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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다시 읽었다.
전에 뭘 읽었나 싶게, 새롭게 읽히는 건
나이 때문인 것 같다.
분명히 이전보다는 내가 '죽음'에 조금 더 다가든 셈일 테고.
이반
일리치가 골동품 가게에서 샀다며 그토록 기뻐하던 시계가 걸린 식당에서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사제와 추도식에 참석한 지인 몇 명을 마주쳤고~ (19p)
이반 일리치가 고풍스러운 앤틱 스따일의 시계를 사고 그토록 기뻤다면
나는 또 이 노랗고 앙증맞은 시계를 사고 날듯이 기뻐했던 것이었으니!
(수준 차 하고는)

흠, 근데
왜 시계인가.
톨스토이가 아무 거나 갖다 놓고,
이반 일리치가 '그토록 기뻐했다'고 할 리는 없을 테고.
소설을 다시 읽고 보니 짚이는 게 있었다.
어째 '유한성'에 관해 말하는 것 같다.
제목도 '죽음'이 들어가니까.
죽음만큼 유한한 게 있나, 어디.
우리네 삶이란 사실, 정말 많은 게 유한하다.
아니, 전부 다 유한하다.
목숨도 유한하고, 음식도 유한하고, 읽을 책도 유한하고, 심지어는 사랑도 유한하다.
우린 다 못한다. 다 못하고 죽는다. 살아 있을 때도 다 못한다.
시간 없어 못하고, 돈 없어 못하고, 의지 없어 못하고, 깜냥 안 돼 못하고...
(쓰다 보니 깜냥 부족으로 안 되는 게 제일 억울...)
그래서 시계인가 보다.
시간은 무한하니까.
비록 내 시간은 유한하나 세상의 시간은 무한하다.
그래서 내 시간이 무한한 줄 착각한다.
이반 일리치에게, 무한할 것 같던 시간이 어느 날, "사실, 난 유한하지롱."하고 혀내밀고
찾아왔다. 집을 더 있어 보이게 꾸미느라 커튼을 달다 낙상하면서 옆구리를 찧었는데 그 옆구리 쪽으로 지병이 생겼다.
한번은 말귀를 영 못 알아 먹는 도배장이에게 커튼을 어떻게 달지 시범을 보여 주려고 사다리에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워낙 튼튼하고 민첩한 사람이라 균형을 잘 잡은 덕분에 창틀 손잡이에 옆구리를 찧었을 뿐 달리 다치지는 않았다. (38p)
여전히 괴로운 옆구리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고 숫제 만성이 되었다. (중략)
뭔가 끔찍하고 낯선 것, 이반 일리치의 인생에서 지금껏 겪은 적 없는, 너무나 의미심장한 뭔가가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51p)
이반 일리치는 남들 눈에 성공한 자로 보이기 위해 집 꾸미기에 전력을 다했다.
남들 눈에 성공한 걸로 보이면 성공한 줄 아는 그는 더 성공한 자로 보이려고 커튼을 달다가 옆구리를 다쳤고, 그때 얻은 옆구리 통증은 '불치병'이 되고 그는 그것으로 죽음을 맞는다.
이반 일리치도 사실은 우리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았나 보다.
그래서 성공하고 싶었던 거다.
인생이 무한하면 성공 따위 뒤로 미루든 안 해도 그만일 수 있다.
이게 다, 유한해서다.
선택이란 게 그렇다.
나만 해도 하루에 수십, 수백의 선택을 할 수 있는데,
생각해 보면 그 저변에 도사린 '유한함' 때문이다.
다 가졌다면, 선택 따위 뭣하러 하나 말이다.
끌어 담기만 하면 되지.
뭐 또 이리 생각하니 '다 가진 게' 그닥 안 부럽다.
나로 말하자면,
책 고르는 재미, 빵 고르는 재미, 냄비 고르는 재미로 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서.
집이 드넓어서 서점 하나 통째로 옮겨 올 수 있다면 그게 뭐 꼭 그리 좋겠냐 이 말이다.
세상 가질 건 많은데 내게 주어진 기회란 게 고작 '요만큼'이니,
'선택' 앞에서 이다지도 설레게 되는 거 아니겠나 말이다.
이반 일리치는 그 '선택'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이었지 싶다.
평생의 반려자를 선택하는 기준마저 이러했다.
(저 여인과)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나?
이반 일리치에게 (저 여인과)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이유는
남들 보기에 썩 괜찮아서였다.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나?
얼핏, 이 말은 긍정문 같다.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므로.
