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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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설작법서나 소설에 관한 책들을 찾게 된다.
그 목록에서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와 함께 이 책을 비켜 가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소설 관련서 가운데 가장 유익하다거나, 

최고의 작법서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단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유익하다’거나 ‘베스트’라는 말로는, 

이 책을 읽은 경험을 제대로 옮길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책은 좀 특별했다.
기존의 소설작법서에서는 만나지 못한, 낯선 단어 하나 때문이었다.


중심부.


이 책이 터키 어로 쓰였으니 원어로는 어떤 단어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아무튼 파묵은 이 책에서 소설의 '중심부'를 가장 중요하게 다룬다.

그걸 위해 소설을 '그림'에 빗댄다.


작가가 세밀하게 엮어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우리가 읽으면서 염두에 두었던 많은 세부 사항이 모여 이 장면에서 순식간에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독자는 소설 속 단어들을 읽는 게 아니라, 마치 어떤 풍경화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작가가 시각적인 세부 사항을 주의 깊게 묘사하듯, 독자도 상상 속에서 단어들을 커다른 풍경으로 전환한다는 점입니다.


15p


소설을 읽기 시작하는 것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소설가들 대부분은 은연중에, 아니면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18p


파묵은 소설을 다른 장르의 문학과 이 '중심부'란 것으로 선명하게 나눈다.


소설과 다른 문학 서사의 차이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겠습니다.

소설에는 우리가 그 존재를 믿으며 찾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습니다.

(중략)


이 중심부는 우리가 단어 하나하나를 따라 좇아간 소설의 표면과는 멀리 떨어진 배후 너머에서 있어서 보이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없는, 거의 계속 움직여서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32p


소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작은 관찰로부터 출발하여, 처음에 약속했던 감춰진 진실로, 중심부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49p


여기까지 읽어도 솔직히 '중심부'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과연 이 중심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러나 소설에서 이 중심부는 소설가에게도, 

독자에게도 중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그러면 우리가 중심부라고 하는 것도, 사실 우리 자신이 만든 허구라는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소설 쓰기란 세상 또는 삶에 우리가 찾을 수 없는 어떤 중심부를 설정하고, 그것을 풍경 속에-독자와 상상의 체스 게임을 두면서-숨겨 두는 것입니다. 모든 독자는 그 텍스트를 가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원하는 곳에서 중심부를 찾습니다


165p


이 책의 후반부다.

책이 거의 끝난 것이다.


책의 초반에는 '중심부'를 소설가가 숨긴 '의미’쯤으로 생각했다.
작가가 어딘가에 감춰 둔 핵심, 독자가 끝내 찾아내야 할 정답 같은 것 말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누구나 그런 기대를 품는다. 

“그래서 이 소설이 말하려는 게 뭘까.” 

중심부라는 말은 그 질문을 정당화해 주는 단어처럼 보였다.


하지만 파묵의 말을 따라가다 보니, 그 생각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심부는 보이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없으며, 거의 계속 움직여서 잡을 수 없는 무엇이라고 했다. 


그 설명을 읽고 나면, ‘의미’라는 단어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의미라면 붙잡을 수 있어야 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고정되어 있어야 하니까.


소설 쓰기란 세상이나 삶에서는 끝내 찾을 수 없는 어떤 중심을 하나 설정해 두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중심을 노골적으로 제시하는 대신, 풍경 속에 숨겨 둔다. 

독자와 상상의 체스 게임을 두듯이, 한 수 앞을 보여주는 대신 여러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 둔다. 여기에도 있을 것 같고, 저기에도 있을 것 같은 상태로.


무엇보다, 중심부는 그 이름은 고정된 듯 여겨지나, 결코 고정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독자는 같은 소설을 읽으면서도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린다. 

같은 문장을 읽고도 어떤 이는 한 장면에서 중심부를 느끼고, 

어떤 이는 인물의 침묵에서, 또 어떤 이는 소설을 덮고 난 뒤 오래 남은 기분에서 그것을 짚어낸다.


말하자면 중심부란 '의미'와 달리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독서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파묵에 따르면 말이다.


중심부는 작가가 숨겨 둔 메시지가 아니라, 

독자가 끝내 놓지 못하는 감각에 가깝다고 이해해 본다.


그래서 이걸 연결한 거다.

소설/그림/감각

 

설명하려 하면 빠져나가고, 

요약하려 하면 흩어지고

그런 한편

읽어내기만 하면, 

결국엔 끝까지 다 읽기만 하면

우리가 어딘가에 닿아 있다고 말하게 하는 것-


파묵이 말하는 중심부란 그것이 아닐까 한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 '그'.


이 책을 읽고 앞으로의 내 소설 읽기가 조금 달라질 것 같다.

의미를 파악하려 하기보다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자리가 보이면 

잠시 머물기.

감각의 안테나를 펴고 쉬기. 

그리고 느끼기. 

뇌보다 촉수를 가동하기.


소설 쓰기는 이걸 반대로 위치하면 되겠다.


의미를 전달하려 하기보다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자리를 마련하기-.


중심부가 고정되지 않아 끝내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면

읽는 사람마다 다른 자리에 남는다면,


그 소설은 성공한 것이다.


그 '다름'이야말로, 소설이 계속 읽히는 이유일 테니까.



*지금 병행 독서하고 있는 수잔 손택의 <해석에 반하여>와 

어째 결이 딱딱 맞아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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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12-28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혹하는 글쓰기 너무 좋았던 책이예요. 오르한 파묵 읽고 싶네오. 한때 그의 소설에 빠져있었는데,,, 중심부!
소설을 읽기 시작하는것은 풍경속으로 들어가는 것!
공감합니다.