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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8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령은 커피 통 뚜껑을 열고
커피가 한 숟가락밖에 남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7p)
소설은 첫 문장에서 '얼굴'을 보여준다.
소설이 어떻게 생겼는지, 인상을 먼저 보여준다.
대개가 그렇다. 꼭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런데 첫 문장에서 소설의 얼굴을 얼핏이라도 볼 수 있다면 좋다.
생각해 보라.
소개팅(요즘도 이런 단어를 쓰는 지는 모르겠지만)하면서
얼굴도 안 보고 그 사람에 관해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호기심이 일지 않는다.
소설을 읽으리라 결심하고 첫 장을 펼친 독자에게 호기심을 주지 못하는 소설은...
소설, 자신도 힘들고 독자는 더 힘들게 한다.
아무리 난해한 소설도 호기심은 주게 마련이다.
도대체 이 난해함의 끝은 어디인가, 란 호기심조차 주게 돼 있다.
[커피 통 뚜껑을 열었는데 커피가 한 숟가락밖에 남지 않았다]면
이 소설의 얼굴은 '결핍'의 인상이다.
이 소설은 '결핍'에 관한 이야기구나.
대령은 '결핍'의 인물이구나.
독자는 대령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나가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대령이 결핍에 무너지지 않고 극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될 것이다.
그러려면 대령을 알아야겠다.
다음 단락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자신만만하고 순진한 기대감에 부풀어
화덕 옆에 앉아 커피가 끓기를 기다렸다.
(7p)
대령은 자신만만하고 순진한...캐릭터
가 아니라 그의 '기대감'에 관한 설명이다.
그의 기대감이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기다린다'가 더 중요해 보인다.
대령은 아무래도 '기다리는' 사람일 듯싶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내전이 끝난 이후 오십육 년 동안 대령은 기다리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7p)
이제 우리는 '대령'의 이름도 나이도 뭣도 모르지만
그에 대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보했다.
그는 기다린다. 무엇을?
이제부터 우리는 '무엇'을 찾아 소설로 기꺼이 뛰어들 작정이다.
아내는 굽고 딱딱한 등뼈 위에 얹힌 보잘것없는 하얀 연골에 불과했다.
호흡 곤란 때문에 의문문을 긍정문으로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8p)
대가...답다.
대령이 기다리는 '무엇'을 향해 가는 동안 우리는 대령의 아내를 만나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 '무엇'을 범상치 않게 맞을 수 있다.
대령 혼자서 소설의 목적을 이뤄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대령의 기다림에는 필시 조력자가 있을 터다.
하얀 연골에 불과하고 의문문을 긍정문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아내.
대령에게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할 것처럼 그녀는 병약해 보인다.
대령에게는 어째 '쓸모없는' 존재 같다.
소설에서 대개 그렇듯, 독자에게는 적잖이 유용할 것만 같고.
하얀 연골에 불과하지만 의문문을 긍정문으로 탈바꿈시킬 정도라면야...
이 문장의 서브텍스트는 다층적이다.
그 중 하나를 벗겨보자면.
생에 대한 수많은 의문을 외력에 의해 받아들어야만 하는
'긍정'이 강요화된 무력의 극치.
자발적, 타발적 모두 다.
아내는 아무래도 대령에게 조력하기보다는 대령에게서 조력을 받아야 할 인물 같다.
모기장 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만 봐도.
아내는 남편의 신발을 눈여겨보았다.
"그 신발은 이미 버릴 때가 다 되었네요."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계속 에나멜 구두를 신는군요."
대령은 갑자기 우울해졌다.
"마치 고아가 신는 신발 같소." 대령은 투덜거렸다.
"이 신발을 신을 때마다 고아원에서 도망친 느낌이라오."
"우리는 우리 아들의 고아예요." 아내가 말했다.
아, 솔직히 말하자.
나는 이 문장을 읽기 위해 이 소설을 읽은 느낌이다.
아니, 이제껏 읽은 모든 소설이 그런 느낌이다.
우리는 우리 아들의 고아예요.
과연, 나만 이 문장에서 멈춰 한참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아마 많은 '우리'가 그랬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의 소명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것의 어떤 의미가 됐든지간에 그런 거라 믿는다.
마르께스는 '고아'의 의미를 새로이 발견해 우리에게 선사했다.
