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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 쓴 수기 ㅣ 창비세계문학 10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근식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평점 :
이럴 줄 알았다.
1865년에 쓰인 소설이,
160년 후를 내다보고 있을 줄 알았다.
'걸작'은 그럴 줄 알았다.
'거장'은 그럴 줄 알았다.
그릇된 구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상식과 과학이 인간을 완전히 재교육해
인간의 본성을 정상적으로 통제하는 날이 오면 "인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반드시 터득하게 되고, 자발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행위를 중단할 것이며,
정상적 이익을 고의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여러분은 여전히 확신하고 있다.
더욱이 그때가 되면 여러분은 "과학이 직접 인간을 가르치기 때문에 인간은
의지라든가 변덕 따위와 같은 감정을 실질적으로 모를 뿐 아니라 앞으로도 모르게 될 것이며, 인간 자신은 피아노 건반이나 오르간의 음전에 불과할 따름이다.
더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 자연 법칙이 있는 관계로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소망이 아니라 자연 법칙에 의해서 저절로 행해지게 된다" 라고 말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자연법칙들만 발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일도 없어져 앞으로는 살아가기가 무척
용이해질 것이다. 이러한 자연 법칙에 의거해 수학적으로는 마치 로그 표에 의거하듯 모든 인간의 행동은 십만 팔천 가지로 분류되어 인간의 행동 목록으로 등록될 것이다. 그보다 더 좋은 경우로는, 요즘의 백과사전 용어를 정리해 놓은 것과 같은 교화 서적이 출판된다는 것이다.
그 서적에는
모든 것이 자세하게 계산되어 있고 설명되어 있어서,
이 세상에 사건이나 모험 따위는 더는 있을 수 없게 된다.
(44p)
자연 법칙에 의거해 수학적으로는 마치 로그 표에 의거하듯 모든 인간의 행동은
십만 팔천 가지로 분류되어 인간의 행동 목록으로 등록될 것이다.
160년이 지나 인간은 인간의 성격 유형을 십만 팔천 가지도 아닌,
딱 16개로 분류했다.
2025년을 사는 인간은 이름 바로 뒤에 네 개의 영어 알파벳 대문자로 조합된
성격 유형을 달고 다닌다. 그리고 그것의 중요성은 점차 이름의 중요성을 앞지르고 있다. 이미 앞질렀는지도. 그 사람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INTP(논리적인 사색가형)'이었던 건 또렷이 기억나니까.
모든 것이 자세하게 계산되어 있고 설명되어 있어서,
이 세상에 사건이나 모험 따위는 더는 있을 수 없게 된다.
전화기가 있는 집을 떠나면 연락할 길이 없어
사전 약속 없이 길거리에서 아는 이를 만난다는 건 '사건'이었다.
아는 이가, 마침 이쪽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만한 인물이라면 사건은 커졌다.
택시 기사들은 그 지역의 곳곳에 통달해서 택시를 타면
뒷좌석의 손님은 안심한 나머지 잠들곤 했다.
지금의 택시는 나 만큼이나 지리를 모른다.
뒷좌석에서 잠들었다간 집에 못 갈 수도 있다.
모든 건 '목록'으로 등록된 기계가 해치운다.
우리는 그저 기계를 믿고 기대면 된다.
물론, 기계 오작동이 발생하는 경우, '사건' 아닌 '참사'를 각오해야 하지만,
뭐 그 정도야. 어쩌다가, 정말, 아주 어쩌다가 생기는 일인걸.
모든 것이 자세하게 '계산'되고 '설명'되어
모험이 필요 없어진 세상.
이 말은
어떤 일이 펼쳐질지 다 알 수 있는 세상,과 같은 문장이다.
앞으로 펼쳐질 어떤 일은 이미 모든 게 데이터화 되어 있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다 알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기대감'을 잃었다.
설렘을 잃었다.
모든 게 계산되고 설명되지 않았던
160년 전의 소설을 읽다가 나는,
오늘을 본다.
오늘 속에 떨어진 설렘을 한 조각 줍는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