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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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것이 틀림없다. (9p)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요 며칠 새, 내가 아침을 시작할 때의 느낌과 같다.

요 며칠 새, 누군가가 아침을 시작할 때의 느낌과도 같을 것이다.


우리는, 적지 않은 경우 이런 느낌으로 아침을 맞지 않는가.


누군가 나를 중상모략한 것이 틀림없다.


요 며칠 새, 몇 년에 걸쳐 잘 지내던 누군가의 태도가 바뀌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와 말씨와 표정이 사뭇 달라졌다.


내가 뭘 잘못했나?


그런 생각도, 물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지난 시간을 가져와 헤집어 봐도 걸리는 게 없다.

전혀 없지는 않으나 지난 시간 속에 그냥 그렇게 다 묻혀버릴 만한 것이었고

그러기에 묻혔고

그렇게 따지자면 그쪽도 헤집어 나올 게 많다 뭐.


그렇다면 누군가 나를 중상모략한 게 맞지 않겠나.


요제프 K와 나의 어느 날, 아침이 같아서 '빙의'는 아주 쉽게 이루어졌다.


어허....

그런데 죄목을 모른다.

중상모략당한 죄목을 모른다.


이것도 같다.

같아진 김에, 이제부터 나는 요제프 K다.


나는 체포를 당한다.

그것도 침실에서. 체포하러 온 두 감시인은 내 아침을 뺏어 먹는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을 뺏어먹은 바로 그 '죄목'으로 두 감시인은 더 높은 감시인에게 매질을 당한다.

둘 중 하나가 내게 애걸한다. 구해주세요.


날 체포할 땐 언제고, 구해달라니.


나는 '뇌물'을 먹여 그들을 구해볼까, 잠깐 생각한다.

그러나 '답'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가 희생을 감수할 생각이었다면 K 자신이 옷을 벗고 감시인들을 대신해 태형리 앞에 나서는 편이 더 간단했을 것이다. (108p)


그 다음 날에도 감시인들이 K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109p)


K(나)는 매 맞는 감시인들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뇌물을 주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방도도 생각하지 못한다.


K와 나는 계속해서, 아주 많이 비슷하다.


엄청나게 뭐가 마음에 걸리는데 뭘 해야 마음에 좀 덜 걸리는지 '방법'을 잘 모르는.


K가 나와 이렇게 비슷하다면, 

필시 나도 지금 '소송' 속에 있는 중인지 모르겠다.

카프카가 말하는 '소송'은 

(당연하겠지만) 단순히 법적 다툼을 말하는 것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중상모략을 당했는데

죄목도 모르고 체포를 당해서

법정에 나가야는데

그러면서 직장(은행)도 다닐 수 있다....


카프카가 말하고 있는 '소송'은 뭘까.

나는 지금 어떤 소송 속에 있는가.


뜬금없이 '모자'가 마음에 걸린다.


소설 속에서 잊을만 하면 모자가 등장한다.

체호프가 총이 등장하면 반드시 발사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카프카는 '모자'를 반드시 '발사'할 것이다. 


(예전에 읽었지만 거의 잊고, 재독하며 중반까지 읽은)

아직은 인물들이 모자를 제대로 머리에 쓰지 못한다.


다 읽고 나서, 

모자가 발사된 지점에 당도했을 때 내가 겪고 있는 '소송'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기를.


헤매고 있는 모자를

모쪼록 내 머리에 안착시킬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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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4 0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24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24 0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24 0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24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계철학사 세트 - 전9권 세계철학사
이토 구니타케 외 엮음, 이신철 옮김 / 비(도서출판b)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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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안에 구매하고야 말리라. 일본인 철학과 교수들의 협작. 이책과 ‘홀로‘ 위업을 이뤄내신 이정우님의 같은 제목의 역작을 나란히 놓고 독파할 작정이다. 옮긴이가 철학통이라 더 신뢰가 가는데, ‘일본어‘에 관한 이력이 보이지 않아서...이런 걱정을 출판사에서 좀 달래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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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ooks 2023-05-23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옮긴이 이신철 교수의 일본어 이력으로 <현대철학사전>(전 5권 세트)만 참조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이신철 교수의 영어, 독어, 일어, 라틴어 등등 두루 능통하며, 그 이력을 증명했다고 생각됩니다.(도서출판 b)