그러나 곱씹어 보면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니다.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게 '꼭 결혼해야 한다(혹은 결혼하고 싶다)'의 반대말은 아니므로.
이 말은 '틀리지 않다고 해서 꼭 옳은 게 아니다'라는 말과 같다.
‘틀리다’의 반대말은 ‘옳다’가 아니라 ‘틀리지 않다’일 수도 있다.
‘옳다’는 '틀리지 않다'에서 한 걸음 더 가야 도달하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반 일리치는 삶을 긍정문으로 살았던 게 아니다.
엄밀히 말해, '부정문의 부재'로 산 셈이다.
무언가를 부정한다는 것은 선택의 선명한 기준이 된다.
우리는 저것을 부정해야만 이것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의 배면에는
그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은 부정이 존재한다.
무언가를 선명하게 부정하지 않은 데서
이반 일리치의 비극은 시작된 건 지도 모른다.
‘틀리지 않은 삶’을 살면서 그것을 ‘올바른 삶’이라고 믿은 것.
아직, '올바른 삶'에 이르지 못했는데 당도했다고 믿은 것.
사회 통념으로 보기에
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정확히 그만큼 삶은 내 밑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89p
이반 일리치도 나름 선택의 기준이 있었다.
다름 아닌, '유쾌함'이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는 결혼 생활의 원칙을 정립했다. 가정 생활에서는 오직 아내가 남편에게 제공할 수 있는 음식과 살림과 침대 같은 편의 사항만 요구했는데, 이 원칙의 핵심은 사회적 통념이 정해 놓은 외적 형식의 품격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명랑한 유쾌함은 그 밖의 영역에서 추구했으며, 그런 것을 찾아낼 때면 무척 감사히 여겼다. 혹시 저항이나 투정의 기미가 보이면 얼른 자기가 쌓아 놓은 별도의 세계로, 업무로 달아났고 거기서 유쾌함을 찾았다. (30p)
그런 와중에 아이가 둘이나 죽는 바람에 이반 일리치에게 가정생활은 더욱 불뫠해졌다. (31p)
유쾌함
불쾌함
불편함
이반 일리치의 선택의 중심은
밖으로는 '타인의 눈', 안으로는 '유쾌함'이었다.
선택 시 '불편함'을 기준으로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건 위인전에 나오는 거룩한 사람들이나 가능한 이야기.
생각해 보잔 말이다.
우리가 왜 '불편함'의 위험 부담을 떠안으면서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지.
이반 일리치처럼 남의 고르는 것을 고르면 세상 편한데 말이다.
솔직히, 나의 선택의 기준도 그러했던 것 같고, 지금도 그러할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내 주변 반경 100미터 이내 사람들의 선택도 그러할 것 같다.
이반 일리치는 평생 적용해 온 선택의 기준, 그 무용함과 부적절함을
죽음 직전에 깨닫는다. (많은 경우, 소설 속 인물들이 위대한 이유는
우리 대신 죽어주고 깨달아 주기 때문이다)
병에 걸렸더니 타인의 눈이고 유쾌함이고 뭐 하나 쓰잘데기 없어졌다.
병에 걸렸더니 병이 타인 입장에선 불편함의 원흉이 된다.
젊은 몸이 한껏 드러나도록 차려 입은 딸이 들어왔고, 그는 바로 그 육신 탓에 고통받고 있었다. 반면 그녀는 튼튼하고 건강하고 사랑에 빠졌음이 분명한 그 몸을 뽐내고 있었다. 자기 행복을 방해하는 질병과 고통과 죽음에 분노하면서 말이다.
(83p)
이반 일리치가 평생 추구하던 유쾌함은 병이 집어 삼키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통념적인 기준에 의해서만 선택해 오던 이반 일리치는 죽음 직전에야 드디어 질문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잘못 산 게 아닌가?
선택은 '나'의 드러남이다.
나는 선택함으로써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지 알아챈다.
즉, '선택'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만들어가는 행위다.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고,
진짜 나를 잘 모르겠고
자꾸 허무하고 외로워진다면,
어쩌면 그 사람은 통념적인 선택을 해 왔는지 모르겠다.
멀리 갈 필요없다.
씁쓸하지만, 내 이야기다.
이건 내 이야기다.
이반 일리치를 통한 내 이야기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삶의 주인이 되는 대가는 극단의 불편함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삶의 주인이 되는 대가로 나는 앞으로 말도 못하게 큰 '불편함'을 떠안을 거라고.
유쾌함은 물 건너 보내라고.
그런데 잊지는 말라고.
불편함에는 유쾌함이 깃들어 있고
유쾌함에는 불편함이 포진해 있다, 는 사실을.