'부모가 없는 아이'에서 '자식이 없는 부모'로.
부모(어른)도 아이가 될 수 있다.
소설 속에서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어떤 이유로든 자식이 '소거'된 부모는 자식의 고아일 수 있다.
'없음'이란 '부재'로 인해.
마르께스의 '고아'는 기존의 통상적인 '부재'와 '결핍'이란 의미에 한 가지를 더 얹었다.
(대령의) 기다림.
그러고 보니, 그렇다.
'고아'는 기다림이다.
'결핍'과 '부재'를 '있음'으로 치환해 줄 대상을 기다리는.
그렇다.
'고아'는 우리인 것이다.
우리 중에, 과연,
무언가를 기다리는 '고아'의 상태가 아니라고 항변할 자신 있는 사람이 있는가 말이다.
소설의 중간도 가지 못했는데,
나는 이미 '대령'이 되었다.
당신은 어떤가.
여기서부터 나는 '우리'란 말을 쓰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어디서 난 거요?"
"수탉한데요." 아내가 대답했다.
"아이들이 옥수수를 너무 많이 가져오는 바람에 수탉이 우리와 함께 나누어 먹기로 했어요. 이런 게 인생이에요."
(60p)
죽은 아들이 기르던 수탉은 죽어 무력해진 주인,
그 주인에 의해 '고아'가 된 주인들에 의해 무기력해진 채
침대 다리나 화덕 다리에 매인 신세다.
그 수탉에게 아이들이 가져다주는 옥수수가 대령과 아내를 먹인다.
그리고 대령과 부부는 '그게 인생'이라고 한다.
"인생이란 지금껏 발명된 것들 중에서 최고라오."
(61p)
수탉에게서 나눠 받은 옥수수 죽을 먹고 대령과 아내는 그때까지 가지 않고 있던
죽은 사람의 집에 조문을 간다. 그리고 시계를 팔 궁리를 모색한다.
그리고 대령은 드디어 수탉을 팔 결심을 한다.
소설은 전환을 맞는다.
링 한복판에 무방비 상태로 혼자 있는 수탉을 보았다.
며느리발톱을 누더기로 싸매고 있고, 발을 떠는 것으로 보아 두려워하는 게 분명했다. 상대는 칙칙하고 창백한 수탉이었다.
(중략)
수탉이 전광석화처럼 깃털이 펄럭이더니 발로 공격하고 목덜미를 물었다....
그의 수탉은 공격하지 않았다. 상대가 공격할 때마다 물리치고는 정확하게 똑같은 자리로 되돌아왔다. 이제 수탉은 발을 떨지 않았다.
(84p)
소설의 절정이다.
소설은 이미 결말을 맞은 느낌이다.
대령도 이제 더는 발을 떨지 않을 것 같다.
더는 기다리지 않을 것 같다.
대령의 기다림은 완료될 것 같다.
나는 그걸 확인하고 싶다.
결말이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먹죠."
아내는 이렇게 물으면서 대령이 입은 티셔츠의 칼라를 움켜쥐고 힘껏 흔들었다.
투계, 투계의 투영이다.
대령과 아내는 '투계'를 치른다.
"말해봐요. 우리는 뭘 먹죠."
대령은 이 순간에 이르는 데 칠십오 년의 세월이, 그가 살아온 칠심오 년의
일각일각이 필요했다. 대답하는 순간 자기 자신이 더럽혀지지 않았고 솔직하며 무적이라고 느꼈다.
"똥."
(94p; 소설의 마지막 문장)
나는 앞으로 책을 몇 장 넘겨 이 문장을 찾아 다시 읽는다.
수탉이 전광석화처럼 깃털이 펄럭이더니 발로 공격하고 목덜미를 물었다....
그의 수탉은 공격하지 않았다. 상대가 공격할 때마다 물리치고는 정확하게 똑같은 자리로 되돌아왔다. 이제 수탉은 발을 떨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의 고아다.
내게 무언가는 결핍되고 부재한다.
나는 무언가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나의 무언가는 무엇인가.
내 기다림은 완성될 것인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대령처럼 더는 발을 떨지 않을 수도,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읽었으니
이 소설을 읽기 전과 달리,
나는 앞으로 발이 떨릴 때면
의식적으로나마,
수탉이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