젤소민아 2023-05-24 00:26   좋아요 1 | URL
‘도서출판b‘의 출간히스토리를 살펴보니 철학인문교양서 전문 출판사 같습니다. ‘세계철학사‘나 ‘철학대사전‘같은 콘셉트로 국내저작도 활발히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철학‘이란 주제를 심도있게 다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세계철학사 세트도 그렇고 언급하신 ‘현대철학 사전‘도 그렇고...기획/편집/번역에만도 수년 걸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들인 품이 ‘시간‘만은 아니겠죠. 설명을 대하니 좋은 내용, 좋은 번역 기대됩니다. 좋은 책인만큼, 세트인만큼 가격 부담이 있어..ㅎㅎ 두 달안에 구매계획입니다. 읽고 나서 더 자세한 리뷰를 쓰겠지만, 출판사와 역자분의 노고에 미리 감사 올립니다. 댓글로 설명도 감사드려요~.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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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에는 결말과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황폐한 공동묘지에 있는 무덤 주위에는 전에 뉴욕에서 함께 광고일을 하던 동료 몇 사람이 모여 있었다. (9p)


주인공은 이미 죽는다.

아니, 죽었다.

소설 시작부터.


그러니 이 소설은, 이미 죽은 주인공의 '과거'를 따라가는 이야기일 것임을

진즉에 예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의 과거를 궁금해해야 하는 이유도 주어져야 할 것이다.


첫 페이지에서 일찌감치 적지 않은 정보를 건질 수 있었다.


첫번째 결혼에서 생겨나 이제 중년이 된 두 아들은 아무래도 그들의 어머니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칭찬할 만한 면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지저분한 면에 관해서는 많이 알고 있었다.


1. 그는 이혼했고 그 이후로 한 번 더, 혹은 두번, 세번, 그 이상의 결혼을 더 했을 수 있다.

2. 두 아들이 중년이면 그는 노년이다.

3. 두 아들은 아버지의 자식은 아니었다(물론, 심적으로)

4. 그는 지저분한 면이 있었다.

5. 그것도 아주 많이.


어떤가.

그의 과거가 궁금해지지 않는가.


나는 아주 궁금하다.


'지저분한 면'이 많이 많은 사람의 장례식에는 어떤 사람들이 올지,

그들은 무슨 말을 할 지.


지저분한 면이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필립 로스라는 거장은 우리에게 무엇을 건네줄지.


뜻밖에도,

지저분한 면이 많았던 사람의 장례식에 온 사람들은 지저분한 면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훌륭했으며 그를 잃은 것이 얼마나 아쉬운지 이야기했다.


그렇게 그는 폭 5미터 깊이 12미터 크기의 낙원에 묻힌다.


몇 분이 안 되어 모두 가버렸다.

지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우리 종이 가장 좋아하지 않는 활동으로부터 떠나가버렸다. 그리고 그는 뒤에 남았다. 물론 다른 누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비통해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거나 자기도 모르게 안도했다. 또는 좋은 이유든 나쁜 이유든 진정으로 기뻐하기도 했다.


그렇게 혼자 남은 그.

그로부터 그의 과거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늘 한 쪽 주머니에 루페, 다른 쪽 주머니에는 담배를 넣고 다녔기 때문에,

우리는 루페를 수의 안쪽에 꽂아두었고. 동생이 이렇게 말하던 게 기억나오.

'사실은 아버지 눈에 끼워놓아야 되는데'


그가 생전에 아버지를 잃었을 때 한 말이었다.


사실은 아버지 눈에 끼워놓아야 되는데.


보석상을 하던 아버지가 보석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늘 애용하던 루페.

그 루페를 아버지 수의 안쪽이 아니라 아버지 눈에 끼워놓아야 되는데.


이 한 마디가 이 소설에서 갖는 무게감은 실로 대단하다.

사실, 이 소설(중편이라 얇다)의 끝까지 이 한 마디가 끌고 간다.


아버지의 눈

루페


아버지의 눈,은 '구멍'이다.

아버지는 죽어 땅 속 '구멍'에 묻혔다.


아버지가 땅 속 구멍에 묻혀 그 위로 흙이 덮였듯,

주인공이 병들어 병원에 입웠을 때 그는 살아서 같은 경험을 한다.


보조 의사는 상처를 낸 곳을 압박하고, 

지혈을 위해 사타구니에 모래주머니를 올려놓았다. (78p)


그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그는 몸에 구멍을 뚫는다.


그들이 일을 시작하여 사타구니를 마취시키고 동맥 카테터 삽입을 위해

피부에 구멍을 뚫는 순간부터...

(78p)


말하자면, 그는 죽지 않은채 아버지의 죽음을 그대로 사는 셈이다. 


필립 로스가 하려는 말의 진의를 알 것 같다.


우리네 삶이 죽음에서 뭐 그리 멀리 있겠느냐고.


