해 보면,

욕망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타인의 시선과 환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환상에 모든 것을 위임할 때, 주체는 자기 자신을 잃는다.


플래너리 오코너가 독자에게 남기는 메시지는 분명해 보인다.


욕망을 위임하는 자는 결코 그 욕망을 성취하지 못하며,

결국 자신의 (고릴라) 가면 속에서 길을 잃는다는.


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 자문했다.

내 욕망은 좋은 소설을 쓰는 것이니까.


그 욕망이 내 것인지, 타자의 것인지, 

오늘 하루는 곰곰히, 아주 곰곰히 생각해 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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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다가, 뭉클 - 매일이 특별해지는 순간의 기록
이기주 지음 / 터닝페이지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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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야, 모야...그리기도 전에, 뭉클했다. 수채화로 드러난 골목들이 왜 이렇게 짠한지. 제목으로 한 저자의 약속이 지켜질 것 같다. 그리다가 뭉클할 것 같다. 보는 순간, 샀다. 그릴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뭉클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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