어랏?
어디서 좀 듣던 이야기인데.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화에는 복이 기대어 있고, 복에는 화가 숨어 있다.
노자 말씀이다.
톨스토이와 노자가 통한다고?
놀란 김에 폭풍 검색을 해 봤더니 이런 게 나왔다!
The chapter focuses on Lev Tolstoy’s translations of the Chinese Daoist philosopher Laozi’s Dao De Jing from English, French, and German translations into Russian. Tolstoy fashioned Laozi as a cosmopolitan philosophical ancestor, who had been ignored by his Eurocentric-minded contemporaries. The chapter details how Tolstoy encountered Laozi in the midst of his spiritual crisis right after the completion of Anna Karenina in 1877, then examines how Tolstoy invoked Chinese philosophical concepts to intervene in an argument between Émile Zola and Alexandre Dumas.
(대충 해 본 해석)
이 장은 레프 톨스토이가 중국 도가 철학자 노자의 <도덕경>을 영어·프랑스어·독일어 번역본을 바탕으로 러시아어로 번역한 작업에 초점을 맞춘다. 톨스토이는 유럽 중심적 사고에 사로잡힌 당대 사람들이 외면했던 노자를 세계 보편적 사상의 철학적 선구자로 연구했다.
이 장에서는 톨스토이가 1877년 <안나 카레니나>를 완성한 직후 영적 위기를 겪던 중 어떻게 노자를 접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이어, 톨스토이가 에밀 졸라와 알렉상드르 뒤마 사이의 논쟁에 개입하고자 중국 철학의 개념들을 어떻게 끌어와 활용했는지를 검토한다.
Oxford Univ. Press/by Jinyi Chu
톨스토이가 1877년에 노자에 접하게 되었고,
1886년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출간했고
1892년에 <도덕경>의 러시아어 번역 작업을 했다는?
이렇게 되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난데없이 노자님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섣부른 단언은 금물이지만,
더 찾아볼 일이지만,
소설 읽다가 만나는 이런 발견은 그야말로 지대한 '유쾌함' 아니겠는가!
------------그 담날------------
톨스토이와 노자는 연결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책이 있었다!
톨스토이가 번역한 도덕경이라...
이거 나만 몰랐나...

톨스토이 이전에 18세기 초부터 러시아정교회에서 중국에 수사를 지속적으로 파견했다고.
러시아정교회와 중국 철학이 진하게 겹쳤다고.
톨스토이도 그에 영향을 받았을 듯.
<톨스토이가 번역한 노자 도덕경>은 일본 학자와 공동번역을 했다고 한다.
공동번역자 '코니시'는 톨스토이의 추종자였다고.
더 찾아보니, 이런 논문이 나왔다.
https://www.mdpi.com/2077-1444/13/9/825?utm_source=chatgpt.com
일부를 떠듬떠듬 옮겨보면 이렇다.
톨스토이는 그의 저서 '노자가 쓴 도(道)와 진리에 관한 책' (Kniga Puti i Istiny, napisannaya itajskim mudretsom Laotsy, 1884)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도는 모든 개인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을 절제함으로써 얻어진다...둘의 본질은 인간 삶의 근간을 이루는 정신과 신성이며, 이는 금욕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인간이 고통이 아닌 축복이 되려면 물질적 욕망이 아니라 정신을 위해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노자가 가르친 것이다.” ( 톨스토이 1956, 350-351쪽 )
그러므로 인간이 고통이 아닌 축복이 되려면 물질적 욕망이 아니라 정신을 위해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노자가 가르친 것이다.
헉, 이것이야말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한 줄 선명한 주제가 아니겠는가!
이 논문 속에 인용된 책을 아마존에서 찾으니 안 나온다.
대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게 나왔다.

한떄는 한동네 살던 일본인과 어쭙잖게 대화가 오갈 수준은 됐는데...
표지 띠에 적힌 걸 더듬더듬 읽어본다.
노자를 계속 읽어온 톨스토이의 사고의 결정체가 이 짧은 글에 응축돼 있다. 서문 '노자의 가르침의 본질에 대하여' 주옥 같은 노자론이다. 100년의 세월을 지나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톨스토이 편역/코니시 마스타로 번역
아, 이 책 읽고 싶은데!!
전문을 일본어로 읽을 실력은 안 되는데!
난 띠지 정도만 읽을 수 있는데!
읽을 수 있든가 말든가, 구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글 번역본은 안 나올려나...
아무튼 책 읽다 얻은 발견의 '유쾌함'은 계속될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