죽음


이 두 단어는 결국,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살면 죽게 돼 있고, 죽으면 또 살게 돼 있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 종이 한장의 얄팍한 차이를 지구처럼 무겁게 느끼며


되돌아보고 (네가) 속죄할 수 있는 것은 속죄하고, 

남은 인생을 최대한 활용해....

(177p)

.....보라고.


결말에서 그는 묘파는 사람을 만난다.

자신이 묻힐 곳에 찾아간다.


이 구멍은 유족을 위해서도 제대로 파야하고,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제대로 파야 합니다. (183p)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188p)


'구멍'으로.


어떤가 말이다.

또 한 명의 '에브리맨'인 당신.

당신의 구멍은 안전한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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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5-16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책에서 읽은 듯한, 인간은 자기가 누울 땅만 필요하다, 는 것이 생각나네요. 취후로 누울 무덤의 면적을 말함이죠.
필립 로스는 워낙 유명한데 저는 아직 접해 본 책이 없네요. 제가 관심 갖는 책만 보는지라...ㅋ
기회 있을 때 구매해 읽어 봐야겠습니다.^^

젤소민아 2023-05-17 00:25   좋아요 1 | URL
[자기가 누울 땅만 필요하다]= 이 소설의 주제로 딱이네요! ㅎㅎ

전락-->울분--->에브리맨의 순으로 추천합니다.

최근에 ‘나는 왜 쓰는가?‘란 제목으로 논픽션도 나왔으니 눈여겨 보시고요~댓글 감사해요, 페크님.

페크pek0501 2023-05-18 11:32   좋아요 0 | URL
오오!! 전락-울분-에브리맨의 순으로, 고맙습니다. 메모해 놓고 책 살 때 울분부터 사겠습니다.^^

새파랑 2023-05-16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젤소민아님 리뷰를 읽으니 제가 읽은 에브리맨이 맞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멋진 리뷰네요~!! 필립 로스의 마지막 작품은 아니지만 왠지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좀 슬펐던것 같습니다 ㅜㅜ

젤소민아 2023-05-17 00:27   좋아요 1 | URL
저도 다시 읽고 쓴 리뷰입니다 ㅎㅎ 소설은 읽을 때마다 도드라져 올라오는 문장이 달라져서 좋아요. 저도 아주 새롭게 읽은 에브리맨이었죠.

이게...명작의 향기 아닐까요.

읽을 때마다 새로운 공기를 선사해주는. ㅎㅎ

나중에 더 나이들면 다시 읽어볼 참입니다~그땐 또 뭐가 보일지요~
 
분홍색 흐느낌 문학동네포에지 28
신기섭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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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이 시집을 사지 못했다.

그래서 아직 읽지 못했다.

일찌기, 어디선가 이 시집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준 이가 있어서

시집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다.


개정판도 나와 있었는데, 이제야 아는 척을 한다.


참, 박정했다.


그러나 나는 뜻한 바가 있어 이 시집을 읽는 것을 미루었다.

내가 슬플 적에는 슬픈 시를 읽을 수가 없어서였다.

지금도 나는 슬프지만,

정말 자주 슬프지만...


다행히 사이사이 정말 자주 또 즐겁기도 하기에

내 슬픔과 즐거움은, '쌤쌤'이다.


그런데 생각을 잘못했다.


이 시는 내가 내내 슬플 적에 읽었어야 했다.


슬픔의 사이사이, 즐겁기도 한 나라서

이 시집을 읽으며 내내 미안해해야 할 테니까.


구매할 결심이 섰고, 이제 나는 이 시집을 곧 읽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이렇게 후기를 쓸 것이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슬픈 시는 읽은 적이 없다, 라고.


이 시집의 '슬픈' 사연은,

다른 분의 블로그 내용을 빌려온다.


슬퍼할, 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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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섭 / 경북 문경 출생. 2005년 〈한국일보〉 등단.
 
500년 전 그는 프랑스의 궁중악사였다.

 당시 그는 “지루한 궁중을 탈출한 죄로 사형당했다.” 

그가 사형되고 그를 위해 울어 준 것은 난쟁이들이었다. 


살아생전에 신기섭은 전생체험을 통해 알게 된 자기 전생을 시 〈원에게〉에 쓰며 “이 생도 탈출하는 게 아닐까” 스스로 우려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2005년 12월 4일, 그해 겨울 첫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폭설에 영천행(行) 고속버스가 굴렀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요절 시인에 대한 청탁 전화를 끊으며 책상에 이마를 대고 십 년 만에 그 이름을 세 번 불러보았다. 기섭, 신기섭, 기섭아…….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지금도 내 가슴에 붙어 피를 빨아먹는다. “형, 우리 첫 월급 타면 고기 사먹어요.” 고기 몇 점이 뭐라고 월급을 타야 먹을 수 있었단 말인가. 가난했다, 우리는. 그는 봉천동 언덕배기 옥탑방에서 가난했고, 나는 북아현동 지하 고시원에서 가난했다. 그의 마지막 문자가 남은 휴대전화도 그가 일기와 시 메모를 쓰던 홈페이지도 지금은 페이지를 찾을 수 없다. 그가 결혼을 약속한 착하고 예쁜 ‘원’의 소식도 끊겼다. 세상에 남은 그의 흔적이라곤 유고시집과 그의 모교 동산에 있는 ‘신기섭 나무’ 한 그루뿐이다.


침대 머리맡에 쌓인 시집들 중 그의 시집을 빼냈다. 그는 가족이 없었다. 빨랫줄을 잡고 변소로 가는 할머니가 유일했다. 할머니의 뼛가루를 흰 쌀밥에 섞고 할머니의 분홍색 외투를 불사르고 난 뒤에는 세상에 홀로 남아 분홍색으로 흐느꼈다. 사고가 있기 전날, 그가 홈페이지에 남긴 마지막 글이다.


“밥을 지어 먹고 앉았다가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옥상에 흰 눈이 쌓이고 있다. 눈이 많이 온다는데 새벽에 출장, 영천행(行)-무언지 모를 불길한 기분…… 옥상에 쌓이는 눈은 나 아니면 아무도 밟아줄 사람이 없는데. 그런 장소를 가지고 있는 내 생활이 좋다. 다녀와서 발자국 몇 개 꼭 남기리라. 옥상에 눈이 많이 쌓이고 있다.”
그러나 하얀 꽃무늬 커튼이 있는 방, 밥솥의 보온 불빛이 반딧불이로 날아다니던 옥탑방으로 그는 돌아가지 못했다.


사고 당일, 그는 새로 산 구두와 와이셔츠와 넥타이로 ‘생전 처음’ 차려입었다. 함께 사고를 당했던 직장 동료는 그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정말 맛있게 밥을 먹었다고 전했다. 새 옷을 입고 이승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한 뒤 훌쩍 떠난 것이다. 영천 만불사 뒤뜰에서 그가 생전에 입던 옷가지를 태우며 시인 윤진화는 아흐아흐 울었다. 그의 문재(文才)를 아끼던 시인 길상호가 저도 차마 고개 들지 못하고 흔들리는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쩌면 그날 기섭은 우리 곁에 서서 자기 자신을 또 배웅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입으로 곡(哭)을 하며 길을 떠난다”(〈꽃상여〉). 시인이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하얀 커튼 속으로 사라지던 날, 난쟁이 몇몇이 모여 전생에서처럼 그를 위해 울고 있었다. 그해 첫눈은 한국 시단에 기막히게 부드러운 죄를 지었다. 태어날 때 울지 않았다는 시인이 울지 않는 흰 물방울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다시 12월이다. 곧 첫눈이 돌아올 것이다.
 
박지웅 씀 

*블로그 출처/https://m.blog.naver.com/hansoo8824/220565979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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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대학 은사인 김혜순 시인이 제자들에게 야단 칠 일이 있었던가 보다. 과대표인 그를 불러 호통을 치는데, 그는 벙싯벙싯 웃고만 섰더란다. 화를 돋구는 어린 제자에게 스승은 목청을 더 높이고, 제자는 계속 그렇게 웃고…. 일화를 들려주며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엄마한테 야단맞는 것 같아 그렇게 좋더래. 그 녀석, 그게 그렇게 부러웠던 거야.”

최윤필 기자

출처/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0605262367839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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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오래도록 홀로였던 시인이 남긴 시들은 이제, 

태어나 누구나 홀로일 수밖에 없는 우리 곁에서

그 홀로임을 슬프게 절감할 때,

등을 도닥이는 손이 되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신기섭 시인의 늦은,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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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5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5 0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문자, 미를 탐하다 - 동아시아 문자예술의 미학 아시아의 미 (Asian beauty) 17
양세욱 지음 / 서해문집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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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워서 셀 수없을 만큼의 ‘문자‘를 품었을 이 책이지만, 나는 단 한 구절로 구매를 결심했다. [문자는, 우리 기억의 아웃소싱] 너무나도 당연한 말을 ‘문자‘로 대하니 또다르게 느껴졌는데..요컨대, 이런책의 목적은 이것 아니랴. 당연해 평소에 홀대했던 ‘무엇‘을 또다르게 느끼기. 이번엔,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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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5-16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심오해 보이는 책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